크리스천과 소망은 다시 길을 나섰을 때 갑자기 크리스천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 올랐습니다.
"소망씨!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 사는 착한 남자가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작은 믿음으로 그의 고향은 성실이었습니다. 우리와 같이 순례길을 가고 있던 작은 믿음은 우연히 거기 앉아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때 넓은 문에서 내려오는 오솔길에 세 명의 포악한 건달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의 이름은 심약, 불신, 범죄로서 한 형제들이었습니다. 그 건달들은 작은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속력을 내어 달려왔습니다. 마침 이때 작은 믿음은 막 잠에서 깨어나 순례길을 시작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건달들은 그의 뒤를 쫓아가면서 위협했습니다. 작은 믿음은 겁을 집어먹고 도망칠 힘도 다 잃고 말았습니다. 결국 작은 믿음은 돈을 빼앗기고, 건달들에게 두들겨 맞고 쓰러졌습니다."
"하지만 그자들이 작은 믿음의 가진 재산을 다 빼앗아가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보석을 감추었던 곳은 그들이 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무사했지요. 그러나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그 착한 사람은 자기 생활비의 대부분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답니다."
"참 놀라운 일이군요. 강도들이 그것을 빠뜨리고 가기는 했지만, 작은 믿음이 그것을 잘 숨겨서 그렇게 된 것은 결코 놀랍지 않습니까? 왜냐면 그는 강도들이 오는 것을 보고 하도 낙담하여 어떤 것을 숨길 만한 힘과 재주를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래요, 그렇지만 작은 믿음이 그 좋은 것을 잃어버리지 않은 이유는 자기 노력 때문이라기보다는 선하신 섭리 덕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은 믿음은 진실하지만 안타깝게도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였군요. 그는 늘 깨어서 조심하지 못하며, 세상이 제시하는 길에 흔들리고, 사탄의 횡포에 시달리며 그 덫에 걸리기 십상인 우리 이웃들의 믿음이 될 수 있겠군요."
무신론자와 무지
그때였습니다. 두 순례자들이 앞을 바라보니 잘못된 방향으로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무신론자였습니다.
"우리는 시온 산을 향해 가고 있는데, 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크리스천이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나도 한때는 너희들처럼 하늘의 왕국을 찾아다녔단다. 근데, 그런 건 없어!"
"이 세상 너머를 보셔야 합니다. 하늘의 왕국은 이 세상에 너머에 있어요."
"내가 길에서 '무지'라는 사람을 만났었지. 그는 너희들의 종교에 대해서 참 흥미로운 말을 하더군.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늘의 왕국에 갈 수 있는 길이라고 믿는 것이 참으로 웃긴다고 하더군. 왜냐면 우리는 그냥 믿는다라고 입으론 말하고 삶은 여전히 사악할 수 있다는 거지. 그러고도 천국에 가고!"
소망이 다시 말을 이어 갔습니다. "그의 이름이 무지라고 했나요? 아~ 그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하고도 남습니다. 그러나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면 삶을 통해서 그것을 증명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종교라는 규칙적인 삶과 의식을 통해서 외식하며 살기도 하겠지만, 마지막 때에는 그런 사람은 왕국 문 앞에서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가 자신의 자녀인지를 아시지요."
다시 크리스천이 말했습니다. "성경에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이 있죠. 우리의 행동이 우리를 구원해서가 아니라 진짜 믿음은 진실된 행동으로 열매 맺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짜 믿음은 형편없는 우리의 삶을 고쳐주니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위선에 속으실까요?"
"나도 지금까지 천국을 찾아 여기까지 왔지만, 그게 다 헛수고란 걸 이제 깨달았네. 그래서 난 예전의 즐겼던 길로 다시 돌아가봐야겠어. 그럼 자네들이나 천국을 찾아가 보게!"
작은 믿음의 사람들
크리스천으로 살면서 작은 믿음은 바로 나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의 제자들의 작은 믿음의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의심 많은 도마입니다. 그는 예수의 부활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못자국을 만지고서야 예수를 믿었습니다. "너는 만져봐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따를 적에만 해도 작은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세 번씩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정했고, 또 파도치는 갈릴리 바다 위를 걸었을 때도 그랬습니다. 잠시나마 베드로가 배 밖으로 나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내게로 오라" 주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베드로는 바다에 불고 있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서 물속에 빠져 가며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하고 소리쳤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하고 꾸중하십니다.
주님은 세상 방식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와서 나를 따르라... 내가 있는 곳을 보라...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 내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해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크리스천으로 살고 있지만 안팎의 두려움, 불안, 걱정, 잡생각 없이 지나가는 날은 우리 인생에 거의 하루도 없습니다. 이런 어두운 세력은 거기서 완전히 벗어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우리 세상에 구석구석 파고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베드로에게 한 말이 내 귓가로 생생히 들려옵니다.
베드로가 불안해하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직접 내게도 찾아오셨습니다. 나이가 들어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을 때 그것은 주변에 병들어 늙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병이 언젠가 나한테도 닥칠 텐데!’ 그래서 밤잠을 설칠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령으로 내게 찾아오셨습니다. ‘내니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네 육신은 언젠가 병들어 죽겠지만 너는 새 생명 그리고 그 영은 영생으로 내가 책임지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말씀으로 이젠 허무와 두려움이란 죄의 몸에서 한 없는 영혼의 자유를 맛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음의 몸에서 나를 살리셨고, 그것도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리시는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늘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 성경의 작은 믿음의 사람 하나를 수채화로 그렸습니다.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를 그린 이유는 한때 나도 니고데모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니고데모는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회적 지위와 체면으로 전폭적으로 예수를 영접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밤에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아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1-7)
니고데모는 그 당시 부유하고 저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꽤 유명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 이미 수많은 민중들이 예수를 따르고 있다는 소문을 익히 듣고 있었습니다. 그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밤을 택해 예수님을 찾은 것도 그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 동문서답으로 답변을 합니다. 분명 그는 지성인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그 순간 어리석은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존경하고 그의 말씀을 따르고 싶지만 예수 믿는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나도 크리스천이었지만 내가 하는 동물학 연구와 황새복원, 교육, 강연 계획이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내 영광을 위한 것임에도 그것들을 포기할 뜻이 없었습니다.
삶의 중심에 들어오신 예수
물리학을 전공하는 내 동료 교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진실하고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하나님의 계심'을 믿는지 말을 꺼냈습니다. "독일의 물리학자인 칼폰 바이제커(Carl von Weizsäcker)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나에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는 항성내부에서의 핵융합에 대한 연구를 한 세계적 물리학자이자 철학자"라고 답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독일의 괴팅겐 막스플랑크 연구소에 근무를 했는데, 신앙을 가진 물리학자였다." 내 동료 물리학 동료 교수가 그런 정보를 꺼내준 것은 지금과 같이 인공지능을 가진 웹 검색을 통해 내가 말해주었습니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거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물리학자들 가운데 약 절반 정도가 신앙을 갖고 있다." 나는 지구상에서 최고의 두뇌를 가진 물리학자들이 이렇게 많이 '하나님의 계심'을 믿고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여태 알고 있기로는 자연과학자이지만 생물학을 전공하고 있는 내 동업자들은 '하나님의 계심'을 믿는 사람들이 그 보다 숫자가 훨씬 적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자연과학 분야에서 물리학 전공자들이 의외로 신앙인이 많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빅뱅이론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박사의 평소 언론과의 인터뷰 기사에서 작은 힌트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2018년 고인이 되기 전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하나님이 계심을 믿느냐?"질문했을 때, 그는 대답을 거부했고, 그 이유를 묻자, '내가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다고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내가 자신들이 믿은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우주가 과학의 법칙에 의해 운영된다는 사실을 믿는다. 이 법칙은 하나님이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법칙이 깨지도록 간섭하지는 않는다.'라고 즉답을 피해 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빅뱅과 같은 요인으로 우리가 사는 우주 비슷한 게 나올 가능성은 정말 희박하다. 신앙적인 의미가 있는 게 틀림없다.' 또 다른 데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와 같은 존재를 창조하기로 마음먹은 하나님의 솜씨라는 것 말고는 우주가 꼭 이런 식으로 시작되었는지 그 까닭을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 동료 물리학과 교수의 가족들은 교회에 나가는 걸로 봐서 그도 무신론자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우리 주변의 사람들 가운데, 의외로 존 번연이 천로역정에서 등장시킨 작은 믿음, 무지와 무신론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물리학을 전공하는 내 동료 교수도 "하나님이 계심은 확률로 50%, 기왕이면 믿고 천국 가는 게 낫지 않겠는가!"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일종의 보험정도 들어놓는 식의 작은 믿음이 아니길 바랍니다. 누군가 "당신 삶의 중심은 누구요?" 하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나를 불러 따라오게 하신 예수님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지금 나에게 신앙 공동체의 온전한 일원이 되려는 수고는 수시로 많은 우상과 체면을 버리고, 또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오직 예수님만을 따르기로 하는 수고가 오롯이 내 육신에 스며들기 바라고 또 바랍니다.
성 이시돌 순례길에서 예수께서 두 죄수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조형물 앞에 섰습니다. 그 모습을 한지 위에 수채화로 옮깁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를 위해 지신 주님의 상징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주님은 두 죄수와 함께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는 다른 죄수 두 사람도 사형을 받으러 예수와 함께 끌려갔다. 골고다라는 곳에 이르러, 병사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두 죄수도 하나는 그분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못 박았다. 예수께서 기도하셨다. "아버지, 이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중략) 예수의 머리 위에는 <이 사람은 유대인의 왕>라고 쓴 팻말이 붙어 있었다. 함께 달린 죄수 가운데 한 사람도 그분을 저주했다. "너는 대단한 메시아가 아니냐! 너를 구원해 보아라! 우리를 구원해 보라고!" 그러나 다른 죄수가 그의 말을 막았다.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이분은 너와 똑같은 일을 당하고 있다. 우리야 처벌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이분은 그렇지 않다. 이분은 이런 처벌을 받을 만한 일을 하신 적이 없다." 그러고 나서 그가 말했다.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그렇게 하겠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어느덧 정오가 되었다. 온 땅이 어두워졌고, 그 어둠은 이후 세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성전의 휘장 한가운데가 찢겨졌다. 예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아버지, 내 생명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그 말을 하시고 예수께서 숨을 거두셨다(누 23:32-46)'
지금 나도 한 죄수처럼 예수님께 날 온전히 맡기고 있는가?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믿는 순간 우리는 새 생명을 얻게 됨입니다. 그게 어찌 가능할까요? 어떻게 보면 너무 불공평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죄수로 살았던 사람인데, 한 순간 고백 만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니요? 세속 종교들은 몸과 마음의 깊은 수양이나 착한 일을 많이 하면 낙원에 나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진정 예수의 십자가 옆에 달린 죄수처럼 한 순간 고백 만으로 낙원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존 번연의 '작은 믿음'은 비록 세상에서 흔들리는 삶을 살았지만, 자신의 공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나의 고백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