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과 소망은 기쁨의 산에 도달했습니다. 기쁨의 산의 소유주는 목자들이었습니다.
"이 산지는 임마누엘 님의 땅으로 그의 도성이 바라다 보이는 영역 내에 있지요. 그리고 그 양들도 그분의 것입니다. 그분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답니다."
크리스천은 먼저 한 분의 목자에게 물었습니다. '이 길이 천성으로 가는 길입니까?"
"올바로 오셨습니다."
"천성까지는 얼마나 남았나요?"
"어떤 사람들은 너무 멀어 못 가지만, 거기 갈 사람들은 다 갑니다."
목자들은 두 순례자를 데리고 오류라고 불리는 산꼭대기로 안내했습니다. 그 산은 매우 가파른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그곳에는 산산조각 난 사람들의 시체가 밑바닥에 널려 있었습니다.
크리스천은 산산조각 난 사람들의 시체를 보고 또 물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요?"
" 당신은 몸이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떠드는 후메내오와 빌레도(딤후 2:17-18)의 말을 듣고 오류에 빠졌던 자들에 관해 들어 보지 못했나요?"
"예,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이 산 밑바다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 있는 저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당신들이 보다시피, 저들을 오늘날까지 매장시키지 않은 채 남겨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산 가까이 오거나 기어오르고자 할 때 경고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두 순례자는 목자들의 안내에 따라 지옥으로 가는 샛길로 들어섰습니다. 멀리서 불이 타는 듯한 소음과 고통당하는 자들의 울부짖는 소리와 유황 냄새도 났습니다. "이곳은 지옥으로 가는 샛길인데, 위선자들이 주로 가는 길이지요. 예를 들면 에서처럼 출생 권리를 파는 자들이나 유다처럼 자기 스승을 파는 자들, 알렉산더처럼 복음을 모욕하는 자들, 아나니와와 그 아내 삽비라처럼 거짓말하고 속이는 자가 들어간답니다."
다시 크리스천과 소망은 목자들과 작별하고 자만의 지방으로 들어섰습니다. 어두운 길에서 한 사람이 일곱 가닥의 강한 밧줄에 묶인 채 일곱 귀신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귀신들은 그를 예전에 순례자들이 보았던 언덕 옆 문으로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마 12:24; 잠 5:22).
이를 본 크리스천과 소망은 너무 무서워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스천은 혹시 귀신들에 끌려가는 사람이 아는 사람인 것 같아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크리스천은 그가 배교 마을에 살았던 변절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치 현장에서 붙잡힌 도둑처럼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소망은 그가 지나간 다음에 그의 뒤를 보았는데, 그 사람의 등에는 '음란한 신앙 고백자요 저주받은 배교자'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새들과 대화
나는 제주도 성이시돌 순례길에 올랐습니다. 그곳은 나에게 기쁨의 산이 되었고 앞으로 가야 할 쁄라의 땅이기도 합니다. 물론 제주도는 내가 자연과학자로 동물행동 실험을 하기 위해 자주 들렸던 곳입니다. 휘파람새들의 방언에 대한 연구를 위해 몇주를 체류하기도 했습니다. 휘파람새의 방언이라고 했나요? 그래요 휘파람새들도 지역마다 사투리가 있습니다. 참새목에 속해 있는 작은 새들은 대부분 노래를 합니다. 그 노래의 기능은 수컷이 암컷을 유인하고 자신의 터를 과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노래는 수컷이 부른다고 생각하며 되고, 암컷은 자신들의 동향인 수컷의 노랫소리에 더 매력을 느끼지요. 어린 휘파람새 수컷들은 어려서부터 자기가 태어난 고장의 노랫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자연히 그것을 따라 부르려 합니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처럼 휘파람새들도 방언이 생겨난 것입니다.
나는 자연과학자로 동물들의 소리에 대해 특별히 더 관심을 갖고 그 소리의 의미를 밝히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초음파를 내는 박쥐에서 목청이 발달하지 못하여 부리를 부딪쳐 소리를 내는 황새까지입니다. 그래서 나는 자연에 가면 동물들의 소리에 대해 일반 사람들보다 조금 더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까치가 울면, 분명 이 까치는 날 이방인임을 알아차리고 배우자에게 경계심을 가지라 할 것입니다. 자연과학자는 이것을 가설로 설정하고 실험을 통해 증명해야만 합니다. 물론 휘파람새의 방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실험은 연구실에서 자연과 같이 꾸며 놓고 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야외에서 직접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야외에서 나는 가끔 '호 르르르~~ 호 르르르~~'휘파람새 소리를 내봅니다. 곧장 휘파람새 수컷이 내가 소리 내는 입술 근처까지 다가옵니다. 왜 암컷이 아니고 수컷이냐고요? 새들의 노랫소리는 암컷을 유인하는 역할을 하지만, 이때는 '이곳은 내 땅이니 물러나라!'의 텃세권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야외에서 한 휘파람새의 땅을 침입한 꼴이 되고 맙니다. 실제 야외 실험은 모두 이 소리를 녹음기로 녹음해 이루어집니다. 스피커에 나오는 노랫소리를 들고 터 주인인 수컷은 소리가 멈출 때까지 스피커 표면을 맹렬히 쪼아댑니다.
동물들의 사랑?
동물행동학자로 살아오면서 동물들도 사람처럼 사랑이 있을까? 말하자면 어미가 새끼에 대한 모성애 같은 것 말이죠.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나는 동물학자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느끼는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연구를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제비 한 쌍이 처마 밑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리고 5~6개의 알를 낳았습니다. 어미가 알을 동시에 낳지 않고 하루에 하나씩 혹은 하루 걸러 하나씩 낳기도 합니다. 그러면 새끼들은 첫 번째 알에서 깨어난 새끼가 가장 크고 막네가 가장 작습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벌어진 노란색 입의 크기로 금방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실험을 해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됩니다. 어미 새가 먹이를 부리에 가득 물고 와, 가장 크게 벌린 입에 먹이를 다 털어 넣고 다음 먹이사냥을 나갑니다. 그다음 먹이를 물고 와서는 둘째, 셋째 순서로 새끼입에다 넣어줍니다. 아주 규칙적입니다. 방금 먹은 새끼에게 중복해서 넣어주는 법은 없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과연 어미는 새끼들을 다 구분할 수 있을까?'입니다. 그걸 마분지를 입 벌린 모양으로 만들어 노란 광택이 나도록 색칠을 한 후, 하나는 첫째보다 더 큰 게, 다른 하나는 막대 입보다 작게 만들어, 어미 제비가 먹이를 가지고 와, 5마리의 새끼들이 동시에 입을 벌렸을 때 이 가짜 부리를 새끼들의 주둥이 옆에 갖다 대 주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어미는 자기 새끼들보다 큰 가짜 부리에 먹이를 넣어주지만, 작은 입에는 절대 먹이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 5마리의 제비 새끼들이 모두 부화하고 이틀정도가 지나면 어미는 먹이를 실어 나르기 시작합니다. 첫날 어미 제비들은 하루에 80회 정도 먹이를 날라다 줍니다. 어미는 가장 큰 입을 벌린 새끼에게 먹이를 주고, 3~5분 정도 지나서 둘째에게 먹이를 줍니다. 이때 첫 째는 먹이가 모이주머니 속에 남아 있기 때문에 아직 덜 배가 고파, 입을 크게 벌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어미가 먹이를 가져오는 시간이 지체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만일 20분 정도가 지체됐다고 가정하면, 셋째 차례에 첫째의 입이 다시 가장 크게 벌어져, 셋째, 넷째 그리고 다섯째는 아예 먹을 기회가 조차 오지 않습니다. 참 매정한 일입니다.
어미가 이것을 알았다면 참 좋을 텐데, 하나님은 이 제비 어미에게 그것을 분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지 않았습니다. 사람처럼 그런 지혜를 가지려면 지금보다 제비의 뇌가 적어도 5-6배 더 크게 만들어져야 할 겁니다. 그 작은 뇌로는 분별능력을 갖추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요즘처럼 제비들의 먹이터가 농약이나 살충제에 오염돼 벌레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진 현실에서는 다섯 마리가 아닌 2마리 새끼를 길러내는데도 힘겨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창조세계의 돌봄을 동물들에게 맡기지 않고 인간들에게 맡겨졌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깨닫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물을 다스려라"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에게 지혜를 부여하고, 생물들을 다스리라는 권한을 주었지만, 아직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하고 있지 못해 한 자연과학자로서 슬퍼질 때가 참 많습니다.
자연과학자로 연구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느낄 때가 많습니다. 물론 자연은 아름다움을 넘어 신비로울 때도 참 많습니다. 연구하면 할수록 미지의 신비로움이 존재하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과학자들이 이런 자연의 신비로움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 신비로움을 밝히려는 노력은 또 다른 환희와 희열을 가져옵니다. 동물행동학의 아버지라 불린 콘라드 로렌츠(Konrad Lorenz)는 동물들의 소리와 행동을 연구하여 노벨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책 '솔로몬의 반지'는 국내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성경의 구약에 나오는 솔로몬왕은 반지를 끼고 동물들과 대화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성경에는 없지만, 성경에는 솔로몬왕이 하나님께 재물이나 권력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고 지혜를 달라고 요구한 왕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에도 나오는 솔로몬왕의 재판은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두 여인이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신의 아이라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솔로몬왕이 모성을 이용해 친 어머니를 가려낸 명재판입니다.
아, 하마터면 하나 빠뜨릴 뻔했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움을 넘어 기적들로 꽉 들어차게 창조되었습니다. 내가 있는 이곳이 태양을 중심으로 빠르게 돌고 있는데도 나는 어지럼이나 멀미도 느끼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 또 우주의 미아 신세로 추락하지 않고 살고 있다는 것, 이 기적들은 내가 이 종이 위에 모두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그런 아름다움이나 신비한 것을 뛰어넘어 기적들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미 내게 꿈에서나 상상하고 짐작하고 구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밖에서 나를 강요하시지 않고 내 안에서 깊고 온유하게 활동하시는 그분의 영을 통해 일을 해 나가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대화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는 장면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 시편은 모두 다윗을 포함한 시편 저자들의 하나님과 대화록입니다. '과연 나도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과 대화가 가능할까?'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일방적 기도가 하나님과 대화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성경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하나님과 소통하는 장면을 보면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 '뒤에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는 절박한 순간, 모세는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어찌하면 좋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백성들을 인도하려 하니 앞에 홍해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제게 길을 열어주십시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즉시 대답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출 14장 15~18절.
시편저자인 다윗, 솔로몬 등과 같이 하나님께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만 하나님과 이런 소통이 가능할까요? 내가 오늘 산을 오르며 그런 소통이 가능하다는 비밀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는 비밀입니다. 우리는 아담 한 사람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단절된 삶을 연결시켜 준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로마서 저자 바울은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 그분은 자신과 더불어 죄를 끌어내리셨고, 다시 살아나셨을 때 그분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내려오시게 하셨다'적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시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모국어로 말씀하시며, 우리는 그 말씀을 한 마디로 놓치지 않습니다'(메시지 성경, 롬 6:11).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받은 이 부활 생명의 삶은 결코 소심하거나 무거운 삶이 아니고, 기대 넘치는 모험의 삶, 어린아이처럼 늘 하나님께 "다음은 또 뭐죠, 아빠?"라고 묻는 삶이라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 산에 올르며 하나님과 끊임없는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나의 일방적 기도가 아닌, 그분의 음성을 듣고 또 묻는 시간이었습니다. "아, 지금까지 왜 내가 이런 하나님을 몰랐을까?" 나도 너무 의아해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원인이 내 죄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또 그분이 그 죄를 몽땅 가져가심으로 나는 다시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고 있습니다. 박쥐가 인간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내서 그 반향음으로 목표를 향해 전진하며 살아가듯, 내가 쏜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으로 다시 듣고 시온 성을 향해 달려가길 원합니다.
성 이시돌 순례길
제주도 방문에서 동물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미루고 성이시돌 순례길을 걸으면서 이야기를 할 차례입니다. 늦은 나이에 제주도에서 잠시 성이시돌 순례길을 걸어봅니다. 아니 순례길하면 우리는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제주도에 순례길이 있다는 사실은 그렇게 제주도를 많이 방문했지만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성 이시돌(Isidore)은 스페인 마드리드 출생의 농부이며 가톨릭 성인(축일, 5월 15일)인 농부의 이시도르(라틴어 Isidorus)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곳에 가면 2000년 전 예수의 공생애를 다룬 조형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의 조각상은 너무 끔찍해 오래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를 십자가 위에 누인 채 대못을 그의 손바닥 위에 대고 박고 있는 장면입니다. 조각상의 얼굴에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처절한 고통을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한 병사가 오열을 참지 못하고 예수께로 다가서려는 한 여인을 저지하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조각상이라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2000년 그 현장에 내가 있었다면, 나는 평소 잔인한 장면을 보지 못하는 성격이라 아마 기절했을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례길에서 이 장면은 정말 그림으로 그릴 수 없었습니다. 화가는 그때의 감정을 그대로 실어 회화로 옮겨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의 시신을 거두는 사람들의 조형물로 대신했습니다. 방금 전 발과 두 손에 못 박힌 채 매달린 채 몸무게로 가해지는 찢기는 고통은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의 말씀대로 예수님이 날 위해 그런 고통을 참아내셨다니 정말 믿을 수 없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시고,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나는 이 그림들이 단순히 종이 위에 붓과 물감으로만 그려진 것이 아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그려지기를 간구합니다.
이 사실을 인간의 감정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 방금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아리마대가 고향인 요셉이라는 사람이 예수의 시신을 수습하는 장면에서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당하고 이대로 끝나는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냥 역사에 성인으로 태어나셔 돌아가셨구나!’ 그건 그동안 예수께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왕으로 오심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반전을 일으킵니다. 그 예수가 3일 만에 부활하신 겁니다. 3일이면 생물학적으로 시신은 부패하기 시작할 시기입니다. 그러나 멀쩡한 몸으로 그 제자 도마에게 나타나 못자국을 확인시키며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만 따라다녔던 제자 베드로 앞에도 오셔 베드로와 식사도 함께 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40일을 제자들과 함께한 뒤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늘로 올라갔지만, 성령을 보내셔 제자들에게 자신이 살았던 삶을 제자들에게도 똑같이 살아주길 부탁하셨습니다. 그냥 말로만 부탁하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성경에서 오순절 다락방 모인 제자들의 몸속에 성령으로 임하셨습니다. 이것은 한 자연과학자의 이성과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 보내신,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성령의 역사이자 은혜입니다. 이 장면들 하나하나 한지 위에 옮겨질 때마다 오롯이 내 영혼 깊숙이 만저지고 있음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