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가로막는 부드러운 속삭임
내 유년 시절은 넉넉하지 않았다.
오늘날은 예전보다 훨씬 잘살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행복이 늘어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서로의 고통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내 모습 속에서 한숨을 내쉴 때가 많다.
삶이라는 순례길 위에서 나는 종종 지나치게 당당하고 스스로 잘났다고 믿는 이들을 만났다.
그들은 세상의 지식과 논리로 무장하여, 나를 ‘절망의 늪’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 길에서 무너지지 않고 지금까지 걸어올 수 있었던 것,
전도자와 같은 이들의 존재 덕분이었다.
하나님은 때마다 누군가를 보내셔서 다시 좁은 길로 돌아서게 해주셨다.
고집과 변덕
크리스천이 멸망의 도시를 떠났을 때, 그의 뒤를 따라온 이가 있었다.
이름은 ‘고집’이었다. 그는 크리스천에게 물었다.
“무슨 연유로 고향을 떠나 이렇게 떠돌고 있는 거요?”
크리스천은 손에 쥔 책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나는 하늘에 간직된 썩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는 유산을 찾아 떠나고 있습니다.
이 책에 기록된 대로,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고집은 얼굴을 붉히며 크게 웃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멸망의 도시로 되돌아가 버렸다.
그의 마음은 이미 길가와 같은 밭(마 13:4)이었다. 말씀이 들어갈 틈은 없었다.
그 옆에는 ‘변덕’이 있었다. 그는 크리스천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고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크리스천과 운명을 함께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다짐은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못 가 그들은 ‘절망의 늪’이라 불리는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변덕은 발버둥치며 외쳤다.
“당신이 말한 순례길이 고작 이 모양이오? 이게 약속된 축복입니까?”
그리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이 왔던 길로 돌아가 버렸다.
진리 앞에서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처음부터 거절하고 돌아가는 고집, 잠시 감동하지만 어려움 앞에 무너지는 변덕.
두 모습은 지금도 우리 마음 안에 숨어 있다.
도움의 손길
늪에서 허우적대던 크리스천 앞에 한 인물이 다가왔다. 이름은 ‘도움’이었다.
“이 수렁은 고칠 수 없는 곳입니다.
죄인이 자기 형편의 절망을 깨닫는 순간, 두려움과 불안, 수치와 좌절이 이 늪으로 흘러들어옵니다.”
도움은 손을 내밀어 크리스천을 끌어올렸다.
그의 손을 붙잡고서야 크리스천은 다시 길을 걸을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무너지는 자리에서 가장 먼저 다가온다.
절망의 늪에 빠진 우리를 붙드시는 손길, 그것이 바로 은혜다.
내 순례길의 전도자
내 삶에도 전도자가 있었다.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운 김용기 장로님.
그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살후 3:10)라는 말씀으로 한국전쟁 이후
가난한 땅에 근면과 자립을 가르쳤다. 그의 정신은 훗날 새마을운동의 뿌리가 되었다.
그의 가르침 속에서 나는 배웠다.
믿음은 머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오병이어의 기적
예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은
단지 배고픔을 해결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을 통해 큰 은혜를 이루신다는 계시였다.
오늘도 하나님은 작은 손길과 작은 선물을 사용하신다.
작은 실천, 살아 있는 믿음
어느 날, 지하철 입구에서 잡지를 파는 노숙인을 만났다.
잡지를 팔면 절반이 그 노숙인의 것이라는 말에 새 책이 나올 때마다 열심히 지하철 입구를 찾는다.
그런데 어느날, 검은 롱패딩을 입은 모녀가 그 자리에서 양말을 팔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그들을 돕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 빈손인 나를 보며 신앙이 말뿐이었음을 깊이 깨달았다.
“내 형제들아,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약 2:14)
믿음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작은 나눔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신다.
세속현자와 도덕마을
절망의 늪 수렁에서 빠져나온
크리스천은 순례길 초입에서 점잖고 교양 있는 한 사람,
‘세속현자’를 만났다.
그는 차분하고 설득력 있는 말투로 물었다.
“이렇게 지친 얼굴로, 등에 짐을 진 채 어디를 가는 길입니까?”
크리스천은 대답했다.
“나는 전도자가 알려준 좁은 문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야만 이 짐을 벗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세속현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염려스러운 듯 말했다.
“그 길은 위험하고 험합니다.
굳이 그리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 근처에 ‘도덕마을’이 있소.
그곳의 ‘율법 어른’과 그의 아들 ‘예의’가 당신의 짐을 덜어줄 겁니다.”
그 말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심지어 경건하게 들렸다.
그러나 그 속에는 복음 대신 도덕,
은혜 대신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달콤한 속삭임이 숨어 있었다.
크리스천은 그 말에 혹해, 도덕마을로 향했다.
그러나 언덕은 생각보다 가팔랐고,
짐은 점점 무거워졌다.
하늘은 어두워지고, 산 위에서는 불길이 솟구쳤다.
그때 그는 깨달았다.
도덕은 아름다워 보였으나, 그 안에는 십자가가 없었다.
그 길은 구원이 아니라 멸망의 언덕이었다.
오늘의 세속현자
세속현자는 오늘도 길가에 서서, 나그네의 발걸음을 붙든다.
그의 얼굴은 날카롭지 않고, 목소리는 늘 온화하다.
“그 길은 너무 험하지 않은가?”
“짐을 그렇게까지 짊어질 필요가 있겠는가?”
“이웃을 해치지 않고, 성실히 살기만 하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산이 다를 뿐, 오르는 길은 결국 하나가 아니겠는가?”
그의 말은 합리의 옷을 입고 있고, 지혜의 가면을 쓰고 있다.
그러나 그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순례자에게 고난의 언덕을 피하라고 권하고,
짐이 벗겨지는 언덕이 아니라, 짐과 함께 안주하는 평지를 제시한다.
그 길은 부드럽고 넓다.
발이 아프지 않고, 질문도 많지 않다.
그러나 그 끝에는 주님의 형상이 없다.
그곳에는 종교는 있으나 구속은 없고,
도덕은 있으나 피 흘림은 없다.
나 역시 한때 그와 같은 마을에 머문 적이 있다.
세속현자의 속삭임
중학교 시절, 불교 재단의 한 사립학교 성문 안에서였다.
아무도 신앙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 마을의 공기는 『천로역정』의 도덕마을과 흡사했다.
그곳에서는 이렇게 가르쳤다.
"착한 일을 차곡차곡 쌓으면 죽어서 극락에 이를 것이며,
그 행위의 무게에 따라 육도(六道)의 길을 돌고 돌아
끝없는 윤회(輪廻, Samsara)의 수레바퀴를 멈추지 못한다고."
십자가는 길에서 제거되었고,
회개는 필요 없는 단어가 되었다.
죄는 잘 관리하면 될 짐이 되었고,
구원은 스스로 벌어야 할 품삯이 되었다.
오늘의 세상 또한 다르지 않다.
많은 마을들이 십자가 없는 신앙을 세워 두고,
형상을 만들며 그것을 ‘도움’이라 부른다.
사람의 손으로 깎은 것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도
그것을 우상이라 부르지 않으려 애쓴다.
그러나 길 위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언제나 분명했다.
타협의 도덕 마을에서도,
세속현자의 속삭임 속에서도 그 말씀은 흐려지지 않는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
이 말씀은 순례자의 나침반이며,
넓은 길을 등지고 좁은 문으로 향하게 하는 단 하나의 음성이다.
세속현자의 길을 지나칠 때,
비로소 순례는 다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간다.
세속현자와 학문의 문 앞에서
나, 순례자가 길을 가던 중,
길은 어느새 넓어지고 바닥은 단단해졌다.
먼지는 줄어들었고, 발걸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그때 한 사람이 학문의 문 앞에 서서 순례자를 불러 세웠다.
사람들은 그를 세속현자라 불렀다.
잠시 후, 그 세속현자는 순례자를 학문의 성문 앞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또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이번에는 학자의 가운이었다.
“이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지성이라 부를 수 없다.”
그는 다윈의 말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는 창조주가 필요 없다. 이 세계는 스스로 설명된다.”
또 그는 도킨스의 언어를 꺼내 들었다.
“신은 가설일 뿐이며,
기도는 심리적 위안일 뿐이다.
믿음은 성장하면 벗어야 할 유년기의 옷이다.”
세속현자는 여전히 조용했다.
그는 성경을 빼앗지 않았다.
다만 순례자의 손에서 천천히 그것을 내려놓게 한 뒤,
두꺼운 논문들과 통계표를 쥐여 주었다.
“이 길이 더 안전하다.”
“이 길이 더 많은 이들이 걷는다.”
“이 길이 미래로 가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을 조금 더 걸어가자,
순례자는 이상한 침묵을 느꼈다.
창조주는 더 이상 호명되지 않았고,
구속자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으며,
죄와 은혜라는 표지판은
학문의 숲속에서 조용히 사라져 있었다.
자연이 스승인가, 창조주가 스승인가
찰스 다윈은 우리에게 말한다.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며,
그는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라는 개념을 통해
종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그 중 자연이 선택해 살아남은 것들이 오늘날의 생명체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 (창 5:1)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시는 영이시며,
그분의 형상이란,
겉모습이 아닌 도덕적이고 영적인 성품과 존재의 존귀함을 의미한다.
인간은 유전자의 운반체인가?
리처드 도킨스는
사랑과 이타심조차도 이기적 유전자(Selfish Gene)의 전략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사랑은 단지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유전적 발현일 뿐이며,
우리는 고귀한 존재가 아니라
유전자를 실어 나르는 운반체(carrier)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도킨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렇게 믿는 것 자체를
‘만들어진 신(God Delusion)’이라는 망상이라 부른다.
그는 무신론을 지성의 언어로 치장한다.
신앙을 낡은 신화라 부르고,
믿음을 비이성이라 조롱한다.
그러나 아무리 지식이 높아도,
그의 논리에는 사랑이 없고, 생명이 없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요한일서 1장 5절은 말한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물리학에서 빛은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광자이지만, 성경에서 빛은 하나님의 본질,
곧 거룩과 생명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시간 위에 계신 분이며, 우리의 내일까지 이미 ‘지금’으로 보고 계신다.
그래서 그의 예지는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다.
기적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표징이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을 때,
시간의 법칙은 그 앞에서 무너졌다.
좁은 문을 향해
크리스천은 도덕마을을 떠나 다시 좁은 문으로 향했다.
그 언덕길은 여전히 거칠고, 발밑은 돌투성이였지만
그의 마음은 오히려 가벼워졌다.
그는 깨달았다.
“진리의 길은 멀고 험하지만,
주님의 십자가가 그 끝에 서 있다.”
나 역시 그 고백 위에 서 있다.
세속의 현자들이 아무리 매혹적인 말로 속삭여도,
나는 오늘도 좁은 문을 붙든다.
그 문은 작고 초라하지만,
그 안에는 생명의 빛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