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열리는 언약의 열쇠
크리스천이라 해서 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나 또한 그랬다.
어떤 날에는 마음속에서 이런 속삭임이 스쳐 갔다.
“이제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릴까?”
성경은 자살을 살인이라 말한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죽기를 각오하고 기도하라 하셨고,
그렇게 부르짖는 자에게 반드시 응답하신다고 약속하셨다.
존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의심의 성’ 감옥 문을 여는 신비한 열쇠를
믿는 성도들에게 모두 주셨다.”
절망의 거인과 의심의 성
크리스천과 소망은 평탄해 보이는 길로 접어들었지만,
그 길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은 깊은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겨우 빠져나와 지쳐 잠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절망의 거인’이 나타나 그들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의심의 성’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어둡고 차가운 습기가 폐부를 찌르는 그곳에서
그들은 며칠을 굶주림과 고통 속에 버텼다.
거인은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너희는 누구냐! 왜 내 땅에 들어왔느냐!”
크리스천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는 순례자들입니다. 길을 잃었습니다…”
거인은 대꾸도 없이 그들을 던져 넣었다.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 없는 어둠 속에서
그들의 믿음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절망의 거인에게는 아내가 있었다. 이름하여 의혹(Diffidence).
거인이 그들을 어떻게 할지 묻자,
의혹은 이렇게 충고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릴 때까지,
죽도록 매질하십시오.”
무너지는 신앙
그날 밤, 크리스천은 고통 속에서 신음했다.
“형제여,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고통 속에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습니다.
이 지하 감옥보다 무덤이 더 평안할 것입니다.”
소망도 고개를 떨구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살인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자살은 영혼을 잃는 길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힘이 남지 않았을 때,
돌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날이 샐 때까지 울며 기도했다.
언약의 열쇠
아침이 밝아올 무렵,
크리스천은 갑자기 외쳤다.
“아! 내가 어리석었구나!
도망칠 길이 있는데도 이 썩은 감방에 갇혀 있었구나!
내 품에 ‘언약’이라는 열쇠가 있는데,
그것은 ‘의심의 성’의 모든 자물쇠를 열 수 있다고 들었소!”
소망은 눈을 번쩍이며 외쳤다.
“어서 그 열쇠를 꺼내 보시오!”
그 열쇠가 자물쇠에 닿자, 덜컥—!
문이 열렸다.
그들은 어둠과 절망의 감옥에서,
빛과 소망으로 걸어 나왔다.
술의 영과의 싸움
나에게도 절망의 감옥 같은 시간이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와 동생에게 내려왔던 술의 영,
그리고 그것이 내 딸에게까지 미쳤을 때였다.
딸은 착하고 영리한 아이였지만,
성인이 되어 회식에 나가면 술에 취해 정신을 잃곤 했다.
밤거리를 헤매며 집도 찾지 못하던 날들이 이어졌다.
다시 들어온 어둠
4년 전, 나는 딸의 손을 잡고 깊은 수렁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흔들리던 슬픔과 혼란,
그리고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나는 아버지였지만,
그녀를 구할 힘이 없는 무력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하나님, 어째서 제 아이에게 이런 골짜기를 허락하셨습니까?”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침묵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무릎을 꿇었다.
절망의 감옥 -크리스천이 쓰러진 그 자리
존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절망의 거인”을 말한다.
절망의 거인은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아가는 괴물이며,
그가 짓눌러 던져 넣는 지하 방을 절망의 감옥’이라 불렀다.
그곳은 빛이 닿지 않는 곳이다.
차갑고 눅눅하며,
마음이 부서져 가는 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방.
나는 그 묘사를 읽을 때마다
내 딸이 홀로 서 있는 듯한 한밤의 골목이 떠오른다.
술의 손길은 단순한 유혹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묶어두는 쇠사슬이었다.
딸을 붙잡아 흔들며
정신을 흐리게 하고
생각을 무너뜨리고
자존감을 찢어발기는 손아귀였다.
그래서 나는 확신했다.
“이건 단순한 습관이 아니다.
이건 영혼을 노리는 싸움이다.”
죽을 각오로 드린 기도
다시 찾아온 어둠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그 어둠이 다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날,
나는 주저앉아 한참 동안 말을 잃었다.
“…왜 지금 다시?”
그러나 이전보다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었다.
그때는 절망의 감옥이 두려웠지만,
지금 나는 그 감옥의 문을 여는 열쇠를 알고 있다.
바로 기도, 그리고 약속,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사랑.
그래서 나는 다시 금식하며 기도를 시작했다.
언제 끝날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기도하며 걸을 것이다.
“하나님, 절망의 거인이 다시 그녀의 마음을 두드린다면
이번에도 저에게 언약의 열쇠를 건네주소서.”
베드로에게 열린 감옥처럼
성경은 기록한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그의 쇠사슬은 스스로 풀렸고
문은 사람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열렸다.
그러나 그 기적의 뒤에는 한 가지가 있었다.
교회의 간절한 기도.
나는 믿는다.
딸의 마음도,
술의 중독도,
그녀를 삼키려는 어둠도
언젠가 베드로의 쇠사슬처럼 끊어질 날이 온다는 것을.
그날이 올 때까지
나는 기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딸에게 보내는 조용한 고백
사랑하는 딸아,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건
네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너는 넘어질 수 있다.
다시 흔들릴 수도 있다.
때로는 주저앉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기억해라.
아빠는 절대로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너를 단 한 순간도 놓치신 적이 없다.
너는 어둠 속을 걷는 것 같아도
빛은 이미 너를 따라 걷고 있다.
절망의 감옥에 갇힌 자들에게
절망의 감옥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모습만 다를 뿐
이름은 다 같을지 모른다.
술, 관계, 상처, 실패, 고독, 우울, 삶의 무게…
그러나 그 감옥보다 더 오래가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결코 문이 닫힌 채 끝나지 않는다.
절망의 거인이 아무리 우릴 짓눌러도
하나님이 숨겨두신 열쇠는 우리 각자에게 있다.
그 열쇠는 때때로
기도의 눈물 속에서,
사랑의 손길 속에서,
포기하지 않는 발걸음 속에서
조용히 빛난다.
절망의 감옥에서 빛난 말씀
―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는 딸과 손녀가 있다.
3년 전 딸이 결혼을 했고, 그 아이가 이제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
어느 날, 한 살 반 된 손녀를 우리 집에 맡기고
사위와 함께 심야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다.
그날 밤 손녀가 잠든 방은
딸아이가 시집가기 전 오랫동안 잠들던 바로 그 방이었다.
겉으로 보면 같은 집, 같은 공간,
세대만 바뀌었을 뿐이다.
하지만 만약 이 장면을
시간을 거슬러 하나님의 시선으로 본다면,
이 평범한 밤은 전혀 다른 의미로 부풀어 오른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복음 1:14)
영적인 눈으로 본다.
하나님은 이 아이가 태어날 것을
처음부터 아셨던 것이 아닐까.
마치 이름을 부르듯,
말씀으로 생명을 부르신 것이 아닐까—
그리 생각하게 한다.
그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손녀를 보며
나는 문득 깨달았다.
하나님은 이미 작은 기적을 행하신 분이라는 것을.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이 아이의 존재는 내 상상에조차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시간의 앞과 뒤가 없다.
그분은 시간을 초월해 계신 분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로 가득한 것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작동하는 하나님의 세계가
인간의 언어로 번역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린도후서 4:16)
이 말씀 또한 이성으로는 온전히 붙들 수 없지만,
우리의 영이 예수의 영으로 채워질 때
새 생명이 시작되고, 영원으로 나아갈 문이 열린다.
바울은 심지어 육신의 죽음마저
‘생명에게 삼켜지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고후 5)
절망은 끝이 아니라
생명으로 가는 문턱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오늘날 인공지능은
신의 영역에 근접한 일을 해낼지도 모른다.
명령어 하나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예측과 창조의 경계를 넘나들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적,
절망의 감옥에 갇힌 인간에게
열쇠를 건네어 문을 여시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분은
오늘도 여전히
절망의 감옥 한가운데에서
조용히 말씀하신다.
“일어나라.
문은 이미 열려 있다.”
순례자의 고백
나는 이제 안다.
절망은 나를 끝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시 일으키기 위한 골짜기라는 것을.
기도는 마치 희미한 별빛 같지만
어둠 속 길을 밝히기엔 충분하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절망의 감옥문을 열고 계신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