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축재의 도시

돈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진리를 지키는 일

by 박시룡

세속이 신앙의 옷을 입다

오늘 우리는 출생과 유전자까지도 성공의 자격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금수저 집안, 우월한 유전자, 명문 학벌—
이 모든 것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짓는 현실.

존 번연은 이런 시대정신을 ‘축재의 도시’의 사람들을 통해 고발하고 있다.
그들은 신앙의 외피를 쓴 채, 세속의 가치에 철저히 순응한 자들이었다.

오늘날의 교회도 그 그림자를 피하지 못한다.
설교를 잘하면 교인이 늘면 헌금이 많아지고,
그 헌금으로 더 큰 예배당을 짓고 더 높은 봉급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이라 포장한다.

11-1 Obsession, money and old age in the city of accumulation (2021).jpg 그림 11-1: 축재의 도시에서 온 집착, 돈자랑, 그리고 노랭이

탐욕의 제자들

나는 황새와 함께 걷던 순례길에서 ‘축재 선생’의 제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집착’, ‘돈사랑’, ‘노랭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사는 ‘탐욕의 시(市)’는
거짓과 아첨, 위선과 폭력이
하나의 생존 기술처럼 통용되는 도시였다.
그들은 신앙을 ‘상품’으로, 하나님을 ‘투자 대상’으로 여겼다.


그들의 대화

크리스천은 우연히 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돈사랑'
“저기 앞서가는 사람들은 왜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지?”

'노랭이'
“너무 고지식해서 그래.
그런 사람들은 자신만 의롭다고 생각하거든.”

'집착'
“하지만 우리도 하나님을 믿잖아.
하나님이 주신 세상의 것들을 잘 관리하고 누리는 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 아니겠어?”

'돈사랑'
“맞아. 목사들도 설교 잘하면 돈 많이 버는 게 당연하지.
성도가 늘고 헌금이 많아지고, 큰 교회를 세우면
그게 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 아니겠나?”

그들의 말은 교묘했고,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진리의 향기는 없었다.


크리스천의 반박

크리스천은 참다 못해 말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면,
어린아이일지라도 백 가지 대답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람이 단지 빵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것조차 불법이라 하셨거늘,
하물며 신앙을 세상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이
얼마나 혐오스러운 일입니까?”

그는 구약의 하몰과 세겜을 예로 들었다.
그들은 야곱의 딸과 가축을 얻기 위해 할례를 받았다.
종교를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오늘날 교회를 기업 삼고, 복음을 장사 도구로 쓰는 이들의 모습이
그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진리는 세속을 이길 수 있는가

나는 그들과의 대화 후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들의 말이 허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 오늘의 세상, 오늘의 교회를 말하고 있었다.

믿음보다 실력, 섬김보다 실적, 복음보다 복리를 중시하는 세상—
‘오직 믿음’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하나님조차 ‘복을 주시는 분’으로만 축소되는 현실.
이것이 바로 축재의 도시의 실체였다.


나는 누구의 제자인가

나는 황새를 따라 걷는 길에서 문득 물었다.

“나는 축재 선생의 제자인가, 아니면 주 예수의 제자인가?”

내가 세운 연구의 성과,
사람들이 칭찬했던 일들,
그 모든 것이 신앙이라는 포장지를 쓴 탐욕은 아니었는가.

이제 나는 그 도시를 떠나려 한다.
‘허영의 시장’을 지나,
‘축재의 도시’도 벗어나며
내 안에 남은 명예욕과 소유욕의 흔적을 하나하나 털어내고자 한다.

“주님, 제 안에 있는 축재의 씨앗을 남김없이 뽑아 주소서.”


질그릇에 담긴 보물

사도 바울은 말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합니다.” (고후 4:5)

그는 인간을 질그릇에 비유했다.
겉은 연약하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보물이 담겨 있다.

나는 이 구절을 묵상하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진짜 복음은 외형의 화려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드러나는 일이다.

그러나 오늘의 ‘돈자랑’들은 여전히 교회를 기업으로 꾸미고,
‘교인의 수와 헌금의 크기’를 하나님의 축복의 척도로 삼는다.

나는 그 사고방식에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길 끝에는 예수님의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지니나,
이는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0)

이 말씀처럼, 우리의 고난조차 예수의 생명으로 감싸이는 것—
그것이 복음의 신비이다.


축재 도시 속 황새

내가 황새 복원 사업을 하던 때,
그 일은 순수한 과학 연구에서 점점 ‘이권 사업’으로 변질되어 갔다.
돈자랑과 집착, 노랭이의 제자들이 그 일을 차지했다.

그들은 황새의 생명을 이용해 명예를 얻고,
환경을 포장지로 만들어 상을 받았다.
‘환경상’, ‘국제포상’의 이름 아래
황새의 죽음은 감춰졌다.

나는 그 부패한 현실 앞에서 오열했다.
낚시줄에 걸려 다리가 잘린 황새,
전신주에 감전된 황새,
농약에 쓰러진 황새…

“하나님, 황새들이 인간의 욕심 때문에 죽어갑니다.
진리와 생명을 동시에 지키는 길은 어디 있습니까?”

그 질문은 내 기도가 되었다.

11-2 People Painting in Insadong (2004).jpg 그림 11-2: 인사동에서 황새의 그림을 그려주는 교수님

실패처럼 보이는 사명

결국 나는 학교에서도 비난받고, 연구를 접을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도 나를 붙드셨다.

나는 인사동 거리로 나가 황새 그림을 그리며,
사람들에게 생명의 이야기를 전했다.
코로나의 시기에도, 국회의사당 앞 1인 시위에서도,
나는 여전히 그 길을 걷고 있었다.

비록 황새 법은 제정되지 못했지만,
그 뜻은 하늘에 기록되었으리라 믿는다.


11-3 Did You Know My Grandfather (2022).jpg 그림 11-3: 내 할아버지를 아시나요?

나는 꿈에서 본다.
미래의 내 손녀가 국회 앞에서 묻는다.

“내 할아버지를 아시나요?”

누군가가 대답한다.

“그는 황새법을 만들기 위해 매일 그 자리에 서 있던 분이었습니다.”

그날이 올 때,
나는 비로소 나의 ‘실패’가 하나님의 ‘응답’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

어느 날 나는 이렇게 탄식했다.

“내가 노벨상을 받은 학자였다면,
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졌을 텐데…”

그러나 말씀은 내 마음을 고쳐 주셨다.

“자기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려 애쓰지 말라.” (롬 12:6, 메시지)

우리가 누굴 부러워 하며 사는 삶도, 주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토기장이가 하나는 귀한 데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한 데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없겠는가?"(롬 9:21)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어린아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 (막 9:37)

예수님은 제자들이 누가 큰 자인지 다투던 그 순간,
어린아이를 품에 안으셨다.

그 말씀은 내 마음을 부드럽게 찔렀다.
진정한 위대함은 경쟁이나 명예가 아니라,
작은 자를 품는 사랑이라는 것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황새를 위해 애쓰는 일도,
결국 한 ‘작은 생명’을 품는 일이라는 것을.

11-4 Receiving Children (2022).jpg 그림 11-4: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라 하신 예수님

순례자의 묵상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서 숨 쉬고 있는가?
그분의 흔적이 내 삶 속에 드러나고 있는가?

세상이 ‘축재의 도시’로 흘러갈수록,
나는 다시 어린아이와 닮은 영혼으로 돌아가고 싶다.
비록 실패처럼 보일지라도,
주님이 주신 길이라면 그 길 끝에는 생명이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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