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황새 마을 사람들
#1
예순이는 영도의 아내다. 그녀를 처음 본 곳은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궐곡리라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황새 한 쌍이 번식하며 살았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황새가 없다. 한국전쟁 이후 사라졌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사라진 황새 둥지의 자취를 찾아위해 전국 방방곡곡 시골마을을 온통 헤집고 다녔다.
내가 교수로 있던 충북 청원군에 위치한 한국교원대학교를 출발, 국도를 따라 천안방향으로 가다 보면 아산과 예산으로 가는 이정표가 눈에 띈다.
한 시간 가량 걸렸을까, 궐곡리 사거리에서 바라본 풍광은 그 옛날 우리 농촌의 모습이었다.
감나무에는 빨간 감이 주렁주렁 열리고, 추수한 곡식들이 햇볕에 말리느라 한창인 가을 오후 였다.
여든이 넘어 보이는 한 노인을 만났다. "혹시 이 마을에 황새가 살았던 곳을 기억하시나요?" 그는 지금까지 이 마을에서 농사만 짓다가 최근에 몸이 좋지 않아 농사일을 그만두었다 했다. 그는 귀가 약간 멀어 큰 소리로 말해야 알아들을 정도로 연로했지만 기억은 매우 또렷해 해방 전 황새가 둥지 치며 살았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그의 대답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는 황새를 두루미로 알고 있었다. '아니 그러면 내가 두루미 마을을 찾아왔나! 그게 아닐 텐데!' 옛 마을 사람들은 황새와 두루미를 잘 구분하고 있지 않았다. 학을 그냥 황새로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는 건너편 마을 66세인 중철 씨 집을 소개해 주었다. 중철 씨를 만났다. 중철 씨는 나를 보더니 아흔이 넘은 노모를 불렀다. 중철 씨의 모친의 이름은 이 예순이었다. 예순은 96세의 연세에 비해 매우 건강해 보였다. 예순은 날 뒤뜰 황새 한 쌍이 살았던 소나무로 안내했다.
아마 수십 년을 한 번도 가지 않은 곳 같았다. 가시덤불로 뒤덮여 풀을 헤집고 한발 한발 내딛기가 쉽지 않았다. 마침내 덤불 속에서 '제99호 예산 천연기념물 관(鸛;황새관) 번식지'라는 글귀가 새긴 비석을 발견했다. 이 비석은 해방 전 조선총독부에서 새겼다고 비석 뒤면에 새겨져 있었다.
비록 일제가 세운 거지만 나에게는 보물과 같은 유물이었다. 거의 반세기 동안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던 비석 앞에서 꼭 이곳에 황새를 복원하겠노라고 다짐했다.
예순은 내가 이곳에 꼭 황새를 복원시켜보겠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너무 반가웠던지 지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일본인들이 비석을 마차에 싣고 말을 타고 왔지요”
“황새는 아마 내가 시집오기 전부터 이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큰딸의 나이가 지금 74세이니까, 큰딸이 만 두 살 때부터 황새가 바로 집 뒤 소나무에서 새끼를 치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사람들이 새끼를 훔쳐가곤 했어요. 동물원에 갖다 팔려고 했는지, 그 귀한 새를 갖고 간 사람은 제대로 살지 못했을 거예요”
그렇게 새끼를 훔쳐가고 알을 빼내간 것이 한두 해가 아니었다고 증언해주었다.
“새끼를 잃은 황새 쌍이 너무 측은했어요.”
“하루 종일 따다닥 소리를 내면서 온 마을을 돌아다녔으니까요”
“그날은 먹이 사냥도 하지 않더라고요.”
#2
예순은 영도의 아내다. 그녀는 가냘픈 여인으로 15세 나이에 영도와 혼례를 올렸다. 예순이가 만난 영도는 늠름한 한국의 청년으로 참 잘 생긴 청년이었다. 그리고 결혼한 지 7년이 지나서야 이 부부는 두 딸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
영도는 농사일을 하면서, 집 뒤뜰 황새 부부를 돌보는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번식기에는 사람들이 나무 위로 올라가지 못하게 철조망을 쳐 놓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일제에 의해 태평양 전쟁으로 강제 징병되었다.
예순은 이국땅에서 온 남편 영도의 편지를 받고 날아갈 듯 반가웠다.
말레이시아 포로수용소에서 근무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지내라면서 사진도 보내왔다.
일본군의 복장을 한 모습, 늠름한 한국 청년이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글로 담아 그리움의 답장을 썼다.
예순은 남편이 꼭 돌아오리라 믿고 열심히 농사도 짓고 세 아이를 길렀다.
그해 황새 부부는 다산을 했다.
늘 2마리 혹은 3마리 새끼를 낳았는데, 그해는 무려 5개의 알을 낳았다.
아마 더운 여름이 지났을까, 황새 부부는 다 자란 새끼들을 데리고 집 앞 개울가에서 먹이를 잡고 놀기도 했다.
해방을 맞이했지만, 더 이상 남편으로부터 편지는 없었다.
함께 징용 간 남편의 친구만 돌아왔다.
예순은 죽을 때까지 영도의 사망 소식을 알지 못했다. 함께 징용 간 남편의 친구가 시아버지에게만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왔고, 시아버지도 예순에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되었지만, 평범하게 포로수용소 근무병으로만 근무하지 않았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군수물자 보급체계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예순의 남편 영도는 일본군 소속 근무병이었지만, 식량을 제때 보급받지 못했다.
어떤 날은 함께 징용 간 동료들과 여러 날을 굶어 가며 근무병 생활을 해야만 했다.
굶주리는 고통에 한계에 지친 영도는 함께 징용 간 동료들을 규합하여 비밀 결사 항일 독립활동을 하기로 했다. 맨 처음 활동이 일본군 군수물자 보급로 차단이었다.
이때 심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여러 명의 일본군이 영도가 이끈 항일 비밀결사대의 총에 맞고 죽었다.
영도는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어 갖은 고문과 옥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3
1945년 8월 15일, 조국은 해방을 맞았지만 영도는 끝내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1945년 10월 23일, 흉부 총상으로 하늘나라로 돌아간 날이었다.
예순의 시아버지는 차마 며느리에게 이 말을 전하지 못했다.
시아버지는 혼자서 아들의 죽음을 속으로만 삼키시며 살다가 손주 중철이 나이 7세였을 때 세상을 떠나셨다.
그녀는 남편이 남겨놓고 간 황새 부부를 지키면서 영도가 돌아올 거라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