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황새 마을 사람들
#1
충청도 예산, 아주 산골 마을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이미 집 뒷산에 100년이 넘어 보이는 소나무가 있었고, 그 소나무 맨 꼭대기에 황새 부부가 둥지 틀고 살고 있었다.
그 마을에는 황새만 살았던 게 아니다. 황새가 살았던 산 너머에는 안락산이 있었는데, 안락산 깊은 산중에 호랑이도 살았다. 물론 산토끼, 살쾡이, 여우, 그리고 늑대도 살았다.
해마다 2월 말이면, 어디선가 황새 부부가 그 마을에 날아왔다.
이 황새 부부는 알 서너 개를 낳고 알에서 깨어난 새끼들을 열심히 돌봤다.
새끼들은 8월이면 다 성장했다.
새끼들은 둥지에서 내려와 어미를 졸졸 따라다녔다.
논과 밭 그리고 개울에서 물고기, 개구리, 지렁이, 들쥐 그리고 풀벌레를 잡아먹고 살았다.
그러다가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이 마을을 떠났다.
어디로 떠나는지는 알 수는 없었다.
아마도 좀 더 따듯한 남쪽 나라로 날아갔을 거라는 추측을 해본다.
겨울이 되면 그 마을의 논과 개울이 모두 꽁꽁 얼어버려 황새들의 먹이도 자취를 감췄다.
그렇지만 얼음이 녹는 봄이 되면 어김없이 영도의 집 소나무 위로 날아와 둥지를 틀었다.
영도의 가족은 황새 식구가 있어 누구보다 참 행복했다.
어린 나이에 영도는 이 황새 부부가 자기 집을 찾아 주는 게 참 신기했다. 그것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영도가 사는 마을을 찾아왔다.
#2
일제강점기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황새 부부가 영도의 집 소나무 위에서 둥지를 틀었다.
갑자기 황새 부부가 둥지에 앉아 있지 않고 마을 어귀까지 내려와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황새는 목청에서 소리를 내지 않는다. 화를 낼 때면 부리를 부딪쳐 ‘딱 딱 딱’ 소리를 낼뿐, 주로 이런 소리는 부부간에 사랑을 확인할 때 내는데, 그날은 유별나게 매우 요란스러웠다.
‘따 딱딱 따 따딱’ 이 소리에 영도는 깜짝 놀라 둥지로 달려갔다.
그날 그는 황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아닌 게 아니라 둥지의 알들이 모두 없어졌던 것이다.
'누가 이 알들을 훏처갔을까?'
누구의 소행인지 알 수가 없었다.
‘
'황새 알을 먹으면 자식을 낳지 못하는 사람도 자식을 낳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훔쳐 간 것일까?
아니면 알을 비싸게 팔기 위해서였을까?’
그 당시 마을에서는 황새 알을 먹으면 죽은 사람도 살아난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해 이 황새 부부는 새끼들을 모두 잃고 부부만 살아야만 했다.
하는 수 없이 영도는 소나무 주변에 철조망을 쳐서 둥지 위로 사람이 올라가지 못하게 했다.
#3
한 해가 바뀌었다. 다시 황새 부부는 영도의 집 소나무 위에서 새끼를 낳아 기르고 있었다.
새끼들이 한창 먹이를 먹을 때는 황새 부부는 온종일 먹이 사냥을 했다.
어느 날 영도는 문득 이 황새 부부가 자신을 알아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둥지 가까이 가도 이 황새 부부는 도망가지 않았다. 그러나 낯선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면 이 황새 부부는 이내 사라졌다. 바로 영도네 식구들을 모두 알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한창 새끼들이 먹이를 달라고 보채면 수컷 황새는 새끼에게 줄 지렁이를 잡기 위해 영도가 밭을 매는 곳까지 찾아왔다. 이렇게 황새 부부는 영도네 가족들과 한 식구가 되었다.
황새 한 쌍이 영도의 마을에서 해마다 번식하고 산다는 소식을 들었던 걸까!
어느 날 갑자기 조선총독부에서는 황새의 보호 비석을 세우러 왔다.
그 당시 일본은 자국의 본토와 예산군 대술면 궐곡리에 ‘황새 번식지’라는 천연기념물 보호 비석을 세웠다.
황새가 나라의 보물로 매우 소중하다는 것을 일본은 이미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4
집 뒤에는 황새가 둥지 튼 소나무가 있었지만 집 앞에는 600년 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영도는 어릴때 부터 이 은행나무 아래에서 친구들과 칼싸움 놀이, 말 타기, 땅 빼앗기 놀이를 하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끔 집 앞 개울에서 동네 친구들과 함께 족대로 물고기를 잡기도 했다.
물고기를 잡으면 집으로 가져가지 않고 다시 황새 부부가 먹을 수 있게 논에 넣어 주었다.
영도는 황새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이 더 즐거웠다.
영도는 쌈박질도 곧잘 하긴 했지만, 영도의 부친은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배워야 한다고 예산 공립 보통 학교에 보냈다. 하지만 그는 일본 식민지 교육이 참 싫었다.
그 당시 일본은 강제로 일본 글을 배우게 하고 일본 역사를 가르치게 했다.
상급학교에 가도 일본은 똑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게 뻔했기 때문에 결국 영도는 진학을 포기했다.
그가 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 일본은 식민지 교육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한국 사람들의 이름도 모두 일본식으로 바꾸게 했다. 바로 성씨 개명이었다.
전국 곳곳에서 항일운동도 일어나고 있었다. 그가 사는 예산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보통학교 졸업식장을 나오면서 일본 제국주의 교육에 대한 반감의 표시로 검은색 교복에 밀가루를 뿌리고 계란을 던지는 시위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 당시 이런 풍습은 ‘백의민족인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살아가라’는 뜻과 함께 ‘계란을 던져 껍질을 깨듯 신민지 교육의 틀을 깨고 조국의 독립에 힘쓰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5
학교 졸업함께 그는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왔다. 벌써 그의 나이도 19세가 되어 건강한 청년으로 성장했으니 농사일을 돕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 무렵 그는 이웃 동네 신양면에 사는 4살 적은 전주 이 씨 예순 씨와 혼인식을 올렸다. 그리고 결혼 한지 만 7년 만에 첫 딸을 낳았다.
그는 이때부터 마을 어귀 행정 강습소를 짓고 한글을 가르치는 야학당을 운영했다.
그래도 그는 부모님을 잘 둔 덕분에 보통학교라고 나왔지만, 그 당시 마을 사람 대부분은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로 사는 것이 무지함 때문이지 않습니까!”.
마을 사람들의 문맹을 퇴치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행정 강습소가 소문이 나자 예산군 대술 지서 일본 순사가 나와 강습소를 감시하기도 했어.
혹시라도 일본어를 가르치지 않고 한글을 가르쳐 주민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켜지 않을까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구찌 口란 일본어로 입이란 뜻입니다”
“구찌!”
“따라서 하세요”
“(다 함께) 구찌”
“코는 하나 鼻”
“(다 함께) 하나!”
학생들은 일본말을 큰 소리로 따라 했다. 일본어 교육 강의 열기가 높은 야학당을 목격한 일본 순사는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띠면 “대일본제국의 충량한 국민이 되기 위해 더욱 공부에 열중하기 바람. 이상!” 명령하며 돌아갔다.
일본 순사가 돌아가면 다시 책상 밑에 숨겨두었던 한글교재를 꺼내 다시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6
그러나 그가 운영했던 행정 강습소도 오래가지 못했다.
주민들에게 한글 교육을 시킨 게 어떻게 해서 일본 순사의 귀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일본 순사는 영도를 주요 감시 대상 인물로 리스트에 올려놓고 감시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자 한국 젊은이들을 일본 군인으로 강제 징병시켰을 때 그 명단에 영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침략한 뒤, 1937년 본격적인 중국 본토 침략을 감행,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의 침략 야욕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그가 사는 마을까지 군수물자 할당이 내려왔다.
당시 그는 마을 청년회 회장을 맡아보고 있었고, 친일파인 면장은 그에게 군수물자 모금일을 맡겼다. 목표량을 채우지 못하자 면장과 그는 잦은 충돌도 있었다.
결국 그가 강제징용 대상 명단에 올린 것도 면장의 눈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1942년 8월 19일 마침내 그는 적도의 땅 동남아시아로 향하는 배에 올라야만 했다.
영도는 아내와 아들 그리고 두 딸들에게 곧 돌아올 거란 약속을 하며 떠났다.
말레이시아 포로 수용소, 영도는 함께 끌려간 조선 청년들과 함께 포로 감시병으로 배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