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이 멸망의 도시를 떠났을 때, 그를 따라나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고집과 변덕이었습니다. 고집은 크리스천을 세우고 고향을 떠난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때 크리스천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하늘나라에 간직되어 있는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지지 않는 유산을 찾아갑니다. 당신도 나와 동행함으로써 이 상상할 수 없는 보화를 누리고 축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여기 그대로 머물러 사는 한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내가 가진 이 책에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고집은 크리스천의 말을 끝내 거절하고 멸망의 도시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마음 밭이 성경에 씨 뿌리는 비유에 의하면 길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의 고집으로 마음이 이미 굳어 버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아예 마음 문을 닫고 사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고집과 동행한 변덕은 멸망의 도시로 돌아가자는 고집의 권고를 물리치고, 크리스천의 말에 동의하며 "나는 크리스천과 운명을 함께하겠습니다"라고 선언하고 그 길을 함께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동행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생각 없이 길을 걷다가 들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절망의 늪'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발버둥을 치며 늪을 빠져나와 "아니, 당신이 말한 순례길을 위해 약속된 행복한 삶이 겨우 이런 것이란 말이오?"소리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던 길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크리스천은 그때 막 지나가던 도움의 덕택으로 간신히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크리스천은 자신을 구해준 도움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길은 멸망의 도시로부터 떠나는 좁은 문으로 가는 길이라고 들었는데 어째서 도중에 있는 이 수렁을 고치지 않습니까?" 도움이 대답했습니다 "이 깊은 수렁은 고칠 수가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곳을 낙심의 늪이라고 부르죠. 죄인들이 자신들의 절망적인 형편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의 마음속에는 온갖 두려움과 의심과 절망들이 생겨납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모여 이곳으로 흘러와 고여있기 때문에, 이곳은 늘 좋지 못한 곳으로 남아 있습니다."
도움의 손길로 낙심의 늪에서 빠져나온 크리스천은 새로운 인물을 만났습니다. 그는 바로 세속현자였습니다. 그는 크리스천에게 다가와 물었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형편없는 몰골로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가고 있습니까?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요?" 그러자 크리스천은 "전도자의 말을 듣고 좁은 문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세속현자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쉽고 안전한 길로 안내하겠다며 윗마을 언덕 '도덕마을'을 가리켜주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율법 어른을 만날 터인데 그가 크리스천의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짐을 덜어 줄 거라' 말해주었습니다. 혹시 그가 출타 중이면 그의 아들 예의를 만나라고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습니다.
사실 세속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인정하지 않고 복음보다 윤리와 사회개혁을 앞세우는 세상과 타협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크리스천에게 그렇게 어려운 순례길을 갈게 아니고 편안하고 쉬운 길을 가르쳐 준다고 유혹했던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세속현자의 조언대로 그 마을을 찾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로 가는 길은 언덕이 가파르고 길이 너무 험했습니다. 점점 지고 있는 짐이 훨씬 더 무겁게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갑자가 언덕 위에서 불길이 활활 타오는 것을 본 크리스천은 그곳으로 올라가다가는 불길에 휩싸여 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는 땀을 흘리면서 무서워 떨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크리스천은 세속현자의 그릇된 충고를 받아들인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그는 낙심의 늪에서 자기를 구해준 도움을 만나 좁은 문으로 가는 길에 대해 다시 안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학문적 세속현자
교회를 다니면서, 나의 학문적 세계에서 이런 세속현자를 만났습니다. 그 한 인물이 진화론의 찰스 다윈이었고 그다음으로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슨이라는 세속현자입니다. 찰스 다윈은 인간의 조상이 침팬지에서 진화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주장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창 5:1)'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고 쓰여 있습니다(요 1:18, 요일 4:12).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면 육이 아니고 영을 만드시지 않았겠어요.
다윈이 생각해 낸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은 무엇일까요? 다윈은 다양한 가축의 품종, 즉 개들의 다양한 품종을 인위적 선택(Artificial selection)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의도를 갖고 품종을 만들었다는 것이죠. 그럼 종의 다양성은 누가 개입되었을까요? 다윈은 이 세상에서 종이 다양하다는 생각을 자연이 선택했다는 개념을 갖고 설명합니다. 믿음과 영적인 눈으로 보면, 그 자연은 보이지 않는 자의 의도나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지구에 다양한 생물들이 만들어진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리처드 도킨슨은 성경에 나오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타주의도 모두 이기적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행동한다고 설명합니다. 심지어 그는 인간을 유전자를 실어 나르는 운반체에 불과하며, 애당초 신은 없었고 '만들어진 신(God Delusion)'이라 주장합니다.
성경은 ‘곧 하나님이 빛이시라(요일 1:5)’라고 합니다. 그리고 빛이라는 용어가 196번이나 등장합니다. 빛은 현대물리학에서 에너지를 가진 작은 알갱이(광량자)라고 부릅니다. 생물학에서는 빛은 광합성에 쓰이는 생명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빛이라 하는 순간 이 작은 알갱이는 움직입니다. 빛의 속도는 1초에 약 30만 km에 달합니다. 아직 이 세상에는 실존하는 물체 가운데 이 보다 더 빠른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일 누군가 1초에 30만 킬로를 달리는 이 작은 알갱이를 예리한 칼로 잘라낼 수 있다면 그 순간 그것은 실존하지 하는 물체로 바뀝니다.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1-2,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로 움직이고 계셨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결코 인간은 하나님(신)을 만든 적도 없고 스스로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역사도 없으시고 시간의 개념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있다면 오로지 현재라는 찰나뿐인데 그 현재조차 '지금은 현재'라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시간 개념 속에 가두었을 때 등장하는 어려움이 하나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누구나 '하나님은 우리가 내일 할 일을 알고 계신다'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말 내가 내일 할 행동을 알고 계신다면, 나에게는 그와 다르게 행동할 자유가 없는 것 아닙니까? 이것 역시 하나님을 우리처럼 시간 개념에 매여 사는 존재로 착각하기 때문에, 즉 하나님은 앞일을 미리 안다는 점에서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어려움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행동을 예견하신다면, 우리에게 행동의 자유가 있다고 보기는 대단히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한, 그 위에 계신 분으로 생각해 보면, 그는 우리가 '내일'이라고 부르는 날도 '오늘'처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날이 '지금'일뿐입니다.
태초에 영으로 존재하셨던 하나님은 예수가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성령이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요 16:7)"의 말씀을 보면, 그 성령은 지금도 시간개념을 초월하여 메시아인 예수께서 이미 내 속에 와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 지심'은 역사적 사건이 아닌 현재 진행형이자,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 19:30)라고 한 순간부터 우리 죄는 모두 해결되었음을 믿고 따를 뿐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미래에도, 그리고 영원이 효력이 있음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이 시간을 초월한 분임을 알 수 있는 구절 하나가 눈에 띕니다. 베드로(벧후 3:8)는 '하나님께서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분명 하나님은 시간이라는 개념도 없고, 그것을 초월한 분입니다. 바로 그분은 영으로만 시간 개념 속에 사는 인간들을 간섭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의 개념 속에 사는 우리 인간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성경에는 기적으로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2:1-10)에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 가셔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보이십니다. 시간의 개념 속에서 살펴보면 포도를 갖고 발효시켜야 포도주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 개념이 모두 생략된 채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가는 천국은 바로 이런 시간 개념을 없는 곳임을 예수께서 미리 보여주고 계십니다.
내 순례길에 도움을 준 전도자
자연과학자로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잠시 이 세속현자에 현혹되어 무거운 짐이 더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이러한 무거운 짐을 질머지고 걸어갔을 때 나에게 도움을 준 참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내가 대학시절 만났던, 가나안농군학교의 설립자인 김용기 장로님과 한국대학생선교회 창립자인 김준곤 목사님입니다. 나는 이 두 분을 개인적으로 만나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김용기 장로님은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한 가나안농군학교에서 기독교 정신으로 진정한 삶을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그때는 한국사회가 참 못살았던 시기였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였기 때문에, 생활물자가 부족해서 미국에서 원조를 받아 살아간 시기였습니다. 가나안농군학교에서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살후3:10)성경말씀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물자를 아끼기 위해서 치약도 새끼손가락 손톱크기를 넘지 않게 아껴 쓰도록 교육도 했습니다. 세끼 중 한 끼는 고구마를 먹었습니다. 지금은 고구마가 간식거리였지만, 그때는 주식이었습니다. 김용기 장로님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성경말씀의 가르침에 따라 부지런히 일을 하며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도 그분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5.16 혁명 직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어 그는 가나안농군학교에 직접 오셔서 교육을 받고 대통령이 된 다음 국민들을 대상으로 새마을운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그 후 한국의 근대화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요 6:3-5). 예수님이 제자인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에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겠느냐?"하고 질문했을 때, 빌립은 "각 사람에게 떡 한 조각이라도 돌아가게 하려면 은화 이백 개로도 모자라겠습니다."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안드레가 "여기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이 먹이기에 턱없이 부족한 양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을 앉게 하여라."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으니 오천 명 정도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떡을 들어 감사를 드리고,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 주셨습니다. 그리고 물고기를 가지고도 그와 같이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요 6:10-13).
이 사건에 함께한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로 여겼습니다. "이분은 분명 그 예언자다. 하나님의 예언자가 바로 이곳 갈릴리에 오신 것이다!" 모인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자기를 붙들어다가 왕으로 삼으려는 것을 아시고, 그 자리를 피해 다시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기적은 가난한 백성에게 배부름으로 채워주시는 기적도 되지만, 지금과 같이 잘 살고 있을 때는, 작은 자와 작은 것들의 가치로 읽힙니다. 근대화 과정을 겪은 이 시대는 크고 많고 거창하고 복잡한 것들을 좋아합니다. 바로 하나님은 이 험난하고 복잡한 시대에서 무시당하는 작은 것들을 택하십니다. 어린아이가 갖고 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어가면 배가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작은 자와 작은 선물을 나눌 때 하나님의 후한 은혜가 계시됩니다.
나는 점심 한 끼를 먹기 위해 집을 나섭니다. 집을 나서면 지하철이 있고 지하철 입구에는 '빅이슈'잡지를 팔고 있는 아저씨가 있습니다. '빅이슈' 잡지를 판매하는 아저씨들은 모두 노숙인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잡지 가격은 7천입니다. 그 잡지를 팔면 그분들이 3천 원을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내 점심 한 끼를 저렴한 음식으로 아껴 이 순례길을 걷고 있는 동안 그 잡지를 사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나의 전도자 고 김준곤 목사
나를 낙심의 늪에서 구해주신 다른 분은 김준곤 목사님이십니다. 그분은 많은 대학생들을 참 크리스천으로 인도하신 분입니다. 따로 교회를 갖고 계시진 않았습니다. 정동에 있는 CCC(대학생선교회) 건물을 직접 건립하셨던 분이었습니다. 많은 대학생들이 그곳에서 모임을 갖고, 전도 훈련도 받았습니다. 그때 슬로건이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였습니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집회에서 목사님의 설교가 지금도 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정동 CCC회관 건립은 무일푼으로 시작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단판을 짓고 설립한 그의 간증은 그 당시 대학생들에게 오래 기억되는 김 목사님의 설교중 하나였습니다.
그분은 일반 부흥강사의 설교는 아니었습니다. 그냥 사랑방에서 이야기하듯 조용히 설교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가 내 마음속에 꼬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그의 베드로 설교는 압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베드로, 그는 예수님이 그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 한자리 얻기 위해 따라던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걸 어디서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붙잡혔을 때, 그는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한 사람입니다. 그의 성격도 꽤 다혈질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성경에 나옵니다.
성경 마태복음 26장 47-50에 보면 베드로의 성격이 그대로 묻어 나옵니다. '예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왔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보낸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그와 함께 하였다. 그런데 예수를 넘겨줄 자가 그들에게 암호를 정하여 주기를 "내가 입을 맞추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잡으시오" 하고 말해 놓았다. 유다가 곧바로 예수께 다가서서 "안녕하십니까? 선생님!"하고 말하고 입을 맞추었다. 예수께서 그에게 "친구여, 무엇하러 여기에 왔느냐?"하고 말씀하시니, 그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손을 대어 붙잡았다. 그때에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 베드로가 손을 뻗쳐 자기 칼을 내어,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쳤서, 그 귀를 잘랐다. 그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칼을 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
앞으로 왕 되실 분을 잡아가니 베드로는 매우 흥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순간까지만 해도 예수님이 이스라엘 왕이 되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제자들보다 앞장서 그런 과격한 행동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 예수가 권력자의 손에 붙들려 한갓 죄수의 몸으로 전락되었을 때, 자신도 체포될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그는 새벽닭이 울 때까지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 부인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은 모두 용서하시고 부활하신 몸으로 어부로 다시 돌아간 베드로를 찾아오십니다. 이 사건은 그냥 2000년 전 팔레스타인 어느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지금 베드로 보다 훨씬 많이 주님을 부인할 법한 나에게도 찾아오셔서 내 양을 먹이라 하십니다. 이 이야기를 수채화에 담아봅니다. 지금도 살아계셔 내 곁에 다가오신 주님을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예수께서 숯불가에서 친구들에게 빵과 고기를 차려주시던 신비의 순간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요 21:12), 이 표현이야말로 예수님의 숨겨진 부활이 이 한마디 보다 더 잘 표현된 곳은 없습니다. 그들은 빵과 고기를 주시는 자가 누구인 줄 알았으나 감히 묻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시간적 한 순간의 역사가 아닌 그 시간을 초월한 순간이었습니다. 결국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