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수수의 작업실에는 영원히 불타오르는 용광로가 있다.
editor 김은아 photographer 임익순
누구에게나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은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다. 작가 김수수가 어느 날 신문을 펼치던 날처럼. 그는 그곳에서 사진 한 장을 마주한다. 펄펄 끓는 용광로 앞에서 작업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그 순간 사진 속 용광로의 불은 신예 작가의 마음에 옮겨 붙었다. 빨강, 노랑, 파랑… 온통 불에서 찾은 색상으로 뒤덮인 그의 작업실에서 오랫동안 꺼지지 않을 불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사진 한 장에서 ‘불’ 연작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전에 해오던 작업이 궁금합니다.
모든 작업의 기반은 사실주의라는 생각이 있어서 중국에서 공부를 했어요.
중국은 모델비와 재료가 저렴해서 학생도 작업을 하기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죠. 인물화는 물론이고, 한 달씩 시골에 머물며 제대로 씻지도 않고 그림만 그렸어요. 그렇게 매진하다 보니 조금 자신감이 붙더라고요. 한국에 돌아와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할지 고민하고 있었고, 신문에서 용광로 사진을 발견하게 됐죠.
그 사진의 어떤 점에 그렇게 매료되었나요?
오라(aura) 때문인 것 같아요. 사진 대부분을 채운 빨강도 강렬했지만, 일렁이는 뜨거운 기운이 지면을 뚫고 나오는 것 같았어요. 어떻게 보면 공장이 아니라 빨간 캔버스 앞에서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 같기도 했고요. 사진 속 현장이었던 충남 공장에 무작정 전화를 걸어서 찾아가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죠.
그 현장에 꼭 직접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나요?
그것이 중국에서 배운 것 중 하나예요. 직접 가고, 눈으로 보고, 사진으로 남기는 것. 사실 몇 차례나 거절을 당했어요. 일반인 통제 구역이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고요. 사진 찍는 것도 내키지 않아 하셨죠. 그래도 작품에 꼭 필요하다고 말씀드리면서 계속 설득을 했어요. 간식거리를 사서 찾아가기도 하고요. 제가 평소에는 말을 잘하지 않는 편인데, 할 때는 또 하는 성격이거든요(웃음). 결국 허락을 받아내서 현장에도 들어가고, 작업자 분들과 식사도 하고 인터뷰도 하면서 작업하는 과정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죠.
마침내 용광로를 직접 봤을 때는 어떤 기분이었나요.
설명하기 어려워요. 용광로의 문이 딱 열리고 시뻘건 불이 보이는데, 단지 뜨거운 것이 아니라 강렬한 기운을 느꼈어요.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립니다. 작품에서 불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도 시도해봤지만, 그때의 강렬한 불빛을 살리기가 힘들었어요. 사족은 빼고, 오직 그 기운을 전달하는 데 집중하다 보니 지금의 이미지가 된 것 같아요.
한 인터뷰에서 “용광로에는 인생이 있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작품에도 이러한 철학을 투영한 부분이 있을까요?
검은색 바탕이요. 여러 번 칠하고 말리는 과정을 엄청나게 반복해서 물감을 쌓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작품에 ‘노동’을 담고 싶었어요. 아무래도 용광로 앞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의 작업 대부분이 반복적인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불교적인 관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어떤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사소하고 별 볼 일 없는 일상과 감정의 반복이 아닌가 싶거든요. 배경을 칠하는 작업이 그것과 꼭 닮았습니다.
재료에도 현장의 성질을 반영했다고요.
검정 바탕을 작업할 때 유화물감과 탄소, 흑연을 혼합해서 사용합니다. 공장에서 볼 수 있는 금속성의 거친 느낌들을 표현하고 싶었거든요. 젯소를 두껍게 발라보기도 하고 소재나 방법적으로 다양한 시도를 해보다가 지금의 조합으로 고정하게 되었죠. 탄소와 흑연을 이용하면 그림 표면이 미세하게 반짝이는데, 화려한 반짝임이
아니라 금속의 투박함을 닮은 은은한 빛을 띠게 됩니다.
2년간 400점의 작품을 그렸습니다. 이토록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한때는 오기를 원동력 삼아 작업을 했습니다. ‘뭔가 보여줘야겠다’ 하는 마음 같은 거죠. 그런데 어느 순간 이것이 스스로에게 짐이 되더군요. 때마침 얕게나마 불교 공부를 하면서 ‘내려놓기’에 대해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을 비우고, 열심히 하려는 마음조차 내려놓으니까 진정한 원동력이 생기더라고요. 다른 것에는 크게 재미를 못 느끼는 제 성향도 한몫하는 것 같고요. 학생 때도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가 좋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전 7~8시에 작업실에 나와서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려요. 밤 10시까지 있는 날도 있고요. 흑연 가루가 날리면 그림이 지저분해지기 때문에 에어컨도 틀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립니다. 주변에서는 취미도 없이 이렇게 그림만 그리면 번아웃이 오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조언하는데, 저에게는 그림이 일이자 취미예요.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고 싶은가요.
‘공장 시리즈’를 만들고 싶어요. 제철소에서는 용광로에서 고철을 녹여 가공된 철을 만들잖아요. 저도 용광로에서 철근이나 혹은 다른 철의 이미지로 자연스럽게 이어나가고 싶어요. 새로운 연작을 시작하게 되면 이전 작업은 이어가지 않는 작가들도 있지만, 저는 ‘불’ 시리즈를 계속 이어갈 예정입니다. 제철소에서 용광로에 불을 켜는 것이 모든 과정의 시작인 것처럼, 저도 불을 켜야 다른 작업을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지금 해온 것처럼 불을 계속해서 발전시키고, 묵묵히 배경을 덧칠하며 차근차근 작업해나갈 생각입니다.
작가 김수수의 꿈은 무엇인가요.
상상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넓은 벽에 큰 그림 한 점을 걸어놓는 것이요.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이 한 점을 그리기까지 수많은 작업을 하며 굉장한 내공을 쌓았겠구나’ 저절로 느껴지도록 하는 그림이요. 제가 용광로를 처음 대면했을 때 느낀 강렬한 감정을, 미술관에 들어서는 관람객에게 똑같이 전달하고 싶습니다.
작가 김수수
주요 경력 롱아일랜드대학 파인아트 석사,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2018) 외
예상 가격 800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