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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예 Jun 05. 2020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은 이야기

층간소음, 오해가 부른 싸움.

    나른하게 앉아 가족들과 함께 멍하니 TV를 보고 있을 때였다. 현관 밖으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시선 집중. 아니지 소리 집중. 가족들 모두 무슨 일인가 싶어 귀를 쫑긋 세우고 조용해지길 기다렸다.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고 TV 안의 사람들은 소리 없이 움직이기만 했다. ‘누가 와서 말려주겠지.’ 기다렸다.


    소리에 집중한 지 5분이 지났다. 복도의 울림이 점점 심해졌다. 평소에 종종 한 아이가 혼나는 소리, 부부싸움 하는 소리가 들렸었지만 오늘은 그저 한 가정의 싸움이라 하기엔 판이 너무 컸다. 그리고 가까웠다! 무언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새로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로 보아 나가서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 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소리는 작아지지 않았다. 그제서야 나라도 나가서 말려야겠다는 생각에 옷을 주섬주섬 챙겼다. 가족들은 그런 나를 말렸다. 위험하다며, 칼에 찔리면 어쩔 것이냐며. 하지만 나는 이미 집을 나설 준비가 끝났고, 계단을 향해 내려갔다. 사건의 방관자가 되기 싫었다. 

    

    우리 라인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8층 아저씨와 7층 할아버지는 내가 나타하자 당황하신 듯 잠깐 주춤하셨지만 곧 격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시고 다시 설전에 돌입하셨다. 


    “아니 자꾸 똑같은 말 반복하게 하시네. 저랑 제 아들이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왜 자꾸 억지 부리세요! 나이 많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네 놈이 그따위니까 네 아들놈도 그 따위지! 그렇게 살면 안 돼!”

    “보자보자 하니까 뭐? 나이 많으면 다야? 노인네가 나이 먹어서 그러면 욕먹지. 그 나이 먹고 왜 그렇게 살아?”

    “어린놈이 말하는 거 봐라. 부모님은 이러고 사는 거 아시냐? 평소에 죄송하다 하던 건 다 가식이었구만?”

    “평소에 뻔질나게 찾아오는 게 자랑이다! 죄송하다고 사과만 하니까 만만한 게 우리 집이야? 노인네가 너무 예민한 건데 내가 참고 살았구만. 나 참 어이가 없어서.”


    할아버지와 아저씨가 몇 층에 사시는지도 방금 알게 된 마당에 내가 그들의 사정을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싸움이 더 커지기 전에 일단 말려야 했다. 옆에 계신 할머니와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할아버지와 아저씨를 각자의 집으로 모셨다. 싸움은 일단락되었다. 혼자 울컥한 채 남아계신 할머니를 집까지 모셔다 드리면서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오늘 싸움은 남자들끼리 욱 해서 싸운 그런 시시한 싸움이 아니었다.


    “아니, 우리 집 영감이 소리에 조금 예민해요. 평소에도 낮엔 조용하다가 저녁이 되면 쿵쾅거리니까 영감이 잠을 잘 못자. 그래서 처음엔 늦은 밤에만 좀 조심해달라고 영감이 말하고 온 모양이더라고. 그런데 나아지는 게 없으니까, 이제 소리가 나면 바로 올라갔었어요. 조금 자주 올라가긴 했는데 그만큼 매일 잠을 못 자니까 나도 못 말렸지요. 

    그런데 하루는 밤에 올라간 영감이 씩씩 거리면서 내려오더라고. 왜냐고 물으니까 태도가 달라졌대. 버르장머리가 없어졌다고. 그러고 나서도 종종 올라갔는데 항상 화내며 내려오니까 다음부턴 내가 올라갔어요.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고. 내가 올라가도 짜증을 많이 내더라고. 그래도 어쩌겠어. 영감은 잠을 못 자는데. 젊은 사람들은 힘이 넘치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이해했지요. 

     그런데 오늘은 좀....... 너무 했어요. 우리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이러면 안 되는 거야.”

    이미 할머니는 울음을 삼키고 계셨다. 누가 그 순박한 얼굴을 울상으로 만들었나 싶어 내 마음이 다 아팠다.


    “오늘 갑자기 8층 학생이 우리 집 대문을 박차면서 욕을 하고 갔어요. 입에 담기도 힘들어....... 우리가 뭘 잘못했죠? 영감이 좀 예민하긴 했어도 어른 공경이라는 게 있지. 너무 했어요, 이 집이. 사과 한 마디만 해줬으면 됐을 텐데.”


    오늘 싸움의 시작은 8층 아저씨의 아들이 7층 할아버지 댁을 발로 차면서 욕하고 간 것 때문이었지만,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실상 누가 7층 할아버지 댁을 차고 갔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게 사실인지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만약 누가 관심을 가졌다면 아까 8층 아줌마의 말이 무시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아들은 지방 대학에 가 있어서 할아버지 댁 문을 찰 수가 없어요!” 

    8층 아줌마의 말은 내게만 들렸을 뿐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오늘 문을 찬 사람은 8층 학생이었다. 적어도 7층 할아버지와 할머니껜 그랬다.


    뉴스에 나오던 상황은 멀리 있지 않았다. 복도에서 비명소리가 들리는 데도 아무도 나오지 않은 아파트 주민, 생각보다 그들은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심지어 나도 그들일 수 있었다.

    큰 소리가 나고, 그 싸움을 말리고,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집에 모셔다 드리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곳엔 여전히 나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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