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신화의 구성
단군신화는 5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① 환국시대(桓國時代)의 창세신화
② 환국시대와 구려환국시대(句麗桓國時代)의 치세신화
③ 구려환국시대의 신화 겸 종교역사
④ 고조선시대(古朝鮮時代)의 종교역사 겸 국가역사
현대 감각에 맞추기 위하여 환국(한국)시대를 고대 한국시대(古代韓國時代)라 칭하면 위의 시대구분은 이렇게 바꾸어 쓸 수 있다.
① 고대 한국시대(古代韓國時代)의 창세신화
② 고대 한국시대와 구려한국시대(句麗韓國時代)의 치세신화
③ 구려 한국시대의 신화 겸 종교역사
④ 고조선시대(古朝鮮時代)의 종교역사 겸 국가역사
부도지는 신라 때 영해 박씨의 선조인 박제상의 저술로 알려진 역사서 징심록(澄心錄)의 15지 가운데 맨 처음에 실린 지(誌)의 이름으로, 조선시대 김시습에 의해 번역되어 필사되었고, 그 필사본이 보관되어 있다고 하지만 확인할 수 없다.
부도지 원본은 박제상 사후에 박씨 종가에서 필사되어 전해져 오다. 1953년 영해 박씨 55개 손인 박금이 6.25 전쟁으로 피난 과정에서 유실하였고, 같은 해 울산 피난소에서 기억을 되살려 원문에 가깝게 복원하여 발표함으로써 일반에게 공개되었으며, 1986년 번역본이 출간되어 널리 알려졌다.
김시습의 필사본을 확인할 수 없고, 박금이 연구했던 기억으로 복원했다는 것은 저자의 주장일 뿐 사실이라는 근거가 없으니, 역사로서의 가치도 없다. 따라서 한국사학계에서 위서로 분류하고 있다. 위서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한국사에서 진서로 취급받는 어느 문헌에서도 한번도 등장하지 않고, 특히 일연스님이 삼국유사에 싣지 않았다는 점 등을 위서의 이유로 들고 있다.
사실 김시습의 필사본은 확인할 수 없고, 위서 여부는 박금 본인만이 알 뿐,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도 아니고, 해방된 내 조국에서 내 나라의 고대 신화를 쓴 것으로 비난받을 이유도 없다. 그리고 위서 여부와 관계없이 한국 고대 신화자료로는 그 자체로서의 가치가 있으며, 단군신화에 압축된 환인을 해석하는 자료로서도 손색이 없다. 그리고 신화는 신화일 뿐, 여기에 역사의 옷을 입혀 위서 논란을 삼을 필요 또한 없다.
계연수는 1916년경 묘향산에서 약초를 캐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도를 닦던 도인(道人)으로 단군신화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던 중, 1896년 실학자이자 애국계몽운동가였던 이기(당시 34세)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고, 태백진훈(1898)·단군세기(1898)· 태백일사(1899)· 참전계경(1899)· 천부경요해(1899) 등을 편찬했다. 이기와 함께 1909년 단학회(丹學會)를 세우고 태백교(太白敎)를 창건했고, 이해 나철이 단군교를 복구해 중광했다.
1910년 한일합병으로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는 해, 단군교가 대종교로 이름이 바꾸어 독립운동에 선봉에 나서고, 정훈모(鄭薰模)를 중심으로 한 일부 신도가 단군교 교명의 고수를 명분으로 삼아 분립하는 혼란이 일어난 가운데, 계연수는 1911년 이기가 내용수집과 감수를 책임지고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영웅인 여천, 홍범도, 송암, 오동진 등에게 자금을 지원받아 삼성기(상,하),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5권을 하나로 묶어 환단고기 30권을 출간하였다. 이 중 1권이 이유립의 손에 들어가 1921년 발간된 듯하다.
이유립의 환단고기에서 삼성기 상,하 권은 안함로가 상권을 짓고 원동중이 하권을 지었다고 한다. 안함로와 원동중은 환단고기에만 등장하는 인물이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삼성기는 안함 '노원'동중이 지은 책으로 한권이다.
한편, 계연수는 당시 석벽에서 발견한 천부경을 탁본해 단군교에 넘겨 해석했고, 단군교 대선사 윤호정을 통해 천병훈에게 전달해 그의 저서 정신 철학통편(1920)에 실어 알렸다고도 한다. 천부경은 삼일신고'팔리훈'신사기와 더불어 대종교 4대 경전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학계에서는 계연수의 실존성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위서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치세 신화로 위서의 논란이 있지만, 위 1의 경우와 같은 이유로 한국 고대 신화자료로의 가치와 단군신화에 압축된 환인을 해석하는 자료로 손색이 없다.
신화 겸 종교역사는 한국사서 삼국유사, 제왕운기 및 한국고기인 환단고기, 중국설화와 사마천의 사기 중 삼황오제본기, 산해경 등의 중국사서를 통해 설명된다. 신화 겸 종교역사는 국가역사가 아님으로 위서 논란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신화에 관한 부분은 문제가 되지 않으나, 다만 종교역사에 관한 부문은 중국사서나 한국 역사서를 통한 고증으로 존재의 사실성 확인이 필요하다. 다만 국가역사가 아닌 종교역사의 문제임으로 연도나 지명 등으로 진위를 가릴 것이 아니라, 그런 신화가 존재하느냐 존재치 않느냐에 치중하여야 할 것이다.
중국사서는 중국의 신화'역사' 지리서이다. 중국사서는 중국의 신화'역사' 지리서이다. 한국 고대역사가 포함되어 있거나 연관이 되어 있어서, 한국사 연구와 고증에 참고가 된다.
중국사서는 후대의 사람들이 산정(刪定)한 명(明)나라의 성조(成祖) 때 한림학사 호광(胡廣) 등이 칙명(勅命)에 의하여 편찬했던 사서대전(四書大全) 37권, 청(淸)나라의 육농기(陸隴其)가 엮은 삼로당판(三魯堂板) 사서대전(四書大全) 40권, 왕분(汪芬)의 사서대전변(四書大全辨) 42권 등의 주석서(註釋書)가 있다.
현재의 산해경은 동진 시대의 곽박이 주산해경서(註山海經書)라는 교정본을 내서 정리한 것으로 시작하여, 청나라의 학의행이 산해경전소(山海經箋疏)를 써서 신산해경소서(新山海經疏)로 다시 교역한 것이다.
산해경에는 고조선과 단군왕검의 아버지인 천신 치우환웅의 이야기를 비롯한 고대 한국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단군신화 이전의 이야기는 신화의 영역임으로 위서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단군신화로부터의 이야기 역시 앞에서 설명한 대로 종교역사이므로 위서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다만 존재 자체에 대한 사실만은 확인하여야 하는데, 종교역사인 위 3의 경우와 같다.
사실 고조선시대에 고조선은 명목상으로만 존재할 뿐, 단군신화 내용에서는 단군조선(檀君朝鮮), 기자조선(箕子朝鮮) 등 조선(朝鮮)을 공통적 어미로 가진 국가이름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은 종교나라 고조선의 일부이다.
한국사에서 역사로 인정되지 않지만, 고조선 즉 고조선시대는 종교나라의 역사이기 때문에 위서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단군신화 내용에 고조선이란 나라 이름이 없으니, 종교나라 고조선의 실체도 없다. 실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밝히려고도 하지 않으니, 종교나라 고조선과 이들 종교정치국가 및 전제 통치국가 사이의 관계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환단고기 등 위서로 비난받는 한국고기에서는 고조선이라는 종교나라가 존재했고, 종교가 천도신앙을 바탕으로 한 신교(神敎) 혹은 수두교(蘇塗敎)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과학문명이 발달한 현대에도 바티칸시국을 종교중심국가로 하는 바티칸 성좌라는 기독교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천주교의 종교나라가 존재하는데, 신화가 발달한 기원전 고대시 대에 고조선이라는 종교나라가 있었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고조선시대의 고조선은 종교역사이기 때문에 위서 논란과는 관계가 없다. 다만 앞에서 언급하였던대로 존재사실 유무와 한민족 및 중국민족의 정치국가들과의 관계를 확인하기 위하여는 한국고기와 한국사서를 통한 고증이 필요하다.
왕이 다스리는 종교정치국가나 전제통치국가의 국가역사이기 때문에 위서 논란과 관계가 있으며, 따라서 당연히 한국사서를 바탕으로 정확히 해석해야 한다.
고조선시대의 종교정치국가 및 전제통치국가의 역사와 종교나라 고조선과의 관계는 밝혀진 바가 없다. 한국역사에서 종교나라 고조선의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정사 한국역사에서는 기자조선(BC11 00년경)부터를 고조선의 역사로 인정하고 있는데, 이에 의하면 고조선의 역사는 1100여 년으로 한국사 2,333년에서 약 1200여 년이 줄어들게 된다. 단군신화 표제의 고조선과 내용의 조선(단군조선)을 동일시한 오류로부터 생겨난 결과이다.
한국역사에서 명백한 중국인이 세운 국가인 기자조선으로부터 한국사가 시작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삼국시대로부터 시작되었던 2000여 년 이상의 사대주의적 역사나 일제에 의한 친일사관을 배경에 둔다 하더라도, 교육에서 이런 왜곡된 국가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옳지 않다. 한국사를 기원전 2,333년으로 정상화하려면 단군신화 내용의 조선(단군조선)의 실체가 명백해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종교나라 고조선의 존재와 실체가 밝혀져야한다.
고조선시대의 종교정치역사와 전제통치역사는 국가역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사서에 입각한 엄격한 고증이 필요하다. 다만 종교나라 고조선과의 관계를 확인하기 위하여 한국고기와 중국사서를 비롯한 신화나 설화를 통한 깊이 있는 해석이 필요하다.
해설 단군신화는 이 5가지 내용 분류와 참고 자료를 토대로 진행된다. 단군신화를 해석하는데 부도지와 환단고기를 비롯한 다른 한국고기와 중국사서들을 통해 설명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단군신화의 내용이 지나치게 압축되어 있어 그대로는 완전한 이해가 어렵다.
② 서구 역사에서는 설화나 신화를 역사와 따로 구분하지 않고, 중국역사에서는 설화나 신화를 역사와 분리하지만 확실한 구분 없이 중국사서로 표현하기 때문에 기록의 신빙성이 확보되는 것은 물론, 설화나 신화 특유의 과장이 섞여 내용이 광범위하고 풍부하다.
반면 한국역사는 사서(역사서)와 신화, 설화를 따로 구분하고 정사 사서만을 중시하기 때문에 기록의 신빙성이 사라진 것은 물론, 사서 기록이 없거나 유실되어 남아있지 않아서 참고에 한계가 있다.
③ 한국역사 중에 기자조선 이전의 정사에 속하지 않는 역사는 한국사에서 전혀 인정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위서로 취급되어 부정적 인식까지 있는 상황이다.
특히 고조선의 경우 통치국가 개념의 역사가 아니기 때문에 유물이나 역사 자료를 찾기 힘들어 더욱 그렇다.
단군신화는 위와 같은 이유로 부도지와 환단고기를 통하지 않고는 완벽한 이해가 힘들다. 일각에서 부도지와 환단고기에 대한 위서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앞에서 설명했으므로 넘어간다. 또한 혹자는 위서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치부할 수도 있으나, 단군신화의 정신에서도 정의는 그때의 상황에 맞는 최선을 의미하는 것으로, 위서라 하여 모두 불의는 아니다. 그리고 설령 위서라 할지라도 단군신화의 해설서로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 않는다.
해설 단군신화를 시작하기에 앞서 두 가지 점을 먼저 밝히고 넘어가려 한다.
① 민족주의적인 역사학자들이나 환단고기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환빠로 비하하는 견해들이 있다. 민족주의자라는 말이 얼핏 보기엔 고리타분하고 시대에 뒤떨어져보일 수도 있으나, 국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국가를 지키고 보호한 이들은 바로 이런 민족주의자들이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전쟁의 선봉에 서서 싸운 광복군의 중심세력은 민족주의자였던 대종교인들이었고, 우리가 현재 삼일절 기념식에서 묵념을 올리는 순국선열들이 바로 민족주의자였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과연 무엇을 했던가 반성하여야 한다. 과연 그들을 비하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자가 얼마나 있을까? 민족주의라는 것은 국가와 민족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마음이다. 그러니 무작정 비방하고 욕하진 말아야 할 것이다.
참고로 민족주의와 파벌주의(派閥主義)을 오해하는 경향이 많이 있는데, 파벌주의는 전제 군주시대의 중국 유교식 당파주의(黨派主義)에서 나온 현상으로 엄격히 구분하여야 한다.
② 현대 한국사에서 배우는 내용과 서로 충돌하는 내용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한국의 사회 관습과 문화가 옳은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사대주의의식과 친일의식,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 의식에 젖어 역사가 왜곡되어 있다는 의심을 가져보자. 현행 한국사에서 배운 지식과 비교하면서 올바른 역사 인식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