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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람 Aug 16. 2023

해설 단군신화(8. 교정)

단군신화와 한국사의 충돌

 단군신화는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희안하게도 한국사와 충돌한다. 

 신토불이원래 불교용어로 "신(身)이란 지금까지의 행위의 결과인 정보(正報)를 의미하고, 토(土)는 신이 입각하고 있는 환경인 의보(依報)를 의미하는데, 이 둘은 떼어놓을 수 없다."는 뜻이다. 몸에서 일어나는 일은 환경의 영향을 받아서 생긴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자기가 사는 땅에서 산출된 농산물이 체질에 잘 맞는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발생한 이야기는 우리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오래될수록 사랑받으며 널리 알려진다. 세상의 모든 나라의 설화나 삶의 이야기는 그런 이유로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 회자되어 전승되고, 기록되어 신화나 역사로 남는다.

 한국에도 마찬가지로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신화나 역사가 있다. 그러나 삼한시대 이전의 신화나 역사는 대부분이 정사 사와 충돌하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신토불이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단군신화가 더욱 그렇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에는 수많은 민담과 설화와 신화와 역사가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한국사와 정면으로 대치되어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는 기록이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이다. 삼국유사 외에도 단군신화를 다룬 규원사화, 제왕운기 등의 한국고기가 있지만, 정사가 아닌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는 유독 한국사에서 논란의 대상이 된다. 삼국유사처럼 종교역사인 동시에 국가역사인 규원사화는 고려말 이명이 지은 진역유기를 참고하였는데, 진역유기의 실제 가능성 확인으로 비판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는 다른 한국고기와도 구분된다. 종교역사이면서 국가역사인 단군신화가 선택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과는 달리 환단고기 등의 한국고기는 역사작품에 해당하기 때문에 위서 논란으로 한국사에서 제외되고 있기 때문이다. 단군신화가 한국사와 충돌해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잘못된 역사관과 문자 사용 역사에 원인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1) 잘못된 역사관

 

 역사가 연결되면 역사관이 연결되고, 역사와 역사관이 연결되면 잘못된 역사관이 생겨날 수 없다. 즉 한국 역사와 고조선의 역사가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역사관이 생긴 것이다. 잘못된 역사관은 고조선의 실체성에 대한 논란인데, 그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고려 성종(990년경) 때 시작된 유교 사회의 유습이 조선시대의 사대주의 전통으로 이어져 오늘날의 역사관에 반영되고 있는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둘째로 고려 충렬왕 때인 1280년경 단군신화가 최초로 등장했는데, 성종 때인 990년경 유교가 정착되었고, 삼국시대에 유교가 들어왔던 사실로 보아 삼국시대의 유교 도입도 원인의 하나로 보인다.

셋째로 특히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의 한민족정신 말살정책에 의한 역사왜곡에 의한 친일적 역사관이 오늘날의 역사관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추정된다.

넷째로 현재 한국의 교육, 문화, 정치, 국방 등에는 아직 사대주의자와 친일세력들이 자리하고 있다. 잘못된 역사관을 바로잡지 못하는 이유다.     


 사대주의(事大主義)는 과거로부터 한국역사, 문화와 관계가 깊은 중국이라는 강대국에 대한 경제, 문화, 국방, 역사 등 국정 전반적인 주체성 상실주의이다. 사대주의는 중국과 충돌하는 과거 역사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져 역사를 왜곡하거나 부정하는 잘못된 역사 사관을 형성하게 된다.

 친일사관(親日史觀)은 해방 후 친일세력이 청산되지 않고 그대로 대한민국의 기득권 세력이 되면서 생겨난 일본이라는 경제대국에 대한 국정 전반적인 주체성 상실주의이다. 친일사관은 일본의 한국 강점기 시절 행한 역사왜곡, 인권 침해 등 과거 역사에 대한 인정으로 이어져 역사를 왜곡하거나 부정하는 잘못된 역사관을 형성하게 된다.     


 고조선의 실체성에 대한 부정은 사대주의와 친일사관에 공통적으로 해당하는 역사 왜곡이다. 역사 왜곡으로 인하여 과거의 역사가 왜곡되면 민족성이 사라지고, 민족성이 사라지는 것과 비례하여 애국심도 사라지며, 민족의식과 애국심 부족으로 고조선의 실체가 부정되고 한국사와 충돌하는 것이다. 만약 역사 왜곡이 없음에도 과거 역사와 현대역사가 충돌한다면, 문자가 없어 기록을 못하였거나 문자사용 역사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2) 문자사용 역사

 

  문자가 있다면 국가와 민족의 역사가 빠짐 없이 기록될 것이고, 국가와 민족의 역사 기록이 계속되었다면 과거와 현재의 역사가 충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최초의 국가가 세워진 후에도 문자가 없거나, 없다가 새로 생겨났다면 전설, 설화, 신화 등의 형태로 전해지다 기록됨으로써 역사가 왜곡될 수 있다. 또한 문자가 있다가 오랫동안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거나 문자가 바뀌는 경우가 있다면, 기록이 왜곡되어 역시 역사가 왜곡될 수 있다. 문자 사용 역사의 문제로 인한 역사 왜곡은 과거사와 현대사의 충돌을 야기시킬 수 있으며, 문자 사용의 역사는 종교, 철학사상 등 문화의 전환기와 관계가 있다.    

 

한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세 번의 큰 문화의 전환기가 있다.


① 삼국시대로 고조선의 문화가 단절되었던 기원 전후의 시기이다.

② 중국으로부터 유교가 정식으로 도입되어 유교사관이 형성되었던 시기로 고려성종(981~997)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시기이다.

③ 일제강점기로 유교사회가 끝나고 친일사관이 싹텄던 시점이다.     


① 고조선의 문화가 단절된 삼국시대     


 고조선의 문화가 단절된 삼국시대에는 한국사회에 유교가 정착되기 전에 전제왕조의 시작과 함께 중국으로 부터 유학이라는 학문과 불교라는 종교가 들어왔던 사실이 있다.

 한국사에서는 이때 들어온 유학과 불교 외에 한민족 토속 학문과 종교가 없었다는 논리를 펴고 있으니, 당연히 국어가 없었을 수밖에 없다. 기자조선으로만 따져도 1,000여년의 역사에다 항차 문자를 사용하던 중국인이 세운나라였고, 단군신화에 기반하면 최소 B.C. 2,000여년 경까지 아니 그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되는 역사에 좀 황당한 논리이긴 하지만, 한국사에서 그렇게 가르치니 옳다고 치자.

 그러면 고조선문화가 단절되고, 단군신화만 구전으로 전해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고조선문화는 불교와 유교에 흡수되어 녹아있으니 그렇다 치고, 국어가 없었다고 하는 부분은 따져보아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였다.     


 유학과 불교의 전래는 곧 한자가 국어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전제왕조시대의 사대주의하에서 한자가 국어로 사용되었다면, 단군신화의 전승이 끊어질 수 밖에 없다. 고조선시대에 문자가 없어 기록이 되지 않아 구전으로 전해졌기에 전승이 끊어졌을 수도 있고, 문자가 있었는데 어떤 이유로 망실되었거나 한자 사용을 계기로 망실되어 전승이 끊어졌을 수도 있다.


② 유교의 도입  

   

  고려 성종 때 유교가 도입되었고, 유교문화시대인 충열왕 때 원간섭기를 계기로 단군신화가 삼국유사와 규원사화에 한자로 기록되면서 최초로 단군 신화의 문자 전승 시대가 열린다. 문자 전승이라고 하지만 한자 전승이었으므로 대중화가 되지는 못하였다. 조선 세조 때의 고대사서 수거령으로 보아, 공식적으로 조선시대까지 한자로 전승되었던 단군신화를 비롯한 한국 고대 사서의 전승이 끊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선 세종대왕 때의 한글 창제로 단군신화를 한글로 전승할 수 있게 되었고, 고종 때 대종교의 시발점이 된 동학(東學)이 일어나면서 단군신화가 한글로 대중에게 보급되었다.    

 

③ 친일사관의 시작     


 일제강점기에 한글 단군신화가 있었고, 항일독립투사들의 중심에 단군을 믿는 대종교인들이 있었고, 일본의 문화말살정책으로 단군신화가 부정되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일본은 한글 사용을 막고 일어(日語) 사용을 강권하기도 했다. 일본보다 한국의 역사가 깊으면 안되고, 한국인들의 민족주의를 없애야 하니 당연한 결과였다.     

 살펴본 것처럼 단군신화의 전승은 문자 역사의 변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그래서 한글사용과 훈민정음 창제를 통하여 단군신화와 한국사의 충돌 이유를 살펴보았다.     


1) 한글 사용을 통해서 살펴본 충돌 이유


 한국사에서는 "고조선의 역사가 시작된 2333년경부터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1,444년까지 한글이 없었던 역사가 약 3800여 년이고, 삼국시대로부터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조하기 전까지 1,444년간 한자와 한자를 차용한 이두(吏讀)를 사용하여 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즉 한국인은 총 3,800여 년간 자신들의 글자 없이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이웃한 중국의 예를 들어보면 BC 1,600년경(은갑골문자)부터 한자를 사용하였는데, 비슷한 역사를 가진 한국에서는 약 3,000년이 뒤진 기원후 1,444년이 되어서야 고유의 의사 전달 수단인 한글을 가졌다. 심지어 기원전 시대에는 한국인과 중국인이 중국대륙에서 서로 경쟁하며 함께 살았던 역사까지 있다. 

 즉 한국인들은 어순을 주어-목적어-서술어로 하여 한자로 주어와 서술어를 쓰고 이두로 어미를 붙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로 보면 기원전 시대에 한국인들은 한자와 한글을 고루 사용하여 주어와 서술어를 쓰고 이두 대신 고대 한글로 어미를 붙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일본의 경우 한국으로부터 4~5세기 경에 글자를 받아들여 만요가나를 만들었고, 9세기 중반에는 가다가나와 하라가나를 만들어 일본글자를 완성하였다. 심지어 일본어는 고립어인 중국어와는 달리 한글과 같은 교착어이고, 문장구성 역시 주어'동사'목적어 순서인 중국어와 달리 주어'목적어'동사의 순으로 한글과 같다.

 일본어가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원전 4~5세기 경에 한국을 통하여 한자가 이두와 함께 일본에 전해져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글창제가 AD 1,444년이었음을 감안하면 일본이 무려 1,000여 년이 앞선 것인데, 일본인이 1,000여년 동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동안 한국인은 유에서 1,000년 동안 멍청하게 그대로 머물렀다는 이야기로 이치와 상식에 어긋난다.      


 한국의 벼농사 역사가 확인된 것만으로 기원전 2,000년경인데 비해, 일본은 기원전 3세기 야요이 시대에 한국으로부터 벼농사를 전해 받아 야만에서 벗어났고, 4~5세기에 한국으로부터 문화는 물론 전술했던 것처럼 글자를 받아들여 일본어를 만든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일본에 글자와 문명문화를 전한 한국이 중국과 비슷한 시기에 한글에 상응하는 문자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인 추측이다.

 더욱이 한민족은 삼국시대로 부터 조선시대까지 약 2,000여년간 전제통치시대의 왕조들에 의해 인권을 박탈당했지만, 일제강점기와 6.25로 폐허가 된 상황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시간에 경제발전을 이루었을 정도로 우수한 민족이다. 이런 한민족의 우수성으로 보아 충분히 중국처럼 글자가 있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고, 후술하겠지만 그런 정황도 있다.     


 한'중'일 역사를 되돌아 보면 기원전 역사는 알 수 없지만, 기원 후에는 중국-한국-일본의 순서로 글자와 기술 등의 문명문화가 전달된다.

 그런데 기원전 시대에 중국인과 한국인이 3,000년 이상을 함께 살았는데 한쪽은 글자가 있었고 한쪽은 글자가 없었으며, 일본에 문자를 전한 한국이 일본보다 1,000여년이 늦어서야 비로소 한글을 가졌다. 그렇다면 최소 일본에 글자를 전한 기원전 4-5세기 이전, 최대 중국과 같은 기원전 1,600여년 정도에 글자가 있었을 수도 있다.    


 한자나 이두가 사용되었던 삼국시대에서 훈민정음 창제 사이의 역사는 한자가 생활수단이 되는 사대주의시대여서 그렇다치더라도, 문제는 삼국시대 이전의 기원전 시대에 한글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것이다. 기원전 시대는 단군신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가장 합리적으로 해 볼 수 있는 추정이 전술했던 한자와 고대 한글을 고루 사용하여 주어와 서술어를 쓰고 고대 한글로 어미를 붙였고, 삼국시대 들어오면서 고대 한글을 이두로 바꾸었을 것이라는 가설이다. 따라서 훈민정음 창제를 통해서 한글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한글이 단군신화에 어떤 영향을 미쳐서 한국사와의 충돌을 일으켰는지 살펴보았다.


  2) 훈민정음 창제를 통해서 살펴본 충돌 이유


 한글 사용은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즉 훈민정음이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글이고 세계 문자 사상 가장 진보된 글자임에도 불구하고, 1,444년 이전에 한글이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궁(宮)에서 세상과 담을 쌓고 평생을 한자만 접하고 산 세종대왕이 lx도 끝도 없이 애민정신 하나만으로 혼자의 힘으로 한글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집현전 학자의 도움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정설로 가르쳤는데, 최근 세종대왕이 직접 창제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전술했듯이 훈민정음 창제 전에 우리 민족은 한자와 한자를 차용한 이두를 사용했는데, 이두의 역사는 삼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래서 기원 후 1,444년을 중국어에 기대어 살다가,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로 인해 한글을 갑툭튀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세종대왕을 성군이라 칭하며 천재로 부르는 이런 이유 때문인데, 세종대왕이 성균관 학자들이 아닌 다른 사람이나 혹은 밝힐 수 없는 자료의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대왕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낮추어 부르는 의미로 언문(諺文)이라고 하였는데, 1920년대 주시경 선생을 비롯한 한글 학자들에 의하여 한글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백성을 사랑했다는 세종대왕이 백성을 위해 자신이 만든 글에 만든 글을 굳이 낮추어 부르는 의미의 언문(諺文)으로 불렀다는 것은 상식 밖의 해석으로, 언문의 언(諺)자에는 자랑할 안(諺)이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안문으로 불러 '자랑할만한 글'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세종대왕이 언문(諺文)으로 칭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한글이 소리글자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사실 소리글자라는 의미의 언문(言文)이 맞다고 할 것이다.

 상형언어인 중국 글의 문장을 한문(漢文)이라 하고 글자를 한자(漢字)라고 한다면, 음성언어인 한글의 문장은 언문(言文)이 되고 글자는 언자(言字)가 되는 것이 이치에 맞다. 그런데 세종대왕과 사대부 선비는 굳이 낮추어 부르는 의미의 단어인 언문(諺文)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당시의 시대 상황과 함께 소리글자에 해당하는 고유의 언문(言文)이 존재했을 수도 있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데, 이는 전술했던 1)의 고대시대 한글사용의 의혹에서 밝혔던 바와 같다. 이에 따르면 훈민정음의 정음(正音)은 한자나 이두를 글자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바꾸어 고대 한글을 되살려 정음으로 바르게 사용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단군신화는 이치에 따르면 한글로 전해지는 것이 원칙이겠지만, 이치에 어긋나게 규원사화와 삼국유사를 시작으로 한자로 기록되어 전해져왔다.

 반대로 단군신화의 해석 자료가 되는 다른 한국고기에서는 고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가림토문자(加臨土文字)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일부 사학자들 간에 세종대왕이 정의공주와 신미스님을 통해 연구한 변음(變音)과 토착(土着) 등의 소리글자가 바로 언문에 해당하는 가림토문자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이에 따르면 고대에는 가림토문자로 기록된 단군신화가 있었는데, 삼국시대로부터 유실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일반 사학계에서는 가림토문자가 등장하는 한단고기 등의 한국고기가 위서(僞書)라는 주장, 기타 믿을 만한 정사(正史)에 가림토문자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는 점, 각종 암벽에 발견된 가림토문자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의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어 고대 언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규원사화와 삼국유사 이전에 글자로 기록된 단군신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시대에 언문에 해당하는 가림토문자와 단군신화가 있었다는 정황이 있다.

 BC 190년대의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阬儒)에 의한 고대 한국문서의 유실과 삼한시대의 대규모 한반도 이동과 삼국시대 이후 국가정책에 의하여 사대주의와 한자 사용이 강제되었던 점을 고려하면, 기원전 시대에 가림토문자나 단군신화가 있었을 수도 있고, 있었다 하더라도 사라지거나 그 일부 형태만 명맥을 유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상식적이고 합리적이다.

 현대에도 큰 변란이 있거나 국가가 작정하고 막으려 하면, 불과 얼마 전에 일어난 일도 없던 일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후 기간이 무려 1,600여년인데, 사라지거나 흔적만 남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일 것이다. 가림토 문자가 언문은 아니더라도 언문의 원형은 될 수 있고, 가림토문자의 존재와 인정 여부에 관계없이 언문을 훈민정음의 모태로 생각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세종대왕이 백성을 위한다고 소리글자 언문(言文)을 정음으로 만들어 놓고, 소리글자라는 의미가 아닌 낮추어 부르는 의미의 언문으로 부른데 대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단군신화와 한국사의 충돌을 전체적으로 정리해보면 이렇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단군신화에 대한 설화'신화가 한자와 고대 한국어인 가림토문자라는 소리글자(언문)로 전해 내려오다,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한반도 이전 과정 혹은 삼국시대로부터의 한자 사용으로 사라져 구전(口傳)으로만 전해졌고, 고려말 충열왕 때 국가위난에서 한자로 된 단군신화가 기록되었다. 그러나 조선 세조 때 사서 수거령으로 한자로 된 단군신화의 전승이 중단되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창제로 언문을 부활시키면서 민중들이 계몽되었고, 조선말기 유교 사회의 붕괴와 중국'일본'서구 열강의 침략과 서구문화의 유입으로 인한 국가 위난에서 민족의식이 일어나면서 동학과 천도교에 의해 단군신화가 한글로 되살아났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로 접어들면서 한민족 말살정책에 의해 단군신화는 다시 묻히게 되었고, 해방 이 후 중국 사대주의와 친일사관이 계속되면서 지금까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한글과 단군신화는 살펴본 것처럼 서로 상호 보완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민족을 지키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오늘날 단군신화와 한국사가 충돌하고 있는 것은 한국사회 깊숙이 팽배해 있는 사대주의 사관 및 친일사관과의 충돌 때문이다.

단군신화와 한국사의 충돌은 이처럼 한글 사용과 싶은 관계가 있으며, 단군신화는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시작된다.     



- 다음 해설 단군신화(9) "단군신화와 환인'환웅이야기" 편에서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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