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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람 Oct 23. 2023

해설 단군신화(56. 교정)

삼한시대 3( 삼국시대의 전신): 한사군 설치와 한반도 시대

  삼한시대 중에서 삼국시대의 전신이 되는 시기는 BC 108년 한사군이 설치된 이후 한반도에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 형성된 시기인데, 특히 구분하여 한반도 삼한시대라고 부른다.   

  

 한반도 삼한시대에 중국에 살던 한민족의 오가(五家) 중에서 3가(三家)가 한반도로 이주하여 삼한(三韓)이라 불렸던 것으로 보이는데,  오가의 분리와 남은 2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한반도 삼한 시대는 기자조선과 함께 한국역사에서 정사로 인정되고 있는 역사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중국인에 의해 세워진 국가임을 감안하면, 정사 한국역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사 한국사에서는 한반도 삼한 시대만을 삼한 시대로 규정하고 있다.      



 

 삼국시대의 전신이 되는 삼한 시대에 관한 역사기록은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에 기록된 부여전(夫餘傳)·고구려전(高句麗傳)·옥저(沃沮)·읍루(?婁)·예(濊)·삼한전(三韓傳)에 처음 등장하며, 축약 정리된 내용이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과 진서(晉書) 사이전(四夷傳) 등에 실려 있다. 

 참고로 삼국지 위지 동이전은 진(晉)나라의 학자 진수(陳壽)가  중국의 후한 멸망 후 위(魏)ㆍ촉(蜀)ㆍ오 3국이 분립한 시대(AD 220~280)까지의 역사를 편찬했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중국의 역사서이고,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은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 송의 범엽(范曄)이 광무제(AD 25)에서 헌제(AD 220)에 이르는 후한의 13대 196년 역사를 편찬한 역사서이며, 진서(晉書) 사이전(四夷傳)은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사마의(AD 155)의 시절부터 서진을 거쳐 동진 공제 때 동진이 멸망(AD 419)할 때까지의 사마진(사마씨)의 역사 기록을 담은 역사서이다. 


  삼한시대에 대한 다른 기록으로 상고 시대의 황제(BC 104)부터 한무제 태초 연간(BC 101년)의 중국 전한(前漢)과 그 주변 민족의 역사를 포괄하여 저술한 가장 오랜된 역사서인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한 고조 유방(BC 206년)이 전한을 창건한 때부터 왕망의 신나라가 망한 AD 23년까지의 역사를 담고 있는 반고의 한서(漢書)가 있다.


  삼한시대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조선 고종황제가 국명을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한의 유래를 설명한 대목이다. 고종실록(1897년 10월 11일)에서 대한제국의 유래에 대해 "우리나라는 곧 삼한의 땅인데, 국초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매번 각국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이라고 하였다. 이는 아마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 국호가 이미 정해졌으니, 원구단에 행할 고유제의 제문과 반조문에 모두 대한으로 쓰도록 하라."고 고종의 발표를 전하고 있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의 전신이 되는 한반도의 삼한시대는 마한의 54개 소국(小國), 진한과 변한 각각 12개씩 24개의 소국으로 구성되었고, 진한 또는 삼한 모두가 진국(辰國) 또는 중국(衆國)으로부터 발전되었으며, 구체적인 한 소국의 활동기록이 나타나는 것은 AD 1세기 초엽의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리고 이 총 78개의 소국들이 전제군주국가 시대인 삼국시대·남북국시대(통일 신라 시대)·고려 시대·조선 시대로 연결된다. 


 삼국시대의 전신이 되는 삼한 시대의 성립에는 한사군 설치와 고조선 유민의 한반도 이주라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1. 한사군(漢四郡) 설치


 전한의 한무제는 BC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낙랑군(樂浪軍), 진번군(眞番郡), 임둔군(臨屯郡)의 3군을 위만조선 영내에 설치하였으며, BC 107년에 다시 예맥(濊貊) 지방에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하였다. 한나라가 설치했던 4개의 군(郡)이라고 하여 한사군(漢四郡)이라 하는데, 그 위치는 유물과 사료로 볼 때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주장보다 중국의 요하(遼河, 랴오허강)을 중심으로 한 요서(遼西)와 요동(遼東) 일부 지역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한사군이 설치되어 실제로 식민정책을 수행한 것은 낙랑군과 현도군 정도이고그 중심지는 낙랑군이었다이 낙랑군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의 낙랑국(樂浪國)이 아니다

 BC 82년에 이르러 진번·임둔 양군을 폐지하여 진번군을 낙랑군에 임둔군을 현도군에 각각 병합시켰으며, BC 72년 (전한 소제 원봉 6년)에는 토착민의 반발로 현도군이 요동 방면(지금의 혼하(渾河) 상류의 흥경(興京) 노성(老城) 지방)으로 옮겨졌다. 이때 현도군에 통합되었던 임둔군의 현들은 낙랑군에 편입되어 최종적으로 구 위만조선의 영역에는 낙랑군이 남게 되었다. 낙랑군은 진번·임둔의 영역에 각각 남부도위(南部都尉)와 동부도위(東部都尉)를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전한을 무너뜨리고 그 뒤를 이었던 신(新, AD 8년~23년)나라의 왕망 시기에 태수의 관직을 태윤(太尹)으로 바꾸었는데, 평양 인근에서 낙랑태윤장(樂浪太尹章)이라 찍힌 봉니(捧泥)가 발굴되었다. 

 신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낙랑군에 반란이 일어나 낙랑 사람 왕조(王調)가 스스로 대장군 낙랑태수(大將軍 樂浪太守)라고 칭하였다고 하는데, 이때는 이미 BC 37년경 세워진 고구려가 있었고, 신 나라의 국토에도 평양지역이 포함되어 있기에, 평양의 낙랑군이 신나라 영역이었는지 고구려 영역이었는지 알 수 없다. 한사군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혼란이나, 요서와 요동일부 지역에 있던 낙랑군과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에 나오는 낙랑국에 대한 혼란이 있는 이유이다.   


 어찌했던 한사군 설치를 시점으로 한반도에는 삼국시대의 전신이 되는 북부여' 동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 수많은 소국들이 등장하여 삼한시대가 시작된다.  

 한반도에서 삼한시대가 형성되는 과정은 한마디로 전쟁의 역사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삼한시대를 상징하는 유물유적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 동검(銅劍)과 동검을 압도하는 철검(鐵劍)의 철기문화(鐵器文化)이다. 


 BC 2세기경 이전까지 한반도 중북부를 비롯한 중국 요동지역에는 전한· 고구려·신나라·후한 등의 요령식동검(遼寜式銅劍) 혹은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으로 불려지는 곡인형 동검을 사용했던 정치집단이 있었다. 

 BC 2세기경까지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는 진국(辰國) 또는 중국(衆國)이라는 한국식동검(韓國式銅劍) 혹은 세형동검(細形銅劍: 좁은 놋 동검)문화를 배경으로 한 정치집단이 있었다. 

 서북한 지역이 두 양식의 점이 지대라면, 동북한 지역과 그 이남 지역은 한국식 세형동검의 주된 분포 지역이다. 

 한반도의 철기문화는 서기전 4∼3세기에 북부의 압록강 중류와 서북지방을 거쳐 중부지역과 서남부지역까지 파급되었고, 중북부지역의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과 중남부지역의 세형동검문화를 배경으로 한 진국을 압박하였으며, BC 1세기 이후 위씨 조선계 유민과 부여계 유이민의 유입으로 철기문화가 다시 북부지역과 낙동강 유역의 변한 지역에 보급되었다.    

  



2. 고조선 유민의 한반도 이주와 삼한의 분류


 고조선의 유민들이 한반도에 정착하는 과정과 경로에는“육로로 이동하는 방법과 해로로 이동하는 방법의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여기에는 " 장애물이 없다면 안전한 육로로 이동할 것이고, 장애물이 있다면 야간·위장·산악 이용 등의 비밀스러운 루트를 택할 것이고, 육로가 막혀 불가능하다면 해로로 이동할 것이다. ”는 룰이 적용되는데, 그에 따라 무기나 문명의 이동도 함께 한다.

  

   검의 변천과 이동경로를 토대로 삼한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검의 변천과정으로 보면 세형동검(細形銅劍)-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철검(鐵劍)의 순서가 된다.  

    그런데 비파형동검은 한반도 중북부를 비롯한 중국 요동지역 지역에 있던 토착민과 중국으로부터의 1차 이주민 집단의 무기로 마한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2) 세형동검이 한국형 동검이었다는 점에서 처음에는 세형동검을 사용했다는 사실과 중국으로부터의 1차 선 이주민집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때 까지만 해도 삼한의 구분이 없었고, 이들이 후에 진한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비파형동검이 중국형 동검이라는 점에서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것이고, 따라서  BC 2세기경까지 중국에서 한반도로 2차 유이민의 유입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역사를 보면 토착민과 선 이주민집단 중 일부가 한반도 서남부로 내려와 마한을 이루고 진한이 생겨난다. 아마도 진한이 2차 유이민 이전에 세형동검을 사용하며 한반도에서 있었던 토착민과 1차 선 이주민집단일 것이다.      


 (4) BC 1세기경 철검이 유입되었다는 점에서 이주민의 3차 유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 북부와 남부에서 시작되어 이후 한반도 전역에 철기문화가 보급되는데, 여기서 어떻게 한반도 최남단 그것도 이미 마한' 진한이 형성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 한가운데 있는 지금의 변한 지역에 철기문화를 어떻게 전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결론은 해로(海路) 즉 낙동강 유역으로의 이동밖에는 답이 없는데, 당시 해로가 존재했음은 금관가야 시조인 수로왕의 왕후 허황옥(許黃玉, 32~189)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3. 삼한시대의 소국들


 한반도 삼한 시대에는 부여' 동예' 옥저' 이서국' 진한'  마한' 변한 등의 국가가 있는데, 종교정치 국가였는지 왕정 통치국가였는지 경계가 모호하다.      

 한국 역사학자들 중에 광개토왕 비문이나 부여융 묘지명을 들어 이서국·부여·고구려·옥저·동예 등을 삼한과 다르게 생각하는 견해를 보이고 있으나 잘못된 견해이다. 

 삼한과 이서국·부여·옥저·동예 등에 관련된 설화들이나 유물유적으로 미루어 보아, 이들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 모두가 삼한조선과 관련이 있는 고조선 나라의 토착민과 유민들이었다는 것이고, 신교를 믿었던 종교정치 국가였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현대 한국역사에서는 한반도를 서남부의 마한과 동남부의 진한과 중남부의 변한으로 나누고, 북부와 동부의 영덕에 이르는 동해안 지역의 북부여(고구려)·동부여·옥저·동예 등을 따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원래 한반도 중남부가 진한· 한반도 북부와 동부의 영덕에 이르는 동해안 지역이 마한이었다가, 후에 한반도 서남부에 백제가 세워지면서 북부와 중부와 서남부와 동부의 영덕에 이르는 동해안 지역이 마한이 되었고, 한반도 동남부가 진한이 되었으며, 그 뒤 한반도에 철검이 들어오면서 중남부가 변한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3세기 전반 마한 소국연맹체의 맹주가 목지국(삼국지에는 월지국(月支國)으로 되어 있음)의 진왕(辰王)이었다는 점과 마한을 통치한 백제가 북부여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고, BC 2세기경까지 한반도 중남부에서 세형동검이 발견되었고, 한반도 중북부에서는 비파형동검이 발견되었으며, BC 1세기경 변한 지역에서 철검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1) 부여(扶餘)


 부여는 중국 동북 지방과 두만강유역에 존재했던 예맥족의 고대 왕조 국가로서 존속기간은 고조선 후기(BC 202년)와 삼국시대 전반(AD 8년)에 걸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부여는 해씨 일족의 나라로서 북부여를 건국한 부여의 시조이나 동시에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의 아버지 해모수를 통하여 고조선과 연결된다. 

 삼국유사 왕력(王歷)편의 내용을 보면“제1대 동명왕(東明王), 갑신년(BC 37년)에 즉위하여 18년 동안 다스렸다. 성은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인데 추몽(鄒蒙)이라고도 한다. 단군(壇君)의 아들이다(第一東明王 甲申立 理十八 姓高 名朱蒙 一作鄒蒙 壇君之子).”고 하여 고조선과도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나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서는 북부여(고구려)˙동부여˙졸본부여˙갈사부여˙남부여 등 다양한 부여 국가가 존재한다. 북부여가 고구려가 되는데, 북부여로부터 후에 백제가 건국되는 것을 보면 마한(馬韓)에 속한 소국으로 판단된다.      


(2) 동예(東濊)


 동예는 BC 82년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오늘날의 함경남도 남부 원산 부근에서 강원도 강릉시, 경상북도 영덕군에 이르기까지 동해안 지역에 넓게 퍼져 있었던 부족사회 집단이다.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옥저, 남쪽으로는 진한에 접해 있었다.

 동예는 스스로 고구려와 같은 족속이라고 생각하여 실제로 의복만 약간 달랐을 뿐, 풍속과 언어는 고구려와 같았다. 따라서 삼한 중에서 마한(馬韓)에 속한 부족국가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3) 옥저(沃沮)


 옥저는 늦어도 BC 3세기 이전부터 기원후 285년까지 한반도에 있었던 부족 국가 집단으로서 남옥저와 동옥저와 북옥저가 존재했다. 

 북쪽으로는 고구려, 남쪽으로는 진한, 동남쪽으로는 동예에 접했다. 위치했던 장소로 미루어 마한(馬韓)에 속한 삼한의 소국이었다고 추측된다.    


(4) 진한(辰韓)


 진한은 마한, 변한과 더불어 고조선 이후에 생긴 삼한 중의 하나이다.    

  

 고조선 초기에는 신한(神韓)이라고도 하였고 한자를 다르게 써서 진한(秦韓)이라고도 불렀는데,  진국으로부터 발전한 사로국(斯盧國)' 기저국(己柢國)' 불사국(不斯國)' 난미리미동국' 근기국(勤耆國)' 염해국(冉奚國)' 군미국(軍彌國)' 여담국(如湛國)' 호로국(戶路國)' 주선국(州鮮國)' 마연국(馬延國)' 우유국(優由國)의 12개의 부족국가로 이루어진 나라이다.          


이 중 사로국이 신라( BC 57년)의 전신으로 후에 모두 사로국에 복속되었다.      


(5) 마한(馬韓)


 마한은 진한, 변한과 더불어 고조선 이후에 생긴 삼한 중의 하나이다. 진국으로부터 발전한 54개의 부족 국가로 이루어진 나라로 삼한 중에 가장 세력이 컸다.  


 마한은 " 감해국(感奚國)·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건마국(乾馬國)·고랍국(古臘國)·고리국(古離國)·고비리국(古卑離國)·고원국(古爰國)·고탄자국(古誕者國)·고포국(古蒲國)·구로국(狗盧國)·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구소국(狗素國)·구해국(狗奚國)·내비리국(內卑離國)·노람국(怒藍國)·대석삭국(大石索國)·막로국(莫盧國)·만로국(萬盧國)·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모수국(牟水國)·목지국(目支國)·백제국(伯濟國)·벽비리국(辟卑離國)·불미국(不彌國)·불사분사국(不斯濆邪國) ·불운국(不雲國)·비리국(卑離國)·비미국(卑彌國)·사로국(駟盧國)·상외국(桑外國)·소석삭국(小石索國)·소위건국(素謂乾國)·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신분활국(臣濆活國)·신소도국(臣蘇塗國)·신운신국(臣雲新國)·신흔국(臣釁國)·아림국(兒林國)·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염로국(冉路國) ·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원양국(爰襄國)·원지국(爰池國)·일난국(一難國)·일리국(一離國)·일화국(日華國)·임소반국(臨素半國)·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지반국(支半國)·지침국(支侵國)·첩로국(捷盧國)·초리국(楚離國)·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치리국국(致利鞠國)" 의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있다. 


 마한 소국들의 부족국가 위치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며, 진한처럼 국가 이름과 비슷한 음원을 찾아 지역을 비정하고 있을 뿐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경상도 지역에서 낙동강 동쪽 대부분의 지역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BC 4세기경 백제국에 병합되었고, BC 18년경 온조에 의해 백제가 세워졌다는 사실만 밝혀져 있다. 한국사에서 마한 지역을 대체로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방에 걸쳐 분포한 54개의 소국을 가리킨다고 비정하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를 근거로 한 것이다. 

 다만 전술했듯이 북부여(고구려)˙동부여˙졸본부여˙갈사부여˙남부여의 부여족과 동예' 옥저 역시 마한에 포함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6) 변한(弁韓)


  변한은 진한, 마한과 더불어 고조선 이후에 생긴 삼한 중의 하나이다. 진국으로부터 발전한 12개의 부족 국가로 이루어진 나라로 삼한 중에 가장 세력이 가장 약했다.           


  변한에는 "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접도국(接塗國)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고순시국(古淳是國)' 반로국(半路國)' 낙노국(樂奴國)'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감로국(甘路國)' 구야국(狗邪國)' 주조마국(走漕馬國)' 안야국(安邪國), 독로국(瀆盧國)이 있다. "의  12개 소국이 있었다. 

  초기에는 금관가야(구야국)을 중심으로 한 변한으로부터 전기 가야연맹체가 생성되었다. 

 금관가야를 변진이라 표기하기도 하는데, 전술했던 허황옥의 설화에서도 보듯이 특징이 해상활동이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역사학에서는 변진을 변한과 진한을 합한 명칭이라 하기도 하고, 변진의 특징으로 진한과 변한 중에 해상활동이 두드러진 세력들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5세기 중엽에는 고령의 대가야국(加耶國)을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 연맹이 나타났다. 

대가야는 5세기 후반에 22개의 소국이 형성될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으며, 6세기에는 가야 북부의 대부분을 통괄하여 초기 고대 국가를 형성하기도 하였으나, 가야 전역을 통합하지 못하고 분열하였다. 그리하여 532년에 김해의 금관국(金官國)이 멸망하고, 562년에 고령의 대가야국이 신라에 멸망함으로써 나머지 가야 제국들도 모두 신라에 병합되었다.           


(7) 이서국(伊西國)


  이서국 혹은 이서고국 (伊西古國)은 경북 청도·거창지역에 있었는데, 산동(山東)과 산서(山西) 2개의 독립된 소별읍이 있었다고 하며, 역사나 고고학에서 중국 이주민들과의 관계는 밝혀진 바가 없다. 그러나 이서왕이 은왕봉에서 청도천을 따라 바다로 나가 일본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을 통하여 유추하면 일본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서국은 세 가지 특징이 있다. 

 ①  한반도의 북쪽과 서쪽에 위치했던 북부여·옥저·동예·백제 등 마한에 속했던 소국들의 남쪽에 있던 중국과는 거리가 먼 국가이다. 

 ② 낙동강 줄기를 따라 올라간 제일 상류 안쪽에서 진한·마한·변한의 접경지역에 있던 국가이다. 이서국이 서로는 마한 남으로는 변한 동으로는 진한을 접하여 삼한의 중심부였던 점으로 보아, 이서국의 국토는 그 영역이 훨씬 넓었을 수도 있다.

  ③ 역사에서 신라를 공격해 위험에 처하게 할 정도로 강한 나라로 기록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토경계와 문화 등 그 정체가 베일에 가려져 있는 신비로운 국가이다.         

  

 역사 이래로 한반도에 있었던 삼한 시대의 국가들은 모두 유물유적들이 즐비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이서국은 유물유적은 고사하고, 그 흔한 왕릉이나 성곽 하나도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남의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한 수의 고인돌들이 산재해 있어 강력한 부족국가의 존재를 확인해 주고 있으며, 특히 청도의 청동기 유적인 범곡리 고인돌군 등은 삼한 시대 청도지역의 읍락국가(邑落國家) 이서국(伊西國)을 성립시켰던 지배세력의 위세를 보여주는 유적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이서국은 특징으로 보아 마한과는 관계가 없었으며, 진한과 변한에 속하면서도 성격이 다른 국가로서, 굳이 분류하자면 변진(弁辰)에 해당된다. 이서고국 역시 은왕봉 전설에서 보듯이 남산을 통하여 청도천을 따라 밀양천을 거쳐 남해로 빠져나가는 요충지에 있어 해상활동을 통하여 중국이나 일본과 교류가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혼슈(本州) 미에현(三重縣) 동부 이세(伊勢)에 있는 태양을 상징하는 신을 모시는 이세신궁(伊勢神宮)의 토요우케 신을 씨족신으로 모시고 있는 소베씨(磯部氏) 집안의 후손들이 이서국을 고향으로 방문한 사실도 있다.  따라서 이서국이 삼한 중에서 가장 존재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때 신라를 위협하였다는 것은 육로가 막힌 상태에서 중국으로부터 유이민의 유입에 의한 철기문화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데,  어쩌면 금관가야보다는 이서국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변진에 해당할런지도 모른다.        


  

  한반도의 삼한 시대에는 두 개의 서로 상반되는 문화 상수가 있는데, 하나는 고인돌· 소도(천군)· 계절제라는 공통점이다. 다른 하나는 삼국시대라는 전제군주국가의 시작점이라는 것이다.  

 삼한시대의 고인돌· 소도(천군)· 계절제라는 공통점은 홍익인간의 민주정치 국가 고조선을 상징하는 단어인데, 삼한 시대의 소국들은 반대로 삼국시대의 전제군주국가로 이어지는 소읍국가로 권력 통치국가의 성격을 띄고 있다. 그래서 한반도에 정착하였던 삼한의 소국들은 고인돌· 소도(천군)· 계절제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치·경제·사회 면에서 서로 차이가 났고, 권력 통치국가의 성격 때문에 끊임없이 서로 다투었다.      


 역사를 통하여 살펴보면 삼한 시대의 권력 통치에 의한 내분의 결과로, 삼국시대 역시 신라에 의해 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의 약 650~7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 고구려·백제·신라와 가야가 끊임없이 서로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선량한 백성들을 희생시켰다. 이런 잔혹함은 한민족의 단결력을 약화시켜 고려 470여년의 역사를 몽고의 발굽아래 짓밟히게 했으며, 조선 500년의 당파싸움과 2,000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일어난 6·25동란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일어났던 숱한 이념분쟁과 정치폭력을 일으킨 나쁜 동력이 되었다.      


 고인돌· 소도(천군)· 계절제의 문화 상수가 담긴 개천절 노래 가사에서 단군의 명칭은 오직 하나의 아버지라는 의미의 ‘한아버지’인데, 전남·평북· 함남 지방의 사투리에서 할아버지에 상응하는 단어이다. 그런 단군이 산신이 되었다는 기록과 대한민국이 홍익인간을 건국이념으로 교육법에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 대한민국에 희망이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단군이 민족의 한아버지와 할아버지로 남아 있는 동안은 한국사회의 미래가 있다는 의미이고, 이 세상에 홍익인간이 존재하는 동안은 인류사회의 미래가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반대로 한국 역사에서 단군이 사라질 때 한국사회의 미래가 없어진다는 의미이고, 이 세상에서 홍익인간이 사라지는 순간에 인류사회의 미래가 없어진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의 본보기가 단군 한 아버지가 되는 세상,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의 본보기가 단군 한 아버지가 되는 세상, 이 세상의 모든 할아버지의 본보기가 단군 할아버지가 되는 세상, 그리하여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홍익인간이 되는 세상, 그런 세상이 신교의 홍익인간정치가 지향하는 의 민주정치 국가 즉 홍익인간의 지상천국이었다는 사실을 새겨 보아야겠다.            

         




해설단군신화(57) - 에필로그- 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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