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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람 Nov 24. 2023

홍익인간 전당 이야기 3

3-1. 소서노(召西奴) 전기 

 홍익인간 전당(弘益人間 殿堂)이야기는 세 번째 주인공으로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의 아내이자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의 어머니 소서노 명예의 전당에 올린다.       

 소서노는 한국 역사에서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그것도 가부장적인 사회 초기에서 두 개의 나라를 세운 역사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소서노(召西奴) 전기  

   

 내 이름은 소서노(召西奴)로, 나의 아버지 연타발은 거상(巨商)이었고,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나는 BC 67년에 태어났는데, 당시는 금와왕(金蛙王, 기원전 89년?~기원전 24년, 재위: 기원전 60년~기원전 24년)과 해모수의 아들 단군부루가 해부루(解夫婁)라는 이름으로 다스렸던 부여국 해씨(解氏) 왕족 시대였다. 

 당시는 중국 땅으로부터 한반도로 한민족의 이동이 계속된 혼란의 시기 말기였는데, 중국 한나라의 낙랑군과 현도군이 한민족의 남하를 막고 있는 가운데, 한반도는 먼저 이주한 사람들이 삼한의 소국을 이루어 마한·진한·변한으로 나누어져 살고 있었다. 

 금와왕과 단군부루의 명칭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우리 한민족들의 일부는 고조선의 종교였던 신교(神敎)를 믿으며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였고, 일부는 중국인들을 본 떠 가부장적인 혈족체제를 이루었으며, 당연히 스스로를 왕이나 단군이라 칭하면서 권력을 잡으려는 자들이 넘쳐났다.


 내가 어렸던 시절 사람들이 나를 공주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서열에서 밀린 왕족(王族)의 딸이었던 것 같은데, 내 이름의 노(奴)라는 한자와 어머니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는 말에서 알아챘겠지만, 내가 속한 왕가(王家) 사회는 남아선호사상으로 여성의 결혼이 아이를 낳는 도구나 인맥을 만드는 수단 정도로 하찮게 여겨지고, 부모가 하늘가 같다고 하면서 장가간 아들이 가주(家主)가 되어 어머니의 위에 서고, 심지어는 왕의 딸까지도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되어 외국 왕의 비로 멀리 보내지는 등 그야말로 여성이 노예 취급을 받는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인 사회였다. 

 이런 풍조는 신교를 믿었던 대부분의 민가에도 퍼져나가 아버지가 생계를 위하여 재물을 받고 딸을 기방(妓房)에 팔거나 시집보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나는 당시 여성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어린 나이에 우태(優台)와 정략 혼인하였다. 우태는 부여왕 해부루의 서손(庶孫)이었을 뿐 아니라 신교(神敎)를 믿고 있었기에 권력을 멀리하며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고, 나 역시 신분 차별과 빈부차별과 남녀 차별 없이 평등하게 서로 돕고 사는 삶을 추구하는 신교를 믿게 되었다. 

 우리는 정략혼인이었지만 하루하루를 보람차고 행복하게 살았고, 결혼하자마자 비류(沸流)를 낳았으나 남편 우태가 일찍 죽는 바람에 과부가 되어 다시 졸본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남편이 죽으면 시댁 귀신이 되어 살아야 하는 당시 풍습에서 아버지가 힘이 있어 친정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으니, 남편 잡아먹은 구박 덩이로 평생을 수절하며 사는 다른 여성들에 비하면 그나마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친정으로 돌아온 나는 아버지의 상단(商團) 일을 도왔고, 이때 신교도((神敎徒)들과의 인연과 신교의 연락망이 장사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당시 추모는 졸본왕의 왕녀 3명 중 차녀와 결혼했다가 졸본왕이 죽자 왕위 다툼을 벌이고 있었고, 왕위 다툼 과정에서 아내가 죽어 혼자가 되어 있었다. 나는 추모가 처음 졸본으로 와 우리 집의 문객(門客)이 되어 스스로 해모수와 단군 부루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세력을 키우고 있을 당시부터 아는 사이였는데, 아버지는 당시 나보다 8살이나 어렸던 추모가 범상치 않다고 늘 이야기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정략결혼(政略結婚)을 계획하고 나에게 그를 후원하라고 하였다. 나 역시 여성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고 있었기에 추모를 도와 내 꿈을 이루려는 생각에 아버지의 계획에 따랐다.   

 나는 집안의 많은 재물과 함께 신교의 연락망을 비밀연락망으로 이용해 추모가 북부여의 왕이 될 수 있도록 도왔고, 그러던 중 연인(戀人)이 되어 비류(沸流)를 가지게 되었는데, 과부가 되어 돌아온 시기와 임신한 시기가 워낙 짧아서 누구의 아이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결국 임신한 몸으로 그와 재혼(再婚)했고, 아버지의 계획대로 정략결혼에 성공해 비류를 낳았다.     


 BC 37년 나는 30세에 추모와의 사이에서 둘째 아들인 온조(溫祚)를 얻게 되었고, 그 해 추모는 22세의 나이로 동명왕이 되었는데, 왕이 된 후에도 나의 공적을 내세워 나를 극진히 아끼며 후하게 대접하였고, 친자식인 온조는 물론 우태의 아들일 수도 있는 비류까지도 친자식처럼 아꼈다. 

 나는 그 후 동명왕이 BC 33년 비류국을 정복하여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어 명실공히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불리며 창업의 기반을 다질 수 있도록 내조하였다. 동명왕은 다음 해인 BC 32년에 행인국과 북옥저를 정복하는 등 정복 전쟁을 계속하면서 변하였고,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삼한의 백성과 신교 교인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피를 흘렸으며, 이때 그의 창업을 도왔던 무골과 묵거는 신교신도들과 함께 있다 목숨을 잃고, 후에 재사도 궁을 떠났다.      


 BC 19년 4월 내 나이 48세 되던 때에 부여에서 아내 예씨가 낳은 친아들 유리가 예씨와 함께 찾아왔다. 유리는 칼을 내보이며 그것이 아들이라는 증거라고 했는데, 추모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을 꺼내어 합쳐 보니 이어져 하나의 칼이 되었다. 

 동명왕은 태도가 급변하여 유리를 태자로 임명해 후계자로 정하였다. 나의 배신감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신하들이 올린 “건국을 위해 공헌한 나와 두 아들을 보아서도 유리의 태자 즉위가 불가하다.”는 반대에도 아랑곳이 없었다. 

 당연히 내 두 아들은 굴러온 돌인 유리에게 차기 왕위를 빼앗겨 언제 버림받을지 모를 절망적인 신세가 되었고, 나는 자칫하면 예씨에게 왕후 자리를 넘겨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업친데 덥치는 격으로 같은 해 BC 19년 9월 유리가 태자로 즉위한 지 5개월 만에 동명왕이 40세로 승하하였고, 신하들은 나를 지지하는 온조파와 유리를 지지하는 유리파로 나누어져 대립하였다. 나는 아들 온조로 하여금 사당을 세우게 하여 왕위를 잇게 하려 하였으나, 유리의 편에선 협보에 의해 암투 끝에 유리가 왕이 되었고, 협보는 이 공으로 대보의 직위에 올랐다.     


 BC 18년(유리왕 2년) 7월 유리왕은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을 왕후로 삼아 세력을 공고히 하였고, 나는 49세의 나이에 더이상 고구려에 남아 있다가는 후일을 어떤 일을 당할지도 모를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나는 즉시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남하하였는데, 아버지를 도울 때 맺었던 인맥과 교인들의 도움으로 낙랑군 등의 한사군 지역을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당시 남쪽과 동쪽에는 마한과 진한이 자리 잡고 있어 앞을 막고 있었기에, 나는 두 아들과 함께 부아악(負兒嶽, 지금의 인수봉)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며 정착할 것을 찾았는데, 온조는 한강 쪽의 북쪽 땅이 나라를 세우기 좋다.”고 하고, 비류는 “미추홀이 좋겠다.”고 하였다. 

 나는 두 아들이 힘을 합치기를 원했으나. 신하들이 두 패로 나뉘어 다투는 바람에 이도 저도 할 수 없었다. 어쩔 수없이 나는 가져온 재물들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각각 뜻을 펼치라고 하였다. 


 결국 온조는 한강 북쪽에 도읍하여 십제(十濟)라 하였고, 비류는 미추홀 바닷가에 도읍하여 비류(沸流)라 하였다. 하지만 비류와 온조는 동명왕의 추격으로 마한과의 사이에서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나는 신교 교인들을 통해 마한을 설득했고, 당시까지도 신교의 유습을 지키고 있던 마한 왕의 배려로 비류와 온조는 모두 그 땅에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비류는 미추성(彌鄒城)을 쌓아 비류국(沸流國)을 세웠고, 온조는 위례성을 쌓아 십제(十濟)를 세웠다.  

 하지만 비류는 바다의 짠물 덕에 뭐 하나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백성들을 데리고 온조왕의 십제를 찾아왔다. 온조는 형의 백성들을 받아들이고 세력을 키운 후, 나라 이름을 십제에서 백제(百濟)로 바꾸었다. 이후 온조는 권력에 미쳐 날뛰었고. 이미 몰락했던 비류는 한 많은 여생을 보내다가 죽었다.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삼한을 떠돌며 신교를 포교하다, BC 6년(유리왕 8년, 온조왕 12년) 61세의 나이에 지병으로 궁으로 돌아와 죽음을 앞두고 있다. 

 나는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한으로 생각하며 평생을 살았고, 신교를 만나면서 그런 삶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동명왕과 두 아들을 도와 두 개의 나라를 세웠으나, 동명왕에게 버림받은 것은 물론 두 아들의 싸움을 지켜보아야 했으며, 결국은 큰아들의 한 맺힌 죽음을 보아야 했다. 

 생을 마감하는 이 순간 “만약 내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단 한 번만이라도 남녀가 평등한 세상에서 태어나 마음껏 꿈을 펼치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만이 염원으로 남아 있다.  




 - "소서노 전기 2 편 (환생 편)"에서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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