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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앤 Feb 14. 2022

마흔, 그 나이를 말하다

서른. 서른이란 나이를 '어른'이라 칭하기에는 애매한 나이다. 마흔이 넘어 되돌아보니 서른은 그럴 수밖에 없는 나이였음을 감으로 알겠다. 마흔 쯤 돼야 괜찮은 어른이 무엇인지, 스스로 도달해야 할 게 무엇인지 감이 오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까. 물론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마흔을 넘어 그 중간을 통과해 가고 있다. 

  



"언제부터가 어른인가요?"


내가 서른이라는 나이를 넘기면서부터 실은 이 궁금증이 나를 따라다녔다. 대답을 하며 산 게 아니었으니 내가 그 질문을 따라다닌 건 분명 아니다. 언제부터지? 서른다섯인가? 흠. 그럼 마흔은 좀 어울리겠군. 그렇게 치면 서른아홉에서 막 마흔 된 건데 억울하지 않을까? 마흔 중순이면 좀 그럴듯해 보이려나?


물론 '어른'이라는 단어를 동경해서 그런 건 아니다. 아, 진짜 아니다. 

내 나이에 걸맞게 잘 사는 걸까, 하는 자기 성찰이 주어졌을 때 오는 질문일 뿐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는 자연스럽게 그 '어른'이라는 단어가 나에게 어색한 단어가 아님을 알았다. 더하게는 스스로 나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샛별아, 이건 엄마 같은 어른이 쓰는 거란다."

"어른만 할 수 있어. 샛별이가 하기엔 너무 어렵지."


내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아이는 말한다.


"어, 그래. 어른아! 그럼 이거 해!"


가끔 어이없는 말에 다음 말을 까먹기도 하지만, 지금 내 아이는 한국 나이 다섯 살에서 여섯 살. 언어 흡수력이 높은 시기라 그럴만해서 넘기긴 한다. 

어쨌든 어느새 나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 말이 어색하거나 못 입는 옷, 꽉 쬐어 입은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어른'이라는 단어는 어떤 무거운 책임감이 뒤따라오는 말이다. 내가 뱉은 언어, 행동에 모든 책임이 나에게 달려있다는 그 엄청난 부담 말이다. 그게 어쩌면 더 나를 성숙하게 만드는 걸 수도 있겠다 싶다. 이십 대에 내가 엄마가 되었더라면 그 단어가 주는 무게를 그때 알았을까? 아니면 비로소 삼십 대에? 이분법적으로 똑 떨어지게 계산이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나도 알고 있다. 

모두가 사십 대가 되어서 깨닫는 건 아닐 테니까. 적어도 많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그 무엇이 있다는 말을 나는 하고픈 거다. 그래 그거다. 

인간은 똑똑하기도 하지만 그 뒤에 엄청난 바보스러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진득하게 모든 것이 대체적으로 알아지는 나이는 그래도 마흔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그 애매한 서른, 삼십 대를 지나 마흔이 된다. 이미 지난 사람도 있고 아직 오지 않은 마흔을 째려보며, 못 볼 걸 본 듯 손사래를 치는 사람도 있다. 


"내가 어렸을 때 내 소원이 뭐였는지 알아요?"

"뭐였는데요?"

"마흔이 되면 죽는 거요!"

"...... 뭐라고요?..... 에?...... 지금 마흔 넘었잖아요!"


맙소사! 얼마 전 지인과 나누던 대화였는데, 순간 아, 하며 내 머릿속을 부정하고 싶지만, 공감 같은 사과 덩어리 하나가 툭 얹어지는 걸 느꼈다. 


"나, 그거 뭔지 아는 거 같아요."


모기가 기어가는 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알아 들었거나 말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는 척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알았다. 나도 오래전 생각해보니 그랬다. 나도 역시 마흔이 나에게 오지 않는 까마득한 일이라 생각했었고, 만약에 아주 만약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더는 살고 싶지 않을 나이였다. 마흔 그리고 쉰. 오 마이 갓! 할머니가 되느니 차라리 입에 칼을 물고 죽겠어!

왜 그때는 이렇게나 젊디 젊은(?) 마흔이 오래된 사람처럼 느껴졌을까. 아무래도 그때는 일흔이면 매우 늙은 나이에 속했고, 서른만 되어도 아줌마, 아저씨였으니 그럴만했다고 치자.

요즘은 우리 아들 나이 정도에는 엄마가 이제 마흔을 막 넘긴 사람이 많을 테다. 나만 늦는 그런 나이가 아님을 힘주어 말하며 말이다. 


아무튼 마흔에 도달해보고나니 별거 아니다. 세상이 무너지지도 않았고, 이상한 마법에 걸려 몰골이 흉측해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죽어야 할 만큼 최악인 나날도 없다. 그런 날은 이미 지나갔다. 나약해서 이리저리 헤매던 날들은 스물과 서른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더더더 많았다. 이제는 그걸 경험 삼아 디딤돌 하나가 자박자박한 물가에 하나 놓인 셈이다. 아무래도 그 재미가 아닐까. 단단하게 놓아진 디딤돌을 의지 삼아 한 발 한 발 걸어보는. 그렇게 보면 마흔은 이제서 재미 들린 나이다. 


아, 마흔이 그런 거였어?라고 무릎을 탁 치는 독자라면, 삼십 대라는 인생을 더 잘 흔들리며 방황하며 헤아리며 살고 싶은 마음이 들 거다. 그거면 되었다. 나는 그저 한 사람이라도 그런 진정성으로 나의 글을 읽어주길 바랄 뿐이다. 나 또한 진심의 마음으로 이 글을 완성해 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덧붙이는 말: 그렇다고 마흔이 온전히 든든한 나이를 말하는 건 아니다. 역시나 흔들린다. 그러나 알아챈다는 건 모를 때와는 정반대의 의미를 낳는다. 그래서 '디딤돌 수십 개'라고 말하지 않고 '디딤돌 하나'라는 표현을 썼다. 이제 더 놓아야 할 디딤돌은 수월할 거라는 믿음은 있다. 그래서 두 번째 스무 살은 마흔에 시작되나 보다. 





마흔에 대한 책을 쓰려고 준비 중입니다. 

부디 나의 노력이 나를 조금 더 성장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잘 될 거라는 믿음도 내 안에 있습니다. 그 마음을 함께 응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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