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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앤 Feb 15. 2022

스물네 살의 할머니가 키스를 하면


 애늙은이라는 말이 있다.


 제목을 보고 뭐지? 했다가 바로 나의 첫 문장에 긴장이 사정없이 풀리는 기분일 거다.

 

스물네 살인 여자는 자신의 할머니에 대해 상당한 미련(이걸 그렇게 표현해도 좋다면 말이다.)을 가진 감수성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자기는 할머니일지 모른다는. 그 말을 듣고 키스를 한 상대는 자신이 스물네 살의 할머니와 키스를 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어쩜 저리 창의적인 말을 할 수 있을까.


 실제 남녀가 나눈 사실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다. 비행기 안에서 몇 백 년 만에 보는 영화! 기내 미디어 서비스로부터 오래전 보았던 <비포 선라이즈>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몇 시간 동안 그 영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나는 주인공 여자인 셀린이 되어 있었다.


 남녀 커플 한 쌍이 3년 내지 4년간 아니 어쩌면 결혼하고도 서로를 잘 몰라 걷 돌며 싸우는 3년 내지 4년일 수도 있겠다. 그런 세월을 여행 중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이틀 만에(영화로는 두 시간 만에) 보여주다니. 살면서 두고두고 알 서로의 그런 감정들을 말이다. 눈빛, 사랑, 이끌림, 관심, 이질감, 다른 의견차, 의아함, 질문, 바라봄, 수긍, 다가감, 이해, 노력, 인정 등 많은 감정이 그 안에 수록되어 있는 걸 알 수 있다. 한 편의 고전적이며 우아한 오케스트라의 클래식을 소리 죽여 보고 난 후의 감정이랄까.

 

 그녀는 정말로 이십 대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얼마든지 성숙한 이십 대는 많은데 아니 그런 편견을?' 하며 눈을 흘기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맞다. 적어도 나의 이십 대는 서툴 뿐이었다. 서툴고 낯선 시간들을 지나왔기에 이제야 이해가 되는 나이가 되었다.


 누군가 "다시 스무 살, 그때로 돌아갈래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넵!" 하고 시원스레 대답할 마음이 추호도 없다. 있다가 아니라 없다. 정말 없다.


 "나이 드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요."


 어느 모임에선가 나는 불쑥, 그렇게 불쑥 이 말을 내던졌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온갖 질문을 다다다 받았다.


 "왜요?"

 "뭐가요?"


 그런데 나는 "어..."라며 머릿속을 정리하는 순간, 기다림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들 사이에서 희미하게 나의 말은 사라졌다. 그게 두고두고 아쉽다. 시원스럽고 빠르게 내 진심을 전하지 못한 게 못내 억울할 정도다.


 오프라 윈프리의 책을 읽다가 "당신이 확실히 아는 건 뭔가요?"라는 어느 진행자의 말에 머뭇거리다 지나가버린 사건에 대해 아쉬워하는 내용을 보고 적극 공감했다. 그녀는 그래서 <확실히 아는 것들>이라는 책을 결국에는 내고야 말았다고. 그녀도 내 기분이었겠구나.

 

 나도 상상했다. 나이 들수록 무엇이 더 좋은지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을 내는 즐거운 상상을 말이다.


 스무 살은 눈이 부시도록 예쁘고 아름답다. 아련한 핑크빛의 작약 몽우리가 웅크렸던 기지개 켜듯 크아악 피는 그 순간이라고 표현하면 좀 비슷할까. 글씨로 그 스무 살을 가둔다는 게 오히려 죄같이 느껴질 정도로 어여쁜. 그러나 정작 스무 살인 그들은 모른다. 오죽하면 서울대 김난도 교수가 '청춘'이라는 말을 그 나이 때에 주기에 너무 아까운 나이라고 할까.(물론 스무 살이 다 그런 건 아니더라도)


 '그들'은 청춘이 그저 아플 뿐일 거다. 나도 그랬으니까. 예쁘다, 예쁘다, 하지만 나는 사랑이 아프고, 내 진로가 아프고, 내 공부가 의심스럽고, 내 미래가 불안했다. 아무것도 남긴 것 없이 우물대다 지나간 자리가 아팠고, 앞으로는 채울 그 무엇도 없는 것 같아 서성거렸다. 이십 대는 그렇게 지나갔다. 


 서른은 자신이 무엇을 향해 가야 할지 조금 아주 조금 아는 나이다. 그러나 여전히 흔들리는 청춘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길지 않다. 누군가는 깊은 배신의 아픔이 지나가기도 하고,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몸소 깨닫기도 한다. 자신이 준 것만큼 되돌아오지 않아 세상을 향해 소리치는 나이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열심히 방향을 찾아 똬리를 틀고 헤헤 웃는 나이이기도 하겠지. 그 간격은 점점 더 멀어지고 혐오 아니면 질투가 오갈 나이이겠지. 그럼 나는? 나는 무얼 했게? 나는 세상이 그저 그렇게 끝나버리는 줄 알았다. 나 또한 애매한 인간으로서 한 것 없이 무대 뒤로 사라지고 마는. 서른 초반에는 내내 이십 대를 질투했다. 시들어져 가는 꽃인 것 같아 내내 피어나는 꽃만 노려보고 살았다. 그리고 나의 신앙이 나를 겨우 살렸다.


 마흔이 되고 보니 오히려 나는 안정적인 나 자신을 발견했다. 물질적으로라기보다 정신적으로 평온함이 더 많아졌다. 온전한 건 아니지만(아, 그러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결코 인간은 온전할 수는 없다. 아마도 평생은) 이처럼 괜찮은 나날은 없다는 거다. 하루라는 시간 속에 육아로 전쟁을 치르며 살더라도 나는 이삼십 대로 돌아갈 마음이 없다.

 

 얼마나 방황하며 이루어 놓은 마흔이던가. 육아도 마찬가지다. 늦둥이를 보게 되니 이보다 더 큰 이력이 내게 없다. 나도 엄마라고, 한없이 형편없다 해도 엄마라고 소리치며 가는 인생이랄까.

 

 스물네 살의 할머니가 키스를 하면, 정말 어떤 기분일까. 마흔여섯 살의 아줌마는 놀라 자빠지겠지. 그래도 마흔이 좋은 건 그 꿈에 조금씩 다가갔다는 게 아닐까. '할머니'가 스무 살에 꾼 꿈이라면 말이지. 누군가는 이 말을 한참 생각할 테지. 또 누군가는 아, 다 귀찮아.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러겠지.


 어쨌거나 인생은 당신이 이 활자를 읽고 있어도 그렇지 않아도 흘러갈 테다. 단, 나이를 학대하지 말고 나 자신으로 보듬어 살면 즐거운 것을 말이다. 마흔이 되어서야 비로소 온몸으로 느끼며 사는 이야기, 한 번 들어보시라. 


마지막으로 영화 속 셀린의 대사로 끝을 맺어 본다.


"결국 우리가 살면서 하는 모든 일들은, 조금이라도 더 사랑받기 위한 노력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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