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어려움의 광야를 홀로 걸어간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나에게도 있었다. 광야 같은 날들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외로움의 시간은 불안을 더했다. 그걸 불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뱉어보지 못한 말. 그러나 나는 불행하지는 않았다. 나를 일으킬 수 있는 나만의 에너지가 나에게는 있었다. 어쩌면 나를 단단히 하는데 이 고난이 나를 기다린 건지도 몰랐다.
‘발견하다'라는 문장이 나는 참 좋다. 예를 들면, 고아가 길가에 ‘버려졌다'는 표현은 쓰지 않는단다. 그 자리에는 조금 더 창의적인 동사로 누군가에게 발견되어진 아이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나 또한 나를 발견하며 산다. 그 ‘누군가가'는 그저 ‘나 자신'이 될 뿐이다.
사람들은 남을 정의 내리기 좋아한다. 가장 최악의 정의는 부모가 아이에게 내리는 형벌 같은 정의다.
“너는 애가 되바라져서 말버릇이 늘 그렇지!”
“그것도 못하면서 뭘 한다고 으이그!”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 커서 뭐가 되려고 참"
마흔을 넘긴 사람들에게는 어린 시절 이런 말을 부모에게 듣고 자란 사람이 많다,에 한 표를 건다. 그 시대에는 이런 말이 최악이 될 줄 몰랐을 것이다. 자식이 큰 지금 이런 대화가 아직도 오간다면 문제가 상당하겠지만 아직도 드라마에서는 이런 존중을 벗어난 말이 종종 오간다. 어렸을 때 들었던 익숙한 말을 마음에서 밀어내는 일을 하며 어리고 미숙한 나를 안아주는 일은 매우 소중하다. 미처 몰랐던 무의식의 슬픈 단어 하나를 제자리에 정리시키는 일이다. 내면아이는 발견되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알레스 인 올드 눙’ 의 마음이 자리 잡는다.
유시민의 책에는 독일인의 특성에 대해서 나온다. Alles in Ordnung “알레스 인 올드 눙"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고 아무 문제없다. 아무 문제없다. 영어에서도 미국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이 있다. “No problem” 문제가 있어도 문제가 없노라며 의기양양하게 외치는 말이다. 백인을 남편으로 둔 지인이 있다 남편의 뒷담화를 할 때면 늘 하는 말이 있다.
“사람들 앞에서 노 프라블럼 이러면서 웃고 있는 거야! 그래서 수술한 자리가 진짜 괜찮은가보다 했지. 그런데 집에 와서 나한테 아프다고 있는 투정 없는 투정 다 부리더라고. 보면 늘 그래. 사람들 앞에서 뭐 다 괜찮대! 아임 베리 파인! 노 프라블럼!”
옆에 있던 모든 사람은 웃었지만, 사실 우리 모두의 인생이 사람들 앞에서는 괜찮을 뿐이라는 걸 안다. 속속들이 정리되지 않은 불안의 삶을 하나쯤은 갖고 사니까. 그러나 나 자신은 내면을 발견할 필요가 있으며 그 마음을 토닥일 권리를 갖기에 행복은 내가 만드는 단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