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Bennett

by 리앤

아버지를 떠나보낸 지 몇 해가 지났다. 시간이 흘러도 그의 목소리와 손끝의 온도는 잊히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익숙한 메일함에 낯선 영어가 도착했다.


이름만으로는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마지막 성이 눈에 들어왔다. Bennett. 짐의 성이다. 발신자는 수잔 베넷. 가늘고 긴 호흡을 내쉰 뒤, 메일을 열었다.


“Dear Yoon,

I am Susan Bennett, daughter of Jim Bennett, Both of my parents have now passed away, but I wanted to let you know that the day you visited our home years ago brought them great joy.

That day has always remained in their hearts.”


내 시선이 ‘Pass away’ 에 멈췄다. ‘멀리 지나가버리다, 저편으로 건너가다.’ 죽음을 완곡하게 부르는 말.


누구에게나 오는 일이건만, 배꼽 아래 깊은 곳에서부터 통증이 올라왔다. 두 눈은 금세 눈물로 차 이메일을 읽기가 힘들어졌다. 패쓰 어웨이. 아버지도, 짐도, 그의 아내도. 모두 멀리 지나가버렸다.


메일에는 사진 한 장이 함께였다. 붉은 벽돌집, 낡은 난간, 노란 카디건을 입고 웃는 아내, 그 옆에서 손을 난간에 올려둔 짐. 세월이 묻어나는 장면이었다. 나는 잠시 화면을 응시했다. 그날 저녁, 미국 집 식탁 위로 떨어지던 작은 빛과 웃음이 다시 떠올랐다.


하얗게 센 머리칼, 눈썹까지 희던 짐. 그의 아내. 그리고 나. 모두가 함께였던 시간. 이제 그 집도, 그 식탁도, 모두 사라졌지만, 그 환대는 여전히 내 안에서 살아 있었다. 그때의 공기를 기억하는 이가 이제 나뿐이라는 사실이 아팠다.


그들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아빠, 작은 집으로 이사하지 그래요, 여긴 관리도 힘들잖아요.”

“나는 네 엄마와 평생을 이 집에서 살았다. 죽어도 여기서 죽고 싶구나.” 둥근 식탁에서 오갔을 그 대화를, 나는 상상했다.


“이런! 여기서 죽겠다던 내 고집이 너를 만나게 했구나.” 그 날 저녁, 짐은 누런빛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이내 아내도 따라 웃었다. 그 웃음이 내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이미 15년 전의 일이다.


수잔은 내가 다녀간 후에도 여러 번 아버지와 나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했다.

“나는 젊었을 적 한국전쟁에서 소년 하나를 알게되고, 그 아이를 데려오려 했단다. 그랬으면, 네 오빠가 되었으려나?” 그의 하얀 눈썹이 치켜올려지며, 고백하듯 건넸을 그 말이 눈에 선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그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어요.” 수잔은 이메일에 그렇게 썼다. 나도 나의 아버지의 작고를 알리지 않았다. 그것이 서로에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같은 순간에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내가 미국 연수를 가던 해부터 종종 소년이 되어 “짐! 엉클 짐!”하고 혼잣말을 하곤 했다.


“누구세요? 이렇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연수를 다녀와 짐 아저씨가 아버지를 그리워한다고 하자, 빙그레 소년 같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날, 둥근 식탁 위에는 따뜻한 감자요리와 샐러드, 그리고 얇게 썬 햄이 놓여 있었다. 식감도, 풍미도 좋았다. 짐은 이런 아내의 음식을 쉰 해는 족히 먹어 왔을 것이다. 한국전쟁 때를 제외하면. 하얀 접시 위의 햄 조각을 포크로 집어 들며 문득 생각했다. 아버지의 선택은 옳았을까.


밤이 깊었다며 그들은 나를 붙잡아, 기어이 와인을 따라주었다. 그날 밤, 그들의 집 이층 방에서,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도 까무룩한 잠을 자고 아침을 맞았다.


아버지에게 그 집은 그리움이었을까. 후회였을까. 그리움이 너무 깊으면, 결국 후회가 되는 걸까. 나는 아버지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들어가, 그 소년의 눈으로 짐을 바라보았다. 내게도 그는 언제나 “미스터 짐” 아니 엉클 짐이었다.


"혹시 한국전쟁에 참여하신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윤영수의 딸입니다." 내 영어는 서툴렀지만 또렷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자, 그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눈은 흔들리고, 고르지 않은 숨을 쉬고 있었다.그러고 나서야 천천히 “영수! 영수! 오, 영수!” 하며 아버지의 이름을 여러 번 반복했다. 그의 눈빛 속에서, 나는 영수가 되었다. 쪼글쪼글한 손길이 내 얼굴을 가만히 감쌌다. 거칠고 메마른 손. 젊은 날, 그 손으로 아버지에게 초콜릿과 껌을 건네던 모습이 겹쳐졌다.


나는 눈을 감았다. 오래전, 한국전쟁 당시 짐이 아버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자, 가자. 내가 있는 곳으로 가자. 고 투게더! 내가 너를 돌보아줄게. 약속해!”


이메일을 그대로 켜둔 채, 나는 창밖으로 해가 넘어가는 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날의 빛이 내안으로 스며들었다. 오래전의 기억이 다시 내 안을 밝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