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살아남은 자의 오후

전쟁의 그림자 아래, 평온한 오후

by 리앤

가끔 그날의 오후를 떠올렸다. 엄마가 아직 살아 계시던 마지막 가을이었다. 햇살은 키 큰 나무들 사이로 길게 뻗어 땅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바람은 적당히 시원했고,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엄마의 짧은 단발은 바람결에 따라 살짝살짝 흩날렸다. 그걸 즐기느라 감은 두 눈은 잠시 소녀 같았다. 그런 엄마 곁에서 아버지는 느닷없이 끔찍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저기 저 나무 밑에도 시체가 묻혀 있었어."


엄마는 눈을 번쩍 떴다. 아버지의 얼굴과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상황을 가늠한 듯 담담히 일어섰다. "딸, 화장실 안갈래?" 나는 권태에 지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 상태로 아버지를 그대로 둔다면, 그것도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 딸내미랑 잠깐 데이트 좀 하고 있어." 그 말은, 아버지를 부탁해라는 다른 말이었다. 엄마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며 사라졌다. 바람에 날리는 낙엽 소리 사이로 그녀의 발소리가 천천히 멀어졌다. 엄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쯤 나혼자 중얼거렸다.

'사라진다고 더 좋은 건 아닌데.'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오래 잠겨 있던 전쟁 이야기가 불쑥 흘러나왔다.


"그땐 다 죽은 줄 알았지. 눈앞에서 다 쓰러졌거든." 아버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묘하게 또렷했다.

"총알이 머리 위를 스쳐갔어. 바로 옆에 있던 녀석이 쓰러졌는데..." 말끝이 멎었다. 낙엽이 바람에 부딪혀 나뭇잎끼리 긁히는 소리만 남았다. 아버지의 눈은 그때의 공기를 다시 보고 있는 듯, 초점을 잃었다.


나는 말없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려움과 안도, 공포와 무감정이 한데 섞인 표정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막사를 뛰어다니며 함께 웃던 또래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초콜릿 한 조각을 크래커와 바꿔 먹던 녀석이었을까. 아버지의 이야기는 처음도 없고 끝도 없었다. 그러나 그 조각난 이야기 속에는 분명히, 그가 살아낸 시간의 냄새가 묻어 있었다.


"그날 밤, 막사 천장이 흔들릴 정도로 굉장한 폭음이었어. 항만 쪽이었나... 아니, 막사 쪽이었지. 불덩이가 솟구치더라. 하늘이 다 붉었지."

미군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녔고, 그 틈에 아버지는 철모를 뒤집어썼다고 했다. 누가 폭격한 건지, 어디가 맞은 건지 아무도 몰랐다. 다만, 그 소리만으로 알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그럼 그때가 51년도였어요?" 내 물음에 아버지는 고개를 갸웃했다. "51년이던가, 52년이던가. 잘 모르겠네." 그의 시간은 숫자로는 기억되지 않았다. 불빛과 냄새, 소리로만 남아 있었다.


"시체를 가득 실은 트럭이 막 지나가. 그걸 바다 쪽으로 몰고 가서 태우는거야. 그 냄새가 아직도 다 배었어."

아버지는 자신의 옷깃을 코 가까이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그 표정이 너무 진지해, 나까지도 숨을 죽였다.

"사람 목소리가 제일 무서웠어. 울고, 부르고, 욕하고, 살려달라 외치던 소리. 그게 다, 살고 싶다는 소리였지."

그 순간, 허공을 가르는 낮고 무거운 윙윙 소리가 들렸다. 늦게 깨어난 말벌 한 마리가 느릿하게 날아갔다. 나는 순간 그것이 총알의 잔향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도, 그 소리를 따라 눈길을 멀리 보냈다.


그때 엄마가 종이컵 두 개를 들고 천천히 다가왔다. "오늘 같은 날은 따뜻한 게 최고지." 엄마의 명랑한 목소리가 공원의 정적을 깨웠다. 나에게 내민 건 에스프레소향이 그윽한 라떼였고, 아버지는 미숫가루맛이 나는 오곡라떼였다. 그런데 두 잔뿐이었다.


"엄마는?"

"나는 딸 먹다 좀 달라하지."


엄마의 대수롭지 않은 말이 불편했다. 얼른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밀었다.

"내가 안 먹고 주면, 엄마 서운할까 봐."

"먹을 만큼 다 마시고 달라니까."


그 말에 괜히 가슴이 욱했다.

"이깟 게 얼마나 한다고!"

소리치고 나서야, 내 목소리가 너무 크게 울려 퍼졌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낙엽이 두두두 하며 바람에 쓸려다니는 소리만 들렸다.


아버지는 모녀 사이에 끼어 먼 하늘만 바라보다가, 방금 했던 전쟁 이야기의 끝자락을 잇듯 말했다.

"그래도 살아남은 건... 다 이유가 있더라."


그 말이 공기 중에 오래 남았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흩어지는 오후, 나는 종이컵을 꼭 쥔 채 고개를 숙였다. 살아남은 자의 무게가, 그제야 실감 났다.


햇살이 사그라지고 공원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질 무렵, 아버지는 말없이 주머니에서 낡은 지갑을 꺼냈다. 가죽은 닳아 있었고, 가장자리는 손때로 반들거렸다. 지갑 속에는 오래 접힌 종이 한 장이 있었다. 모서리가 닳아 글씨가 거의 지워졌지만, 가운데엔 또렷이 이름 하나가 남아 있었다. Jim Bennett. 그 아래로 흐릿한 주소 몇 줄이 보였다.


“이건... 엉클 짐이 준거야.”
아버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마치 그 이름 속에서 누군가를 다시 불러내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그 종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마음속 어딘가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이름 하나가, 시간의 무게를 견디며 아직 아버지 안에 살아 있구나 생각했다. 아버지의 전쟁 기억 한가운데에는, 짐이라는 이름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엄마는 일부러 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해도 이제 지는데, 우리 가자." 아버지는 그 종이를 다시 접어 지갑 속에 넣고는, 조용히 미소를 보였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않았다. 그 장면은 오래된 필름처럼 내 안에서 계속 재생되었다. 햇살, 바람, 그리고 엄마의 짧은 머리카락까지. 지금도 가끔, 그 공원 앞을 지나면 낙엽 사이로 그날의 빛이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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