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바람이 지나간 자리

잊힌 주소, 남은 자리

by 리앤

엄마가 떠난 뒤, 오래 비워진 아버지의 방문을 열었다. 눅눅한 먼지 냄새와 함께, 오래 머문 사람의 체온 같은 공기가 흘러나왔다. 침대 맡에는 평소 쓰던 바세린과, 오래된 알람시계가 여전히 시간을 맞추고 있었다. 째깍째깍.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앉았던 의자엔, 구겨진 셔츠 자락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마치 잠시 자리만 비운 사람처럼.


우선 먼지가 쌓인 블라인드부터 올렸다. 아버지가 늘 보아왔을 창밖의 풍경은 이미 울긋불긋 가을로 넘어가고 있었다. 창문을 활짝 여니 찬기운이 훅 끼쳐 들어왔다. 먼지를 털며 정리를 시작했다. 요양병원에 누워 있는 아버지는 이제 말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주인이 방을 떠난 대부분의 물건들은 제자리에 반듯이 놓여 있었다. 아버지처럼 단정하고 깨끗했다.


부모님이 살았던 그리고 어릴 적 내가 살았던 정릉동 집으로 돌아온 건, 한 해 전이었다. 남편은 여전히 지방에서 일했고, 주말이면 잠깐 들렀다 가곤 했다. 아이의 등굣길과 시장의 오전 소음만이, 이 집이 아직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낮에는 햇살이 거실을 지나 안방까지 닿고, 오후엔 그 빛이 천천히 사라졌다. 벽의 그림자 길이가 하루의 남은 시간을 알려주듯, 집은 묵묵히 계절을 견디고 있었다. 나는 인문학 강의를 계속했다. 타인의 이야기를 가르치며 사는 나는 내 적성에도 딱 맞는 일이라 생각하며 계속 아이와 이곳에 남기로 했다. 초겨울이 시작되는 11월엔 단기 해외 연수도 잡혀 있었다. 미국 동부의 작은 대학에서 열리는 '기억과 인간 회복력에 대한 인문학 워크숍'이었다.


아버지가 요양원으로 옮긴 뒤, 계절이 바뀌며 옷이 필요했다. 이참에 방도 정리하기로 했다. 옷장 속 낡은 셔츠들도 죄다 꺼내어 분류했다. 날씨가 추워지니 카디건도 필요했고, 겨울을 위한 스웨터도 가져가야 했다. 옷이 낡아 구멍이 난 것도 있었고, 색이 바랜 것도 많았다. 여름옷은 따로 박스에 담아두고, 버릴 것은 종이봉투에 넘치도록 담았다. 입을 것을 분류하니 옷도 얼마 되지 않았다. 지난 해 내가 사 준 셔츠는 텍도 떼지 않은 채 가지런히 접혀져 있었다. 그걸 보니 괜히 속이 쓰렸다. 그때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아이고~ 엿 바꿔먹을라고 여기 뒀나? 엿을 트럭으로 주겠네!" 옷을 살땐, 아버지가 그걸 입고 마실도 가고 밥도 먹고 하는 걸 상상했다. 나무 냄새나는 오래된 서랍 안에 얌점히 들어앉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입을 옷들은 미리 빨아두고 요양원으로 가져가면 되었다. 은근히 할 일이 많았다. 버릴 것들을 현관 앞에 내려놓는 순간, 찬 바람이 스며들었다. 고개를 드니 늘 보던 감나무 한 그루가 고즈넉히 서있었다.


"열매 맺느라 힘든가 봐. 한 해씩 빼고 감이 열려."
엄마의 말이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랐다. 어떤 해에는 엄마가 주홍빛 감을 한가득 따다 주었다. 단단한 감을 건네며 “이건 너 닮았다” 하기도 했고, 제법 익어 물컹한 감을 주며 “물른 게 딱 난가 보네” 하며 웃기도 했다. 그러다 어떤 해엔 감이 없다고 했다. 그땐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오늘 감나무를 보니, 영 글렀다. 가지마다 빈 잎들만 바람에 흔들렸다. 그제야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아, 그래서 한 해씩 빼고 감이 열린다고 했구나. 부재와 존재, 다시 부재. 삶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감나무는 어쩌면 사람과 닮았다. 모든 해를 견디며 열매를 맺지 않아도,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해엔 숨을 고르고, 또 어떤 해엔 온 힘을 다해 붉은 열매를 내놓는다. 인생도, 기억도 그렇게 한 해씩 거르며 익어가는 것인지 모른다. 쉼과 채움의 리듬으로.


감이 열리지 않은 정릉의 가을은 스산했지만, 내년을 기약할 수 있다는 게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현관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와 이번에는 아버지의 책상 앞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책 몇 권만 올려져 있었는데, 아버지가 읽은 책이었는지 아니면 읽으려고 올려둔 건지 모르겠다. 아니면 오래 전 엄마의 책이거나.


정리를 결심한 만큼, 책상 서랍도 마저 열었다. 미처 버리지 못한 노트와 아버지의 영수증, 안경 케이스, 볼펜들이 칸칸이 들어차 있었다. 가장 아래 칸 깊숙한 곳에는 오래 전 공원에서 보았던 낡고 반들거리는 검은 가죽의 지갑도 보였다. 그 날의 냄새와 낙엽 뒹굴던 소리가 동시에 나를 감쌌다. 지갑 안에는 가장자리가 누렇게 해진 쪽지 하나가 삐죽이 나와 있었다. 종이를 꺼내는 동안 열어둔 창문 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창턱에 걸린 낙엽이 바람에 흔들렸다. 오래된 이야기가 바스락거리며 깨어나는 소리 같았다. 오래된 이야기가 바스락거리며 깨어나며, 누군가가 ‘이제 꺼내보라’ 속삭이는 듯했다. 손끝에 닿은 그 종이는 차갑지만 이상하게 따뜻했다. 오랜 세월을 품은 물건만이 가진 체온으로. 짐의 이름과 그 아래로 흐릿한 주소 몇 줄이 적혀 있었다. 손끝으로 살짝 만져보니, 종이의 결이 그대로 아버지의 숨결과 맞닿은 것만 같았다.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나는 잠시 손을 멈춘 채, 그날 공원에서의 아버지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건 엉클 짐이 준 거야."


잠시 숨을 고르고, 종이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잃고 싶지 않았던 건 무엇이었을까. 전쟁의 잔재가 아니라 그런 속에서도 따뜻한 온기에 대한 그리움이었을까? 아니면 아버지가 생각한 미완의 약속? 거기까지 생각이 머물자 아버지의 기억을 대신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기억이 희미해질수록, 대신해야 할 일들이 더 또렷이 보였다.


종이를 다시 접어 조심스레 손에 쥐었다. 그곳으로 가야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아직 그 주소가 남아 있다면, 아버지의 기억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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