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시간에 머무는 오후
아버지의 가을 재킷과 커다란 통의 조금 쓰다 만 바세린을 챙겨 나왔다. 차로 20분 남짓 걸리는 요양원은 하월곡동 언저리에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산자락 끝, 공기도 좋고, 무엇보다 아버지와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정릉 시장에 들러 과일도 샀다. 평소 아버지가 좋아하는 귤은 아직 이르다고 해서, 대신 크고 윤기나는 홍로를 골랐다. 달고 시원한 향기의 배도 몇 개 넣었다.
과일봉지들을 차 뒷좌석에 싣고 다시 출발했다. 미아사거리 고가를 지나며 도시의 소음이 서서히 멀어졌다. 언덕길을 오르자 햇살에 반짝이는 하얀 외벽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운전 내내 여러 생각이 겹쳐 들었다. 아버지의 칠십 년 세월이 이제는 시간의 윤곽을 잃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일련의 파편처럼 느껴졌다. 그 긴 세월이 결국 이런 낯선 공간으로 흘러들었다는 사실이 마음 한구석을 저리게 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낮은 TV소리만 윙윙 울렸다. 윗층 어딘가에서 누군가 밭은 기침을 내뱉는 소리도 들렸다. 접수대엔 머리를 단정히 묶은 앳된 간호사가 앉아 있었다. 처음 안내받던 날엔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면회 오셨어요?"
"네, 201호 윤영수 어르신 따님이에요."
간호사는 명단을 확인하고 내게 덧신과 마스크를 내밀었다. 신종플루 이후로 요양원 전체가 위생에 예민해진 듯했다. 덧신을 신으려 허리를 굽히는데 균형이 자꾸 흔들렸다. 그때 간호사가 내 팔을 잡아주었다. 그 짧은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불안정해진 나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게다가 내 모든 동작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져 숨이 가빴다.
"오늘은 아버님, 괜찮으세요. 식사도 잘 하셨고요."
앳된 간호사는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대신 눌러주었다. 문이 닫히자, 복도 끝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엷게 번졌다. 엘리베이터가 2층에 멈추며 문이 열렸을 때, 밥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공기 속에 섞여 흘렀다. 긴 복도를 걸으며 호실 번호를 따라가자, 201호 문은 이미 반쯤 열려 있었다.
아버지는 침대 끝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햇살이 어깨에 내려앉은 채로, 그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보였다.
"아버지." 하고 부르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익숙하면서도 낯선 표정으로 "안녕하세요." 했다.
그 한마디에 마음이 무너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과일 봉지를 풀고 사과를 씻었다. 그리고 엄마가 오래 전 아버지에게 늘 했던대로 껍질째 네등분을 했다. 아버지는 두 손으로 하나를 받아들고 천천히 씹다가 문득 고개를 들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 영숙이 아니냐?"
순간 사과 조각을 들던 내 손이 멈췄다. 영숙은 엄마의 이름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영숙이에요. 사과 사 왔어요."
"이거 예전에도 먹었지?"
"그렇죠. 아버지. 늘 드셨잖아요."
그는 한동안 고개를 끄덕이며 씹더니, 이내 창밖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짐, 저기 배가 왔어."
아버지의 눈동자가 먼 기억의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시선을 따라 손을 흔들었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왠지 그가 본 풍경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눈엔 새하얀 배와 미군들의 웃음소리가 여전히 선명하게 들릴지도 몰랐다.
그때 공용 TV에서 낮은 볼륨으로 김연아의 광고가 흘러나왔다.
"공기를 디자인하다, 삼성 하우젠 제트"
나는 그 문장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그 '공기'를 붙잡고 싶어졌다. 아버지의 시간 속에 흘러다니는 공기, 그 속에 섞인 냄새와 온기, 그리고 사라진 이름들. 그 모든 것을 다시 디자인할 수 있다면, 그의 기억과 나의 현재를 한 공간 안에 오래 머물게 하고 싶었다.
창가의 햇빛이 조금 기울 무렵, 아버지는 침대에 몸을 뉘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커튼을 닫으니 방 안이 세상과 분리된 듯 고요했다. 아버지의 숨결은 고르고 평화로웠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이제 아버지는 자기 기억 속 세계에서 더 자유로울지도 모른다고. 그곳에서는 잃어버린 이름들도, 지나간 시간도 모두 다시 살아날 테니까. 나는 다만 그 세계의 문턱에서 잠시 머물 뿐이었다.
과거와 현재, 이쪽과 저쪽, 기억과 망각이 맞닿은 자리에서 나는 처음으로 ‘사라진 것을 기억하는 일’이 얼마나 아름답고 아픈 일인지 알았다.
곧 아버지는 코를 골기 시작했다. 칭문 너머로 하늘은 이미 보라빛으로 저물어가고 있었다. 문득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노을이 질때면 마음이 이상하게 아려."
시간이 그렇게 사라지는 걸 지켜보는 지금은, 그것이 아버지의 세월을 배웅하는 일 같았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국 연수 전에 한 번 더 와야겠다 생각하며 가방을 들었다. 열쇠를 찾으려 손을 넣자, 오전에 아버지의 방을 정리하며 넣어둔 쪽지 한 장이 손끝에 닿았다. 별표를 친 짐의 이름과 주소. 그것은 단순한 메모가 아니라, 아버지의 시간으로 향하는 하나의 통로처럼 느껴졌다.
나는 한참 동안 그 쪽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접어 가방 안 깊숙이 넣었다. 그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예감이 스쳤다. 언젠가, 그 주소가 나를 그곳으로 데려갈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