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여행의 시작

기억이 남긴 길 위에서

by 리앤

9월에 신청한 해외연수는 이미 승인을 받은 뒤였다. 이제 출발만 남았다.


나는 인천공항에서 항공권을 다시 확인했다. 학교와 숙소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벌링톤 공항으로 가야 했지만, 뉴욕을 거쳐야 했다. 14시간의 비행, 2시간의 대기, 그리고 작은 비행기로 갈아타는 1시간 반의 여정. 약 17시간의 긴 여행이었다.


'기억, 회복력'을 주제로 한 해외 단기 워크숍은 여름 학기 말, 학과 공지 메일을 통해 알게 되었다. 연구 지원금 안내가 함께 첨부되어 있었다.


지난 학기 학생 상담 중, 가족 문제로 감정 정리가 어렵다던 한 학생이 있었다.

"저번 시험에서 또 떨어졌어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은데, 마음이 자꾸 흔들려요."

그 말 앞에서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기억과 경험이 마음속에서 어떻게 반복되는지, 그 순환을 어떻게 멈출 수 있는지, 그게 늘 나의 관심사였다.


그때부터 '기억'이란 단어가 유난히 오래 머물렀다.

"왜 과거 경험이 계속 영향을 주나요?"
"실패한 경험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학생들과 나눈 그 대화들이 이번 워크숍의 주제를 더 가까이 느끼게 했다.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저장하는 기능이 아니라, 현재를 만들어내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점점 확고해졌다.


나는 벌링톤행 티켓을 손에 쥐고, 이번 연수가 내 수업과 연구에 어떤 새로운 시선을 더해줄지 떠올렸다. 그때 불현듯, 한 주소가 머릿속에 스쳤다.


'4217 Wexford Drive, Kensington, Maryland 20895'


아버지가 평생 간직했던, 짐의 집 주소였다. 그 주소는 나에게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기억의 원점이었다. 작은 도로와 숲, 그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이미지 속에 아버지의 삶과 나의 연구, 그리고 학생들의 사연이 겹쳐 떠올랐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었다.


비행기는 천천히 고도를 높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구름 위 세상은, 마치 과거와 현재가 포개지는 풍경 같았다.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메모장을 펼쳤다. 워크숍에서 다룰 이론을 정리하고, 학생 상담에서 느낀 감정을 기록했다. 그러다 문득 아버지의 짐, 그 속에 남은 기억들을 떠올렸다. '기억이 현재를 어떻게 형성하는가' 그 질문이 다시 선명해졌다.


언젠가, 아버지의 짐을 직접 정리해야 할 날이 올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기억을 조심스럽게 품은 채 앞으로 나아갈 시간이었다.


뉴욕을 경유한 뒤, 작은 비행기로 갈아타 벌링톤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두 시가 다 되어 있었다. 공항에서 렌터카를 빌려 캠퍼스로 향하니, 늦가을의 공기는 제법 차가웠다. 낮은 햇살이 도로 위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고, 젖은 낙엽이 바람에 흩날렸다.


'을씨년스럽다' 가만히 혼잦말을 내뱉었다. 당연히 대화를 받아 줄 누군가는 없었지만, 그런 적막함도 좋았다. 창문을 조금 내리자 찬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낯선 공기와 도로의 냄새가 묘하게 낯설고도 익숙했다. 나뭇잎 하나가 앞 유리창에 붙어 시야를 잠시 가리다 사라졌다.


숙소는 캠퍼스 안의 2인실이었다. 아직 룸메이트는 도착하지 않았다. 침대 두 개, 길다랗게 이은 책상 하나 그리고 작은 옷장이 있는 단출한 공간이었다. 2주 동안 머물기엔 충분했다. 짐을 풀고, 워크샵 자료를 다시 확인했다. 노트와 펜, 책 몇 권을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새벽이어도 도착하자마자 전화하라니깐." 남편의 첫마디였다.

"문자는 남겼잖아. 예린이는?"

"고모네 있지, 학교 왔다 갔다 잘해. 걱정 말고 일에 집중해."

예린이의 이름이 들리는 순간, 마음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들이 일상을 잘 이어가고 있다는 게 고마웠다.


통화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창문 밖에서 낙엽이 흩날리는 소리가 들렸다. 머릿속에 다시 짐의 주소가 떠올랐다. 켄싱턴, Wexford Drive 그곳으로 이어지는 길 위에서, 나는 내 안의 '기억'을 새롭게 해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워크숍이 시작된 지 며칠 뒤, 명상 세션이 있었다. 참가자들은 각자 기억 속 한 장면을 떠올리고, 그 기억이 현재의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 있는지를 관찰했다.

나는 눈을 감고 아버지가 하우스보이로 일하던 시절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기억은 내 연구의 출발점이자, 아버지의 침묵 속에 남겨진 또 하나의 언어였다. 그때 깨달았다. 기억의 재구성이란, 과거를 잊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선으로 다시 살아내는 일이라는 것을. 그건 삶과 감정을 이해하는 실제 도구였다.


그리고 마침내 미국의 땡스기빙인 연휴가 다가왔다. 워크샵은 잠시 멈첬고, 사람들은 각자의 도시로 흩어졌다. 나는 켄싱턴으로 향하기로 했다. 아버지의 기억이 멈춰 있던 그곳으로. 무려 10시간의 운전이었다. 주소가 정확한지, 짐이 여전히 살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아버지의 기억과 연결된 그 길 위에 서는 것이었다.


내비게이션을 따라 렌터카를 몰았다. 그가 걸었던 기억의 길 위에, 이제 내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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