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시 30분

by 클로이

1교시는 8시 30분이다. 아이들은 축축하게 젖은 머리로 양치를 하고 교실로 돌아온다. 대부분 잠에서 깨지 못한 채 나른하게 퍼져있다. 잠은 항상 부족하다. 자고, 또 자도 끝이 없다. 1교시는 하루의 시작이자 끝이다. 햇빛이 쏟아져 내리지만 교실만은 아직 어둡다. 2교시는 자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일어나는 시간이다. 공부 꽤나 한다는 아이들도, 못하는 아이들도 2교시에는 모두가 눈을 뜨기 시작한다. 25명에서 30명 남짓한 아이들이 있는 교실 안에서 눈빛이 초롱초롱한 아이들은 세 명에서 네 명 정도이다.


흔히 모범생이라고 불리는 아이들이다. 선생님의 모든 말을 흡수하려는 듯 칠판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집중력과 열의가 대단하다. 이들을 버티게 하는 것은 부모님도 선생님도 친구도 수능도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지지 않으려는 자존심이다. 타고난 성격이자 성향일 수도 있고 어쩌면 학교라는 공간이 만들어낸 작은 거인 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의지가 있고 강한 아이들이 모두 다 공부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 안타까운 아이들도 많다. 공부 요령이 없는 것이다.


반대로 수업태도가 좋지 않으나 성적이 뛰어난 아이들도 있다. 보통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 것보다 스스로 공부하는 것이 더 낫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수학 시간에는 국어 책을, 국어시간에는 수학 책을 편다. 그래도 성적이 좋으므로 아이들의 존경을 받는다. “쟤는 분명 머리가 좋을 거야!” 사회도 그렇지만 교실에서도 의지를 가진 정직한 아이들보다 영악하고 계산적인 아이들이 더욱 대접받는다. 하지만 그런 영악함을 가지고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의지와 노력을 가지고 일관성 있게 무엇을 해내는 성향이 더욱 귀한 것이다. 세상에는 그런 것이 드물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성적이 나오지 않아도, 혹은 수능을 잘 치지 못하더라도 그러한 마음가짐과 자신의 성격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고 말하면 요즘 세상에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일까.


3교시는 애매모호한 시간이다. 공부를 막 하기 시작한 아이들이 다시 잠에 취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분단 맨 뒷줄의 아이가 슬슬 주변 친구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여고에서는 선생님의 눈치가 아닌 친구들의 눈치를 본다. 또래 사이에서의 평판과 소문, 그런 것들이 아주 중요하다. 또래는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또래는 나의 친구이자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나의 룸메이트이자 나의 적이다. 꾸벅꾸벅 졸다가 옆의 친구가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정신을 번쩍 차리는 것이 아이들이다. 교실을 지배하는 것은 분위기다. 교사도 아이들도 학급의 분위기를 넘지 못한다.


학기 초의 분위기가 어떻게 조성되느냐에 따라 긍정적이고 서로 협동하는 반 분위기인지, 부정적이고 지나치게 경쟁적인 분위기인지가 결정된다. 그것을 만드는 것은 반 아이들의 조화이다. 대체로 반에서 목소리가 크고 자아가 강한 아이들이 학기 초에 무리를 형성한다. 나름 교실에서 서열이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는 이 무리가 반의 분위기를 좌우하는데, 나머지 목소리가 크지 않은 학생들이 그 분위기에 동조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결정적이다. 대부분의 여학생들이 속으로는 동조하지 않지만, 동조하는 척하여 갈등이 쌓일 때가 많다.


자기표현에 능하고 기가 센 아이들, 그리고 소심하고 내성적인 아이들이 뒤섞인 교실 환경은 긴장의 연속이다. 개인은 집단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반 분위기에 적응을 잘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생기기 마련이다. 자기 세계가 강하거나, 지나치게 예민한 아이들은 교실에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쉬는 시간이 되면 교실 밖으로 나간다. 자신과 비슷한 아이들을 찾아 다시 무리를 형성한다. 아이들은 무리가 필요하다. 학교생활에서 생기는 불만, 억압, 스트레스를 쏟아낼 배출구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고작 10분 동안의 쉬는 시간 동안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장난을 치고, 험담을 하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다. 학교에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다닐 장소가, 무엇보다도 시간이 없다. 그래서 짧은 쉬는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기에 학교생활을 견딜 수 있다.


4교시는 들뜨는 시간이다. 점심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점심을 기다리는 이유는 배가 고파서가 아니다. 단순히 배고픔을 충족시키기 위한 시간이 아니다. 점심시간은 개인적인 시간이다. 수업을 듣는 동안에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떠들 수도 없지만 점심시간만은 활동 반경이 넓어지고, 친구들과 무슨 이야기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10분간의 쉬는 시간에 비하면 1시간이라는 점심시간은 긴 휴식이다.


이때의 아이들을 지켜보면 4시간 동안 참았던 에너지를 발산시키느라 분주하다. 줄 서기, 밥 먹기, 떠들기, 뛰어다니기, 까르르 웃기, 교문 밖에 나가기, 간식 먹기, 술래잡기하기, 택배 받기, 도서관 가기, 양호실 가기, 배드민턴 치기 등 학교를 누비며 움직이기 바쁘다. 조금 전까지 교실에 앉아서 잠과 사투를 벌이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천진난만한 10대 소녀의 분위기가 교정에 피어오른다. 아이들의 진짜 모습이 온 학교에 꽃핀다. 학교가 점심시간만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진짜 자유는 아니다. 평소 학교라는 공간이 가하는 행동의 제약에서 풀려났을 때의 단순한 공간적, 시간적인 자유를 원하는 것이다. 설령 학교가 아이들에게 자유로운 시간과 장소를 제공한다고 해도 아이들은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수능과 입시라는 제도에서,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부모님의 기대와 선생님의 잔소리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인생은 경쟁이라는 불공평하지만, 모두가 따르고 있는 가치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이들이 졸업 후에 자유를 얻게 되어도, 그 자유는 여전히 겉으로만 자유라는 것을 아이들은 모르고 있다. 그저, 아침에 더 늦게 자고, 수업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시간과 공간을 쓸 수 있게 되는 자유 – 단순한 자유- 를 아이들은 바라고 있다. 교실을 벗어나도 여전히 교실과 다르지 않은 현실, 아이들이 벗어나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은 학교가 아이들을 억압한다고 말하지만, 굳이 학교가 아니라도 모든 사람이 억압받고 있다. 차라리 학교 안에서 학교 밖을 탈출하게 될 자유를 꿈꾸는 것이, 아이들에게 더욱 달콤한 꿈이 아닐까? 아이들을 수능까지 버티게 하는 것은 바로 그 달콤함인데, 결국 대학교에 가면 상상했던 것과 다르다며 좌절하는 대학생들이 많다. 달콤한 자유는 씁쓸한 맛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시간적, 공간적인 자유를 얻게 되어도, 스스로의 가치관과 내면의 중심이 없다면 어떻게 살지를 모르게 된다. 학교에서 정말 가르쳐야 하는 것은 ‘좋은 대학에 가는 방법’이 아니라, ‘어디를 가든지, 잘 살 수 있는 방법’이다.


1시간의 점심시간에서 오는 단순한 자유가 아닌, 평생을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다.


5-6교시에는 교무실에 종종 낯선 전화가 걸려온다. 학부모이다. ‘우리 아이를 기죽이지 말라’ 에서부터 ‘자습시간을 더 늘려 달라’까지 다양한 요청이 들어온다. 재밌는 것은, ‘몇 반의 누구 어머님 되시나요?’라고 물으면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를 위해서 건의를 한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 것은 아이러니다. 아마도 아이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이겠지만, 자신의 불만을 말하지 않고 꽁꽁 묵혀놓았다가 집에 가서 엄마에게 이르는 아이나, 역시 신분을 밝히지 않고 교무실에 전화하여 불만을 쏟아내는 학부모나 똑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개는 별것 아닌 불만으로, 아이들이 엄마에게 고자질하는 동안 과대 포장되고 그것을 의심하는 엄마는 아무도 없다. 아이의 잘못도 무조건 학교의 잘못이 된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다.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의 부모는 아이와 놀랍도록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음, 피해의식이 강함, 감정적임, 사소한 것에 예민함. 학부모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자기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모든 일을 학교 탓으로 돌리려는 것이 이해는 가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부모의 어떤, 해결되지 않은 감정적인 미성숙함이 아이에게 전이되고 그것이 불씨가 되어 학교생활에서 문제를 일으킬 때가 많다. 그래서 학부모와 통화를 하고 있노라면 아이 자체의 문제보다는, 학부모의 피해의식이나 생활적인 어떤 불만을 아이의 문제를 계기 삼아 교사에게 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문제가 아닌 것이다.


기회가 생겼으니 내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내야지’라는 느낌으로, 순간 감정의 쓰레기통이 된 느낌이 든다. 고등학교 교무실에서는 이런 감정적인 민원을 받아주지만, 아이가 사회가 나갔을 때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회생활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엄마가 해결해주려고 나선다면, 아이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이다. 애초에 의존적으로 키웠다면 최소한 문제 해결만큼은 아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같이 협동하여 아이의 독립심을 길러야 한다.

아이는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다. 감정 쓰레기가 아이에게 계속 쌓이면 그것의 아이의 성격이 되고 미성숙한 어른을 만들어낸다.


마지막 수업시간인 7교시가 끝나면, 보충시간이다. 보충시간이 될 쯤에는 교사도 아이도 모두가 진이 빠져있다. 그중에서도 고3의 보충시간은 더욱 조금 특별하다. 수업을 듣는 아이보다는 자기소개서를 쓰고 입시상담을 하는 아이들이 더욱 많다. 9월 초가 가장 바쁜 시기이다. 원서접수를 앞두고 6개의 대학교와 학과를 정해야 한다. 일생일대의 고민이다. 점수를 따라가자니 성에 차지를 않고, 성에 차게 하려니 점수가 문제이다. 내신과 정시 점수 간의 차이도 문제이다. 정시 성적이 내신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절대 소신지원을 하지 않으려 한다. 혹시라도 수시에 붙었을 때, 더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신 성적이 월등하게 좋은 아이들은 수시에 그야말로 목숨을 건다. 수시로 대학을 가지 못하면, 끝난 거라고 생각한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3년 동안 가장 불안하다. 그동안의 공부가 입시 한 번으로 결정된다는 생각이 아이들을 괴롭힌다. 수시도, 정시도 확실한 것은 없지만 마치 도박을 하듯이 원서를 써낸다. 결과도 좋지 않아도 괜찮다, 라는 말을 아이들에게 해주었지만,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다.


설령 원하는 않는 결과가 나와도 그때부터 또 자신의 길을 찾으면 된다는 것, 너무 상투적인 이야기지만 맞는 말인데, 그동안 학교에서 모 아니면 도식의 정답만은 배운 아이들에겐 들리지 않는 것 같다.


좋은 대학에 가더라도 그것이 인생의 성공도, 전부도 아니라고. 인생은 절대 수능성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고, 인생은 인생을 대하는 너희들의 태도로 결정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도무지 용기가 안 난다.



야자시간은 7시 10분부터이다. 보충이 끝나고 밥을 먹고, 다시 아침자습시간처럼 자리에 앉아 공부한다. 햇빛 대신 어슴푸레 달빛이 들어온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공부를 시작하는 시간, 하루의 끝이자 시작이다. 이 시간만큼은 온 교실이 조용하다. 떠드는 아이들은 한 명도 없다. 삼 학년 일반에서 구반까지 이어진 일직선의 복도 위에 나의 발자국 소리만 들린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아이들이 학교를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안다. 하루빨리 이 좁은 복도에서 탈출하고 싶어 안달인 것도. 아침 8시 30분에서 저녁 9시 30분까지 계속되는 일정 속에서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도, 그런데. 나는 자꾸 아이들의 모습이 반짝반짝 빛나 보인다. 이 학교 안에서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고, 일어날 모든 일들이 나중에는 다 추억이 된다는 것을.


이런 학교지만은, 학교 안에서 너희들이 오히려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모순된 진실을. 학교 밖은 더욱 치열하고 지긋지긋하다는 것을, 그러니 제발 순간을 즐기고 젊음을 만끽하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은데, 아, 또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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