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망한 프랑스 워킹 홀리데이, 그 시작
나의 망한 프랑스 워킹 홀리데이 1
"제 꿈은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 세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 문장에 이것저것 덧붙여 대학교 수시 원서마다 적었다. 여섯 개 모두 탈락. 오직 <보노보 혁명>을 읽은 것을 계기로 사회적 기업을 외치던 어느 수험생은 참패를 겪은 후 경영학도가 되고자 하는 의지를 잃고, 되는대로 수학능력시험 성적에 맞추어 대학에 진학했다. 그리하여 나와 프랑스의 인연이 시작됐다. 아는 것은 고작 봉주르와 갸또 쇼콜라뿐이었던 내가 자체 휴강, 학사 경고와의 사투 끝에 모 대학 불어불문학과에 제법 잘 적응한 것은 다시 생각해도 신기하다. 8 학기 등록금과 일 년간의 어학연수 덕분에 보디랭귀지 없이도 프랑스인과 의사소통할 수 있게 됐고, 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이대로 직장인이 되기는 아쉬웠다.
시인하자면, 사실은 인연이 아니라 질긴 짝사랑이었다. 스물한 살부터 해마다 여행하거나 학교에서 기획한 문화 탐방에 참가하거나 어학연수를 하느라 프랑스에서 여름을 났다. 그러나 당장 올해부터는 다가올 여름을 찜통더위 속에서 나인 투 식스로 노동하며, 심지어는 모기에게 수혈까지 하며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다가왔다. 더워도 습도가 낮아서 불쾌하지 않은 프랑스에서 한여름에는 남프랑스의 해변을 찾거나 뤽상부르 공원의 나무 그늘이 주는 서늘함을 즐기다가, 가을이 오면 코트를 입고 프렌치 시크를 흉내 내며, 겨울이 오기 전부터 열리는 크리스마스 마켓의 따끈따끈한 추로스를 다섯 번쯤 사 먹을 때에 그 해의 첫눈을 보는 것. 낭만적이라 느껴지는 이 행위들이 내 일상에 스미기를 바랐다. 어쩌면, 소주를 싫어하는 나는 와인 체질이라며 손톱만 한 치즈 조각을 안주 삼아 와인을 홀짝이고, 크로넨버그 1664는 블랑보다 라거가 나은데 어째서 수입하지 않냐며 원통해하다가, 크림빵 대신 바게트에 버터를 발라서 먹는 명예 프랑스인다운 짓을 일삼던 내가, 심지어는 스스로를 박혁거세가 아닌 베르생제토릭스의 후예라고 믿고 싶었던 걸까. 다행히도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졌다. 스물다섯이면 당장 취업이 급한 나이는 아니다. 집안에서 경제 활동을 닦달하지도 않았다. 프랑스어와 불문학을 공부했으며 사르트르의 자서전을 어설프게 다뤄 가까스로 졸업 논문을 통과시킨, 그 흔한 복수전공 하나 없는 인문대학 졸업생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남들은 제각각 인생을 설계하는 그 시기를 모르는 척하고 나 자신에게 일종의 유예 기간을 내리기로 했다. 게다가 스물다섯 청춘이 세상 경험을 하며 내면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기로 결심했다니 얼마나 그럴듯하게 들리는가. 그리하여 프랑스 워킹 홀리데이가 시작됐다. 무모한 도전을 추어올리는 친구들의 부러움이 따라왔다. 연고 없는 타국으로 떠나는 주제에 계획한 것 하나 없었다. 파리의 한인 민박에서 보름 정도 지내다 보면 싸게 내놓은 파리 외곽의 스튜디오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일을 구하다가 정 안되면 한식당 주방에서 접시라도 닦으면 된다. 나는 젊고,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해도 가치 있으며, 어차피 돈 없고 울적한 취업 준비생일 바에야 궁상을 떨어도 에펠탑 앞에서 떨겠다. 훗날 돌아보면 망했다고 평가될 앞날을 아직은 몰랐다. 대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 낭만이라는 것이 한국에는 없고 프랑스에는 있을 줄 알았던 스물다섯 살, 나의 프랑스 워킹 홀리데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