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홀리데이가 됩니다
나의 망한 프랑스 워킹 홀리데이 2
오월이었다. 오월은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도록 설계된 달. 포근한 봄바람, 마음 한 켠을 간지럽히는 봄비, 거리마다 보이는 풀잎과 꽃은 영화 같은 배경을 만들어 주고, 봄의 열기에 척추가 흐물흐물 녹아 몸이 늘어질 때쯤 알맞게 공휴일이 온다. 게다가 책 한 권을 들고 나가 카페에 자리를 잡기만 하면 적당히 훌륭한 봄나들이가 완성된다. 그리고 나는 그 날 좋은 오월에 프랑스로 떠났다.
사실 봄을 만끽하는 건 한국에서부터 시작됐다. 처음 워킹 홀리데이를 결심한 후 비자가 발급되기를 기다리면서 평일 저녁을 온전히 아르바이트에 바치다 보니 떠나는 날이 가까워졌을 때에는 일을 그만두고 놀고먹느라 바빴다. 이민을 가는 것도 아니면서 친구들과 송별회를 하지 못해 안달이었고, 부모님과 소중한 추억을 만드는 데에도 소홀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비행기를 타기 이 주 전부터 내 몸은 이미 몇 달간 배운 노동의 고통을 서서히 잊어 가는 반면 쾌락을 취하는 데 익숙해진 것이다. 그리고 애초부터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일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일을 구하지도 못했고. 보름에서 한 달 정도는 파리를 둘러보고 일자리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질 계획이었다. 내게는 적응 기간이라는 핑계가 있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파리에 도착했다. 어학연수를 받은 곳은 파리가 아닌 프랑스 남부 옥시타니 지방의 어느 도시였으나 프랑스에 산다면 응당 파리를 지나기 마련이고, 그 때문에 나에게도 파리는 꽤 익숙한 곳이었다. 따라서 드골 공항에서 목적지인 한인 민박까지 가는 길에 긴장과 설렘이 공존하는 여행자의 심정은 찾을 수 없었다. 집을 구하는 동안 머물 장소로 한인 민박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숙박비가 저렴하고 식사를 하루 두 끼 제공한다. 에스카르고나 크로크 무슈에 미련이 없는 나는 하루에 한 번 빵을 먹고 나머지 두 번은 김치를 먹고 싶었다. 또한 장기 숙박 시에는 할인가가 적용되며 주인 이모와 정을 붙일 특급 기회도 주어진다. 그렇게 되면 파리 생활을 오래 한 이모님으로부터 유용한 정보를 얻을 요량이었다. 결과적으로 성공한 작전이었다.
그런데, 이모님의 음식 솜씨가 훌륭하다는 사실은 민박을 예약할 때 읽은 여러 후기 때문에 익히 알고 있었으나 내가 놓친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이모님은 자신의 손님들이 머나먼 타국까지 와서 시간을 낭비하는 모습을 방관하지 못하는 분이었다. 그래서 특유의 밝은 성격을 발휘하여 이용객들의 관광 일정에 개입했다. 저녁을 먹인 후에는 야경을 보러 나가라며 등을 떠밀었고-그러면서 본인이 가진 유람선 티켓을 판매했다- 마땅히 할 일이 없는 손님을 대상으로 파리 근교 투어를 적극 홍보했다. 투어 업체로부터 건당 수수료를 받는다는 진실은 이보다 훨씬 후에 알게 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매일 아침에는 모든 이용객이 하루의 계획을 터놓게 만들어서 혼자 온 사람이나 그사이 친분이 생긴 사람들끼리 함께 관광하도록 도왔다.
나만은 예외일 줄 알았다. 내 사정을 이미 알렸기 때문에 오전에 가벼운 에코백을 달랑달랑 들고 나갔다가 저녁 식사가 시작될 때에 맞춰 들어오는 생활을 가만히 두고 보실 줄 알았다. 나는 도착 이튿날 오를레앙에서 공부하는 대학 동기를 잠시 만났다가 그 후에는 공원에 앉아 책을 읽거나 스타벅스에 죽치면서 값싼 파리 원룸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 기간 동안 가장 잘한 일을 꼽으라면 유명한 마카롱을 먹은 것이니 내가 얼마나 유익한 시간을 보냈는지 감이 올 것이다. 이모님이 오늘 하루가 어땠냐고 물어 오면, 뭐, 대충 동네를 돌아다녔다고 말하는 패턴이 며칠간 반복됐다.
그 며칠이 이모님이 참아 줄 수 있는 한계였나 보다. 처음에는 야경을 보러 나가는 무리에 나를 끼워 넣으며 바토무슈(센 강 유람선) 티켓을 쥐여 주셨다. 이미 두 번이나 탄 적 있는 유람선을 세 번째로 탔던 이유는 순전히 그 티켓이 열흘 이상 머무는 이용객을 위한 서비스였기 때문이다. 당시에 나는 민박 내에서 자발적 아웃사이더를 담당하면서도 식사 시간마다 비어져나오는 친화력을 숨길 수 없어 은근슬쩍 대화에 끼곤 했다. 그러던 차에 여럿이서 함께 탄 바토무슈는 센 강을 따라 부드럽게 흘렀고, 밤바람은 선선했으며, 갑판 위에서 마시는 맥주는 비싼 만큼 청량했다. 그러자 어떤 강렬한 감상이, 그간 가고 싶던 나라에 간 것치고 싱겁게 반응하고 있던 나의 마음을 순식간에 강타했다.
'그래, 나는 파리에 있어!'
그때부터 눈앞에 펼쳐진 이 멋진 도시를 다시 느껴 보려는 마음이 생겼다. 일명 '워킹 없는 워킹 홀리데이', 다시 말해 그저 놀기에 바쁜 나날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