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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취생 Mar 25. 2023

비극의 대물림

피해자가 가해자로 바뀌는 순간에 관하여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속담이 있다. 속담자체만 보면 분명 100% 맞는 이야기지만, 현실에서 적용해 보면 "콩 심은 데 콩날 확률이 높고, 팥 심은 데 팥 날 확률이 높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옳다고 느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생물은 암수가 구분이 되어있다. 만약 우리가 완벽한 면역체계를 가져 죽지 않는다면 아마 지금 살아있는 모든 생물은 무성생식을 할 것이다. 하지만 무성생식은 숙주에 기생하는 생물이 존재하는 환경에서는 생존에 불리하다. 그래서 현재의 환경에서 유성생식하는 생물이 더 많이 살아남은 것이라고 한다. 모든 유성생식하는 생물은 유전자를 섞어가며 생존에 좀 더 유리하게 진화한다. 만약 콩이 멸종위기에 처한다면 팥으로 진화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생존을 위해 다음세대에 어떤 특질들을 물려준다. 그리고 그 특질에는 생존에 유리한 재능 (선천적인 것) 뿐 아니라 공존에 유리한 정서(후천적인 것)도 포함되는 것 같다. 살아보니 인간의 생(生)이란 공생(共生) 없는 자생(自生)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낀다. 서론이 길었지만 이번은 공생의 정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뜻밖의 미국행-


 2017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 퇴사하고 카페 창업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에게 한통의 전화가 왔다. 수화기너머로 어머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미국에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여동생이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는 말을 했다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나는 어머니와 통화를 마치고 바로 여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여동생에게 내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달라고 말하라 했다. 그러자 여동생은 조금 망설이다 울면서 "오빠, 좀 도와줘"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3일 뒤 미국으로 향했다.


 처음 가본 낯선 타국에서 여동생과 여동생의 전 남편을 만났다. 미국에 도착하기 전 여동생의 문제에 대해 약간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여동생은 부부 갈등으로 우울증이 심하게 왔다고 했다. 여동생의 얼굴은 많이 부어 있었고, 전체적으로 많이 무기력해 보였다. 하지만 여동생 전남편은 한국에서 볼 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나에게 아주 친절했다. 여동생 남편은 내가 살면서 만난 가장 친절한 사람  한 명이었다. 심지어 우리 부모님에게도 나보다 더 다정다감하게 잘했다. 여동생의 전 남편은 나와 동갑이었고 그의 친구들 중에 나의 친구들도 있어서 결혼하기 전에 그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모범생이고 누구에게나 항상 친절했으며 남자친구들에게 평판이 좋았다. 남자는 남자가 안다는 말이 있다. 내가 봐도 그는 아주 좋은 남자였다. 그래서 지금 이상황은 부부 생활 중 있을 수 있는 사소한 갈등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여동생과 여동생의 전 남편은 나와 달리 공부에 재능이 있었다. 둘은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미국생활을 시작했다. 둘 다 국내에서 이름 있는 대기업에 근무했지만, 학문에 더 큰 뜻이 있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여동생이 회사를 1년 정도 더 다니며 전남편의 뒷바라지를 했고, 전남편이 미국에 적응하자 여동생도 미국으로 건너가 박사 과정을 준비 중인 상태였다.


  여동생의 전 남편이 연구실로 출근하면 나는 여동생과 마을 주변을 돌아다니며 맛있는 음식도 사 먹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가 아마 살면서 여동생과 가장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던 순간 이었던 것 같다. 여동생을 통해 듣는 여동생 남편의 모습은 나에게 너무 생소했다. 평소 내가 알던 모습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동생이 나에게 거짓말할 이유는 없었다. 어쩌면 미국에 도착하기 전 둘이 잘 다독여서 미국생활을 잘할 수 있게 하겠다는 처음 획이 틀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미국에서 머문 지 5일째 되는 날, 사건의 발단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계좌 이체 관련해 여동생의 남편이 엄청 날카로워졌고, 여동생에게 화를 냈다. 그리고 여동생은 너무 불안해하며 얼어 있었다. 말로만 듣던 그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보니 둘이 함께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동생의 짐을 싸게 하고 바로 다음날 귀국하는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리고 여동생과 함께 집 밖으로 나왔다. 잔뜩 화가 난 여동생의 전 남편은 나에게 욕을 하며 위협을 했고, 조금 위험한 상황까지 갔다. 생각지도 못했고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놀랬다. 내가 강경하게 대응하자 그는 자살할 것이라고 여동생을 협박했고, 그 소리를 들은 여동생은 잠시 기절했다.


 나는 여동생에게 저런 말하는 사람치고 자살하는 사람 못 봤다고 여동생을 안심시킨 후 다른 곳으로  피신시켰다. 여동생이 떠난 후 나는 곰곰이 생각을 했다. 사람일은 언제나 예외가 있기에, 여동생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앞으로 벌어질 일을 장담할 순 없었다. 나는 생전 처음 간 미국에서 한국에서도 해본 적 없는 911에 신고를 했다. 나도 짐과 여권을 가지고 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집안으로 다시 들어갔을 때 펼쳐질지도 모를 일에 대해 솔직히 조금 두려웠었다. 신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장신의 덩치가 큰 경찰관 두 명이 왔다.  나에게 집안에 총이 있는지 물어보았고, 나는 잘 모르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들은 집에 들어간 지 10분 뒤 나와서 집에 있는 사람이 좀 진정된 것 같으니 들어가 보겠냐고 물어봤다. 나는 그러겠다고 이야기하고 조심스럽게 여동생의 전 남편이 있는 집에 들어갔다.


-그는 가해자였다. 그런데 피해자이기도 했다.-


 집에 있던 여동생의 전 남편은 좀 진정이 되었는지 식탁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얼마간 침묵이 흐르고 그와 대화를 시도했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던 것 같은데 정확히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여동생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더라도 미국에 남아 있을 여동생의 전 남편을 위한 마지막 배려로 그의 부모님에게 직접 전화를 했다. 상황을 이야기하고 아들이 걱정되니 그쪽 집에서도 누군가 미국을 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의 가족들은 아무도 미국에 나올 수 없다는 말만 했다. 나도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으나, 한때는 내가 좋아했고 친했던 여동생 전 남편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여동생을 죽음까지 몰고 간 그가 무척이나 미웠지만 그의 부모님과의 대화가 너무 석연치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귀국일자를 연기하고 일주일 동안 그와 함께 지냈다.


 함께 있는 동안 여동생의 전남편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한 번도 웃거나 칭찬해 준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시댁 식구로 부터 많은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내가 통화한 어머니는 그의 새어머니였다. 여동생의 전 남편은 친 어머니가 어린 시절 자신에게 너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엉망이 되었으니 목을 조르며 죽으라는 이야기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나중에 귀국해서 들은 이야기지만 그의 가족들은 그를 이중인격자로 불렀다고 한다. 그는 성인이 되었고, 밖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정말 친절했지만 정작 그의 가족에게는 반대로 행동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동생이 남에서 가족이 되자 그는 여동생에게도 가족에게 했던 것처럼 똑같이 행동한 것 같다. 그는 어린 시절 힘이 없던 피해자였다. 그리고 그는 애정결핍으로 가까운 사람과 공생하는 정서를 배울 수 없었기에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에게 이중적인 감정이 들었다. 너무 밉지만 연민을 느꼈다. 살면서 여동생의 전남편 같은 애정 결핍을 해소하지 못한 채 성인이 된 사람들과 인연을 맺을 기회가 종종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대체로 친절했다. 하지만 그들과 정서적인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가까워질수록 나를 통제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살기 위해 결국 그들과 거리를 두는 것을 선택했다. 얼마 되지 않는 나의 경험으로 단정 지을 순 없겠지만 그들의 가족사를 들어 보며 알게 된 사실은 애정 결핍은 비극을 만들고, 비극은 또 애정 결핍이 있는 사람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애정 결핍, 자기애 그리고 나르시시스트>


 역사적으로 무엇인가 이룬 (돈, 명예 등) 사람들 중 일부는 공존에 관해선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그런 사람을 자기애성 성격장애 즉 나르시시스트라고 부르며 그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 연구에서 그들은 대체로 어린 시절 적절한 애정을 받지 못하거나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자란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 연구 논문을 읽으며 어쩌면 그들은 어린 시절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사랑을 받지 못해 생존하기 위해 그들 스스로 그 사랑을 채우는 것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부족한 애정 결핍을 가족이 아닌 타인의 관심으로 채우기 위해 그들은 최선을 다했을 것이고, 재능을 물려받은 일부는 그렇게 성공한 나르시시스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영원한 피해자도 영원한 가해자도 없다.-


 역사를 보면 비단 개인뿐 아니라 국가대 국가, 종교대 종교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보인다. 가해국이 시간이 지나 피해국이 되기도 하며, 그 반대도 있었다. 기독교의 역사도 초기에는 많은 박해를 받았지만, 국교가 되자 전쟁으로 이교도를 박해한 역사도 있다. 얼마 전 뉴스에서 접한 베트남전쟁에서 참전한 우리나라에 대한 기사를 보며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한 나라의 이념과 정치사상은 그 나라의 국민에게 대를 이어져 내려온다. 그리고 부모의 정서 또한 대를 이어져 내려온다. 그렇게 우리는 시기에 따라서 피해자가 되기도 하며,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돌이켜 보면 나의 역사도 비슷했고 여동생 전 남편의 역사도 비슷했다. 내가 귀국하기 전날 밤 그는 자신의 행동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다고 나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는 건강하게 잘 지내라는 말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말 말고는 다른 말은 떠오르지가 않았다.   


 여동생은 오랜 시간 우울즐 치료를 받았고, 대견하게도 그 힘들었던 시간들을 잘 극복 해냈다. 그리고 작년에는 여동생의 아픔을 이해하고 감싸줄 수 있는 좋은 사람을 만나 재혼했다. 여동생이 우울증 치료를 받는 동안 나에게 전 남편에 대한 원망을 종종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선가 살고 있을 그의 행복도 빌어줄 정도로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 사람으로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료한다고 여동생의 현재 남편 도움이 컸다. 정말 고마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여동생의 전 남편은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직장을 구했으며, 재혼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어찌 되었든 피해자이며 가해자였던 여동생의 전 남편도 좋은 인연을 만나 이제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 더 이상 비극이 대물림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부디 어디서든 행복하게 자신의 삶을 잘 살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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