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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취생 Apr 16. 2023

몰라서 부끄럽지 않았다.

부끄러운 일인지 알아야 부끄러울 수 있다.

 살다 보면 의도하지 않게 당황스러운 일들이 종종 벌어진다. 그리고 몇일 전 그런 일이 벌어졌다.


 나는 매일 아침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출근한다. 대체로 출근시간은 사람이 많다. 운이 좋으면 나의 앞에 앉아있는 분이 내리면 그 자리에 앉아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운이 아니라 점점 실력이 되고 있다. 출근길 같은 지하철 칸에 8개월째 타다 보면 익숙한 얼굴들이 종종 보인다. 그리고 유심히 관찰하면, 어떤 사람이 빨리 내리는지 알 수 있게 된다. 빨리 내리는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 앞에 서있으면 나는 곧 앉을 수 있다. 그 날은 두 정거장만에 한자리가 비어서 얼른 앉았다. 그리고 잠깐 졸고 있었는데, 옆에 앉아 있던 한 여성분이 나의 어깨를 툭툭 치며 휴대폰을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지하철을 타면서 처음 겪는 경우라 당황스러웠고, 졸고 있었기에 정신도 없었다. 여성분의 휴대폰 화면은 카톡 대화창이었고, 나는 그 대화를 읽어 봤지만 맥락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나의 시선이 대화창의 글 적는 곳에 머물자 그 여성분이 나에게 왜 휴대폰을 보여주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바지 뒤 좀 보세요."


 그렇다. 당연히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휴대폰을 내밀지 않았을 것이란 것은 너무 잘 알고 있었지만, 너무 예상밖의 문장이 적혀있어서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했다. 솔직히 잠결에 봐서 머라고 적혔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이 비슷한 의미의 문장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그 문장을 읽고 잠시 생각하다가 순간 식은땀이 났다. 앉은자리에서 바지의 엉덩이 부분을 만져봤다. 손에 찢어진 청바지 사이로 속옷이 만져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방송에서는 내가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한다는 안내가 나왔다. 그 여성분은 자기가 내려야 할 곳에 도착하기 전에 나에게 바지가 찢어졌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여성분이 안내 방송이 나오자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다행히 환절기라 겉옷을 입고 있었기에 빠르게 겉옷을 벗어 허리에 묶었다. 그리고 나는 그 여성분과 시간차를 두고 지하철에서 내렸다.


 회사로 가는 동안 헛웃음이 났다. 내일부터 어떻게 지하철을 탈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회사에 도착하는 동안 계속 부끄러움에 속이 쓰렸다. 그렇게 저녁이 되니 이 부끄러운 감정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가끔 생각날지도 모르지만 정말 감정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옅어지는 것을 보니 시간이 약이긴 하다.


-부끄럽다는 것을 알아야 부끄러울 수 있다.


 지하철을 타러 지하로 내려가다 보면 전신 거울이 있다. 그리고 한 번씩 그 전신 거울 앞에서 내 상태를 점검해 본다. 대부분 앞모습의 상태를 점검하기에 나의 뒤는 어떻게 보이는지 알 수가 없다. 나뿐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을 관찰해 보면 대부분 거울을 보고 지나가지만 자신의 뒤 모습까지 거울에 비춰 보는 사람은 잘 없었다. 분명 바지는 계속 찢어져 있었겠지만 그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나는 부끄럽지 않았다. 바지가 찢어졌다는 것을 알아챈 순간부터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살다 보면 의도적이거나 혹은 이번처럼 의도적이지 않게 부끄러운 일을 하거나 당할 때가 있다. 사실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은 너도 나도 이 상황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동의해야만 부끄러운 일이 된다. 그리고 부끄러운 일이더라도 내가 인지하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니게 된다.


 윤동주 시인럼 시처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이 살고 싶다. 부끄러운 일을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사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나의 삶을 돌이켜 보면 난 참 부끄러운 일들을 많이 했다. 바지의 구멍처럼 나에게 구멍이 있었다. 하지만 참으로 감사한 일은 나에게 구멍 난 곳을 알려주는 이들이 주변에 많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주는 그들 덕분에 지금 나는 앞으로 조금이라도 덜 부끄럽게 살 확률이 올라갔다.


  이름 모를 옆자리에 앉은 그분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리고 사과의 말도 전하고 싶다. 아침부터 못 볼 것을 보게 했고, 의도치 않게 내적 갈등을 겪게 했으니 말이다. 입장을 바꿔서 과연 내가 바지가 찢어진 이성을 우연하게 보게 되었다면, 나는 그 사실을 말해줄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과거에는 모른 척 지나갔겠지만, 아무래도 말해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분처럼 말이다. 누구나 그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모르기 때문이다.



<찢어진 바지 이야기의 저주>


 바지가 찢어진 다음날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30년 지기 친구를 3년 만에 만났다. 나는 간단하게 맥주 한잔 하며 안주삼아 바지가 찢어진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친구에게 바지가 찢어진 것을 타인에게 보여준 경험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친구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몇 시간 전 그의 바지가 직장 동료 앞에서 찢어졌다고 했다. 그것도 앉을 때 쭉 하고 찢어졌다는 것이다. 그도 웃고 나도 웃었다. 혹시 모른다. 누군가 이 이야기를 읽고 다음날 바지가 찢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지. 찢어진 바지 이야기의 저주는 아직 끝이 아닐지도.


 마지막으로 팬티는 위생을 위해서도 입지만, 바지가 찢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꼭 입어야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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