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지옥을 선의로 포장하는 사람들
나의 삶에서 가장 자신감이 넘쳤던 시절은 갓 군대를 제대했던 22살이었던 것 같다. 아마 대한민국 남자들 중에서 대부분이 이 시기에 가장 자신감이 넘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2년 동안 사회와 격리되어있어서 사회에 대한 비현실적인 상상을 할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대 후 세상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그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군대에서 우연히 책을 읽다가 워킹홀리데이라는 비자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제대 후 아르바이트를 하며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했다. 당시 아르바이트 시급은 3000원이 넘지 않았고, 한 달 급여는 100만 원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호주를 가기 위해 열심히 일하던 어느 날 군대에서 유일하게 친했던 선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 선임은 나보다 6개월 빨리 제대를 하였고, 제대 후 내가 위병조장으로 근무할 때마다 종종 전화를 했었다. 그는 제대 후 온게임넷이라는 방송국에서 일을 하는데, 처음 하는 일이지만 재미있다고 했다. 특히 회식을 했는데 같이 일하는 여성분들이 많이 이쁘다고 자랑을 했었다. 그리고 그런 방송국에 지금 Staff 한 명이 그만뒀는데, 나에게 해볼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려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다.
<지역과 사람에 관한 일종의 편견>
돈도 돈이지만 갓 제대한 나는 한창 연애에 관심이 많았고, 대구 토박이로 서울 여자에 대한 일종의 환상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 환상이 없다. 서울 여자랑 연애를 해봐서 그런 건 아니고, 그런 환상을 가지는 자체가 어리석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대에 우리는 어디서든 자유롭게 살 수 있다. 나의 정체성을 지역으로 연관 짓는 것은 많은 차별과 불평등을 남길 수밖에 없다. 결국 사람을 볼 때 어디에 사느냐 보다는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수면 위로 드러난 계획
그 당시 나는 김칫국을 잘 마셨다. 나에 대한 객관화가 부족했다. 철원 산골에서 2년을 참아냈기에 어떤 환경에도 잘 적응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던 시기였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만기 제대는 남자에게 짧지만 강한 근자감을 심어준다. 그리고 그 근자감은 오래가지 않는다. 제대 후 현실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면 군에 있을 때가 편했는데 라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하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다시 가고 싶은 건 아니지만......
부모님은 흔쾌히 서울 상경을 허락하셨고, 그렇게 며칠 만에 나는 방속국에 취업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서울역에는 선임이 마중 나와 있었다. 그는 오랜만이라고 나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방송국으로 이동했다. 지하철에서 내리고 버스를 갈아탔다. 버스를 타고 가며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고층건물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버스를 타고 가면 갈수록 5층 높이의 하얀 아파트 건물들만 보였고, 내가 살던 동네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브이에서 보던 서울의 모습이랑은 달랐다. 그래서 나는 선임에게 방송국은 외지에 있냐고 물어보았고 그는 그렇다고 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선임은 나에게 식사를 하자고 했다. 우리는 국밥을 먹었고, 자기가 직장을 소개해줬으니 나에게 점심을 사라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선임은 나의 넥타이 매무새를 고쳐주며 이렇게 말했다.
"너 나 믿지?"
나는 "당연히 믿으니까 여기까지 왔죠."라고 대답했다. 그때까지 나는 잘 몰랐다. 선임이 왜 내게 그런 질문을 했는지...... 하지만 왜 그 질문을 했는지 알게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좀 더 걷자 방송국의 직장동료가 나왔고 그는 나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겠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는 기어코 나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겠다고 가져갔다. 우리는 계속 걸어갔다. 아무리 봐도 방송국이 있을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어떤 10층높이의 건물에 도착했는데 5층은 태권도 도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선임과 선임의 동료와 함께 그 건물의 지하로 내려갔다.
내가 아무리 멀 몰라도 그곳이 방송국은 아니라는 것은 단번에 알 수가 있었다. 나는 면접을 위해 정장을 입고 왔는데, 그곳은 20대 초 중반의 사람들이 모두 정장을 입고 있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나는 한 테이블로 안내가 되었고 자신을 팀장이라 소개하는 한 남자가 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팀장은 나에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오는데 불편하지 않았어요?"
"아, 네."
시끌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팀장은 그런 나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다시 말을 했다.
"많이 놀래셨죠? XX 씨가 여기가 어디라고 소개했어요?"
"온 게임넷 방송국이라고 했는데, 여기 방송국인가요?"
팀장은 웃으며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 아 그랬군요. XX 씨가 백취생(가명)님에게 좋은 기회를 주고 싶어서 그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여기는 네트워크 마케팅회사입니다. 혹시 네트워크 마케팅이라고 들어보셨나요?"
그 당시 나는 네트워크 마케팅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리고 그 단어를 다단계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도 대구에 내려오고 나서 알았다. 그리고 그 팀장은 이왕 올라왔는데 선임을 믿고 교육을 한 번만 들어보라고 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선임은 휴대폰으로 부모님 걱정하시니까 방송국에 잘 도착했다고 연락하라고 했다.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것 딱 1주일만 교육을 받고 결정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동안 휴대폰을 끄고 자신에게 믿고 맡겨 달라고 했다. 지금 돌아가려 했지만 짐이 이미 내손을 떠났다. 나의 소지품을 가지고 온전히 그곳을 빠져나가려면 일단은 그들이 원하는 데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주일 뒤 내가 약속을 지키면 그들도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고, 휴대폰을 줬다. 그리고 나는 그날 저녁 교육을 들은 후 선임과 함께 어디인지도 모르는 어느 반지하방으로 갔다.
- 성공의 조건
제대 후 또 성인 남성들과 단체로 잠을 자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4평 정도 되는 반지하방에서 남자 10명과 잠을 잤다. 그들은 나의 잠자리를 방문에서 가방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를 했고 나의 머리는 벽으로 향했고, 맞은편 벽에 머리를 두고 있는 상대의 발은 나의 무릎까지 왔다. 그렇게 겹쳐서 잠을 잤다. 밤에 일어나서 화장실을 가려면 누군가를 밟을 수밖에 없었기에 도망치기도 어려웠다. 밤에 일어나자 2명의 남성이 일어나서 화장실까지 따라왔다.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확실히 기억난다. 갑자기 불이 켜지며 큰소리가 나서 눈을 떴는데, 정장을 입은 남자와 여자들이 내 주변을 둥글게 둘러서서 나를 내려 보고 있었다. 순간 너무 놀래서 잠이 확 깼다. 팬티와 러닝만 입고 잠들었던 20대의 건강한 나는 이불로 하반신을 가렸다. 나의 건강함이 처음으로 원망스러웠던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방을 나가고 나는 빨리 옷을 입었다. 그리고 곧 내가 잤던 방에 밥상이 차려졌다. 새벽 5시에 아침을 먹었다. 밥은 반공기 정도만 주었다. 너무 적었지만 더 달라고 하지 못했다. 모두 다 반공기 정도로만 식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아침식사를 마치고 어제 갔던 지하실로 다시 이동했다.
새벽 6시 정도에 전 날 갔던 지하실의 강당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 20대의 젊은 남녀들이 강당을 가득 메웠다. 우리는 둥글게 원을 그리고 앉았다. 인원은 대략 100명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냐하면 새벽부터 우리는 369게임을 했는데, 내가 68번째여서 박수를 쳤다. 나의 위치가 원의 한 절반쯤이었기 때문에 여기 모인 사람들이 세려보지 않아도 100명은 충분히 넘을 것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재미난 것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369게임을 할 때 미리 자기 숫자를 계산하면 도저히 틀릴 수가 없는데 틀려서 원안으로 벌칙을 받으러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억에 1시간 동안 대략 2번 정도 내 차례가 돌아왔던 것 같다. 그들은 벌칙으로 노래에 맞춰 춤을 췄다. 아침 6시에 369를 한 것도 놀랍지만, 아침부터 노래하고 춤추는 이 분위기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임(?) 혹은 행사가 끝나고 강의실로 갔다. 강사라고 불리는 20대의 한 여성은 네트워크 마케팅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명했고, 회사에서 판매하는 은나노 상품에 대해서 교육했다. 그렇게 서울에서 2번째의 날이 끝나갔다.
다시 반지하방으로 돌아왔고, 좁은 방에 둥글게 앉아서 자신들의 과거 이야기를 했다. 선임은 나에게 오늘의 수업이 어땠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열심히 듣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 일을 왜 하냐고 선임에게 물어보았다. 선임은 나에게 성공하기 위해서 하는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면 성공하냐고 물어보았다. 그날 밤 나는 성공의 조건을 알게 되었다. 또 한 그들이 성공의 조건에 맞게 생활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선임은 성공을 하려면 첫 번째로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를 새벽 5시에 깨웠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적게 먹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밥을 반공기 준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
그들은 무엇을 위한 성공인지 고민도 없이 매일매일 일찍 일어나고 적게 먹고 부지런했었다.
그렇게 교육을 마치고 일주일이 되는 날 회사 직원 모두가 강당에 모였다. 그리고 단상에 이사라고 불리는 사람이 이번 주의 교육생들은 단상으로 올라오라고 했다. 나는 단상으로 올라갔다. 단상에 올라가서 알게 된 것은 나처럼 지난주 이곳에 온 사람들이 7명이나 더 있었다는 것이었다. 매주 교육생이 들어오고 약 10명 이상의 남녀가 짝을 지어 새로운 교육생 한 명씩을 마크했던 것이다. 교육생끼리는 서로 대화할 기회가 없었다. 그렇게 단상에 올라가자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이사(그는 가만히 있어도 통장에 월 1,000만 원이 들어오고, 자신은 부산대를 졸업했다고 소개했다.)는 자신들과 함께 성공할 사람은 앞으로 한 걸음 나오라고 했다. 백 명이 넘는 직원들은 교육생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강당은 그 어느 때보다도 조용했다. 잠시 뒤 나를 제외한 7명이 앞으로 내딛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수백 명의 박수와 함성이 터졌다. 그들은 블루 배지를 받게 되었다. 참고로 배지는 3종류인가 4종류로 나뉘어 있었는데 블루, 실버, 골드가 있었고, 하나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는 않는다.
블루 배지 수여식이 끝나고 그 공간에서 배지가 없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그들과의 약속을 지켰고, 나는 그날 짐과 휴대폰을 돌려받고 집에 가려고 했지만, 그들은 나에게 한주만 더 교육을 들어보라고 권했다. 내가 사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누구보다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솔직히 나보다 5살 많은 사람이 와서 자신의 통장을 보여주며 너도 이렇게 살 수 있다고 하는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수업을 열심히 들으면 들을수록 네트워크 마케팅의 비 현실성이 너무 잘 보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 당시 나는 다단계라는 것을 몰랐다.
내가 강의를 들으며 그들과 함께 하지 않은 이유는 네트워크 마케팅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다. 만약 네트워크 마케팅의 구조가 수평이며 순환 구조였다면 정말 모두가 상생할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사람수는 한정되어 있고, 피라미드 형식으로 구조가 되어있기 때문에 맨 마지막에 있는 사람은 물건을 소비할 뿐 수익을 얻을 수는 없다. 나는 이 것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강사에게 물어보았지만 강사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제대로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300만 원의 수익을 달성하면 실버 벳지가 되는데, 그 방법은 두 가지라고 했다. 내가 물건을 사서 그 물건을 주변인들에게 파는 방법이 있고, 다른 교육생이 매출을 일으키면 내가 그 매출에서 일정 부분을 중계비로 가져가서 300만 원을 채우는 것이었다.
그들은 결국 나의 짐과 휴대폰을 주지 않았고, 계속 일주일만 더 교육을 들으라고 이야기했다. 한 명이면 힘으로라도 해보겠지만 10명이 똑같은 이야기를 하니 방법이 없었다. 결국 그날 어쩔 수 없이 그들과 함께 반지하 방으로 돌아갔다.
-내 인생의 첫 야반도주(夜半逃走)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말이 있다. 아마 그날은 내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정신을 바짝 차린 날로 기억된다. 나는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서 정말 고민을 많이 했다. 내가 어디를 갈 때마다 따라붙는 2명의 감시자를 떼어 놓고 어디에 있는지 모를 내 휴대폰과 나의 신상 정보가 들어있는 짐을 함께 가지고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선택한 방법은 손자병법의 36계 중 18계 <금적금왕:적을 잡으려면 우두머리부터 잡는다.>였다. 물론 이 18계를 떠 올려 실행한 것은 아니다. 그냥 나중에 책을 읽다가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이 18계와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뿐이다.
반지하 방에는 각 방마다 방장이 있었고, 방장은 10명 정도 되는 방원들을 관리를 했다. 내가 속한 방의 방장은 조직생활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그 당시 20대 후반의 그는 기억에 문신이 있었고 덩치가 좋았던 것 같다. 매너 있어 보였지만 그것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 이야기지 그렇지 않을 경우는 잔인해진다는 것은 이미 군대에서 만난 선임을 통해 배웠다. 나는 정중하게 방장에게 내가 살 테니 둘이서 술 한잔 하자고 했고, 그는 흔쾌히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술을 마시며 분위기가 무르익자 나는 방장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군대 생활하며 느낀 바도 있고, 남자로서 어떤 칭찬에 가장 기분이 좋은지 알기에 그는 나의 칭찬에 점점 마음을 여는 듯했다. 술을 마시고 반지하방으로 돌아가는 길, 방장은 짐과 휴대폰을 빼줄 테니 밖에서 기다렸다가 그것을 받아서 도망가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그곳에서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돈을 써서 돈이 없던 나는 의정부에 살던 군대 후임에게 연락을 해 하룻밤을 신세 지고 돈을 빌려 대구로 내려올 수 있었다.
-지옥을 선의로 포장하는 사람들.
서울역에서 대구로 내려가기 직전 그 선임에게 전화를 했다. 내 나름대로 마지막 배려였다. 그 선임을 그곳에서 나오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와 함께 성공을 하고 싶어서 이 일을 권했는데 네가 싫다고 하니 어쩔 수가 없네."
그는 진심으로 그 일이 우리에게 성공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전화를 끊고 씁쓸한 마음으로 기차를 타고 대구에 내려왔다. 아버지는 일주일 만에 내려온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그냥 방송국 사람들과 다툼이 있었고, 그래서 잘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몇 개월 뒤 나는 호주로 떠났다.
그 일이 있은 후 몇 년 뒤 신문에서 <거마 대학생>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그리고 내가 있었던 곳이 주변에서 그런 명칭으로 불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단속으로 다 사라졌지만,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거마 대학생>처럼 지옥을 선의로 포장해 말하는 사람들이 넘쳐 나고 있다. SNS에서 고수익 알바라고 팔로우 요청이 오기도 하며, 문자나 전화로도 연락이 온다. 심지어 자영업을 할 때 나의 매출을 위해 지옥으로 가는 길을 선의로 포장해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오늘도 지옥으로 가는 길을 선의로 포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나의 선임처럼 자신이 피해자이면서 진짜 그것이 선의라고 믿는 경우도 있다.
<선임과의 마지막>
호주에서 1년을 보내고 다시 대학교에 복학을 했을 때, 모르는 전화번호로 한통의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아보니 그 선임이었다. 그는 나에게 호주 잘 다녀왔냐고 근황을 물어보았고, 나는 잘 다녀왔고 잘 지낸다고 대답했다. 그는 다단계일을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한다고 말해주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다단계 일을 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그 일에 대해서 일말의 후회도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우리 다시는 연락하지 말자고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과거부터 잘못된 것을 알고도 실행하는 사람과 잘못된 것을 모르고 실행하는 사람 중 누가 더 나쁜가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었다. 사실 이문제에 대해서 정답은 없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만약 주변에 저런 사람이 있다면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옥이라는 것을 알고 선의로 포장하든, 지옥이라는 것을 모르고 선의로 포장하든 그 선의를 포장한 사람은 언젠가 우리를 지옥으로 안내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