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나를 둘러싼 세상은 나에게 많은 고통을 준다.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은 건지, 내가 그렇게 생겨먹은 건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앞으로 알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수많은 선구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고, 자신의 고민을 기록으로 남겼다. 해결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그 기록은 그들이 작성한 기록과 타인이 바라본 그에 대한 기록에서 오는 간극 때문에 실효성을 잃어버린다. 즉 인간에게는 저마다의 상황이 있고, 머리로는 알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이 존재한다.
나는 그 간극이 우리가 미래에 일어날 일들과 현재에 발생하고 있는 일들의 관계를 100%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일 어떤 주식이 급등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오늘 그 주식을 안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식이다. 물론 어느 정도 Data를 기반으로 고민해 보면 대략적인 예측은 가능하지만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Data에 영향을 주는 인자를 100%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확신. 모든 것에 확신이 들지 않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거 같다. 분명 나의 2년간의 장기 출장은 끝이 났다고 공식적인 이야기가 오갔지만, 새해가 시작하기 전에 다시 이야기가 나왔다. 나를 대신한 출장자와 현지 주재원들의 관계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올해의 마지막은 한국에서 보낼 수 있지만, 새해의 시작은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 되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런 불확실한 상황을 대비해서 나름 많은 연습을 했고, 미진하지만 어느 정도 연습의 효과는 있다는 것이다. 그 연습은 바로 실시간으로 내 상태를 관찰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출장은 알 수 없지만, 나의 출장은 회사 혹은 숙소 생활이 전부였다. 특히 숙소는 거의 잠만 자는 곳이었고, 나 혼자만 생활하는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심리적 고립감에서 오는 항상 내가 극복해야 할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생겼다.
책을 읽다 보면 가끔 이 외로움에 대해 위로를 받을 때가 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감정을 경험하는지 모르지만, 외로운 느낌을 잊게 되면서 위로를 받는다. 출장은 물리적인 고립감과 정신적인 고립감을 동반한다.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어도, 외로움을 느낀다. 누군가 이런 인간의 본연적인 외로움에 대해서 많은 설명을 했고, 대체로 이런 외로움은 인간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한다. 난 주변에 좀 대화가 편한 상대가 있으면 좋겠지만, 2년 동안 살펴보았지만 없는 것 같다. 이곳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의 외로움을 위로해 줄 수가 없었다. 그냥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지쳐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지친 사람은 누군가를 위로해 줄 수 없다. 상대적으로 내가 느끼기에 그들보다 덜 지친 내가 오히려 그들을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지친 내가 위로받기 위해 책을 읽거나 사색하는 시간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쇼펜하우어와 관련된 서적을 읽으면 위로가 된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살았거나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모든 사람의 본질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나는 그것을 본질(성격)과 가치관(살면서 겪는 경험에 대한 정의)이 합쳐져 하나의 성향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치관은 살아가며 변하기에 성향도 살면서 어떤 폭 안에서 변한다. 타고난 성격이 있기에 성향 자체가 완전 180도 바뀌는 경우는 잘 없다. 물론 본질을 뒤흔들만한 엄청난 경험을 한다면 그것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하지만 확인해 볼 방법이 없는 추측일 뿐이다. 나는 타인이 될 수 없고, 심지어 살면서 나는 본질을 뒤흔들만한 엄청난 경험을 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만약 그런 일을 경험해서 내가 기존의 나와 다르다는 것을 나는 과연 인지할 수 있을까? 계속 나는 나이고, 타인은 타인이다. 내가 만약 가전제품처럼 Spec을 가진 Plan안에서 설계되어 있는 존재였다면, 그 Spec을 비교하여 나의 변화를 알 수가 있지만, 모든 인간은 규격 외에 존재한다. 그래서 사물과 구분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살면서 자신이 존재하게 된 Plan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졌다.
과거 고전 물리학의 발전과 더불어 헤겔의 이성의 철학이 유행하던 시기가 있었다. 현실은 이성적으로 파악 가능한 것으로 판단했고, 그렇게 세상은 발전했다. 어떤 개념이나 상태가 정립되면 그 안의 반정립되는 것 (모순)이 드러나며 그 두 가지 스스로를 부정하며 다음으로 발전한다는 이론이다. 처음 이 이론을 접했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신처럼 완벽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자기 안에 모순이 있을까? 세상에는 모순을 가진 존재도 있지만, 그 반대가 신과 같은 모순이 없는 존재도 분명 있지 않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칸트는 신이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이성적 믿음의 대상이라고 했다. 세상에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믿어야 하는 것도 존재한다. 아마 그것이 나이고, 나와 다르지만 닮은 타인이다. 가끔 타인에게서 신을 볼 때가 있다.
이성의 한계에 대해 고민하며 나타난 철학자가 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런 고민을 했을 것이고, 현재 많이 알려진 사람은 칸트와 쇼펜하우어이다. 세계는 궁극적으로 이성적 구조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헤겔의 철학은 중요하다. 현재 만들어진 대부분의 것들이 어떤 이성적 구조를 바탕으로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바닥은 단단해야 건축물을 올릴 수 있고, 이런 생각들은 단단한 땅을 만들어준다. 헤겔은 사회와 정치학적인, 즉 나의 밖에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준다면, 쇼펜하우어는 그래서 내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주었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나라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가끔 책이나 미디어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켰지만,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한 위인(?)에 대한 객관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보며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나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물론 정답은 없는 문제이기에 그냥 생각만 해본다. 왜 우리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걸까?
모든 사람들은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나도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의지들은 나(주체)에게 표상으로 정의된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내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하는 것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있다고 말한다. 여러 의지들의 표상을 본다. 시간과 공간 안에서 근거율에 근거하여 때로는 연관성을 찾을 수 있지만, 나도 나의 의지를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타인의 의지를 잘 알 수 있을까. 우리는 타고난 의지대로 발현되고, 그것은 어떻게 조정할 수가 없다.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을 깨우친 다음에야 드는 생각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나마 가장 알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나이다. 나는 나를 주체와 객체로 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것이 나를 알기 위한 연습의 시작이었다.
물론 이 연습의 효과는 미진하다. 아마 죽기 직전까지 계속해야 할 연습일 것이다. 새해는 밝았고, 앞으로도 내가 통제 불가능한 일들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계속 일어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살아야 할 것이다. 모든 인간들은 물론 죽겠지만, 대체로 자신의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글을 쓴 작가분들의 책을 읽으면서 이런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들은 도전 해보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후회가 남는다고 했다. 그리고 남은 날을 더 후회 없이 살기 위해 노력한다. 마지막으로 죽음마저도 자신의 삶 Plan안에 들어있다고 인정한다.
결론은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삶이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였다. 아마 출장은 피하지 못할 것이다. 확신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렇기에 그냥 올해는 작년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경험과 감정을 공유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이제 실천만 남았다. 2026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