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 중 사색 (21)

나는 정말 너를 사랑하는 걸까?

by 백취생



26년이 시작되었고, 출장도 다시 시작되었다.


분명 2025년을 마지막으로 당분간은 출장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출장지의 현지 동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었다. 그런데 다시 출장을 나왔다. 다시 이곳에 나오니 반가운 마음과 함께 마치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한 마지막 작별 인사가 떠올라 혼자서 좀 부끄러웠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프신 이후로 올해는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한 계획이 시작부터 차질이 생겼다.


한 영화가 떠오른다.


<<어쩔 수가 없다.>>


대한민국의 제조업의 황금기는 지나갔고, 많은 공장들이 해외에 생기고 있다. 나의 회사 생활도 국내를 고집하다가는 도태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것이 이번 출장을 거부하지 못한 이유였다. 직장 생활과 자영업을 경험하며 대세의 흐름을 꼭 따라야 할 필요는 없지만, 흐름에 반하거나 놓치면 생존에 불리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어떤 선택을 할 때 흐름을 보며 나아가야 할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정말 중요했다. 첫 직장에서 흐름만 좇다가 지쳐서 쓰러졌었다. 그리고 자영업을 하며 나만의 신념만 쫒다가 경제적으로 파산할 뻔했다. 그래서 항상 무엇을 선택할 때는 자신의 신념도 중요하지만 주변의 흐름도 참고해서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삶의 태도는 너무 자신의 내면만 집중해도 안되며 그렇다고 너무 주변 눈치만 봐서도 안되었다.


구구절절 길었지만, 어찌 되었든 내 주변의 흐름을 참고하여 26년 1월에 다시 출장을 나왔다. 그래서 20화로 끝날 줄 알았던 나의 출장 중 사색은 좀 더 길어질 것 같다. 다만 그로 인해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매년 9개월씩 다니는 출장이 이제 나에게 일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출장지에서 겪는 특별한 사색을 글로 남기고 싶었지만, 이제 출장은 나에게 전혀 특별하지 않는 일상 범주의 경험으로 들어왔다.


아무리 특별한 것이라도 과하면 빛을 잃어버린다. 가끔 먹는 라면이 맛있듯이, 일상에서 한 번씩 벗어나는 경험은 일상에 생기를 더해주지만, 이 경험이 일상이 되어버리면 오히려 생기를 잃어버린다. 하지만 지난 삶을 돌이켜 보면 인생은 항상 이런 식으로 흘러 왔다. 아무리 새로운 것이라도 결국 일상이 되어버렸고, 일상이 되면 더 이상 새롭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이 늘 새로울 수 없기에 내 안에서 나만의 새로움을 찾는 방법을 고민해야 했었고, 그렇게 찾은 방법이 독서와 사색이다.


이번에는 김혜남 작가님의 책을 가지고 출장을 나왔다. 김혜남 작가님은 파킨슨 병을 앓고 계신다. 어쩌면 그 이유가 이번에 작가님의 책을 여러 권 읽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비록 성별은 다르지만 아버지의 삶은 김혜남 작가님의 삶과 닮은 부분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친 형제의 죽음을 경험했고, 자신의 커리어를 쌓기 위해 노력도 했지만 한집의 가장으로서 그리고 한집의 장남으로서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그러다 40대 초반에 간암으로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어린 나와 동생들을 키우기 위해 계속 일을 하셨다. 아버지는 나와 동생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평소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하셨다. 파킨슨과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기 1년 전, 아버지는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가끔 그렇게 듣기 싫었던 아버지의 잔소리가 그리울 때가 있다.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장남인 나에게 장남으로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 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잔소리가 아닌 조언이었다는 것을 불과 몇 년 전에 깨달았다. 그래도 내가 지금 한 집의 가장으로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아버지의 조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비록 지금은 언어로 표현하실 수 없지만 아버지의 눈은 항상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 보였다.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를 아버지의 눈을 볼 때마다 생각했었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만족하실까? 아니면 허무하실까? 가정을 위해 최선을 다한 한 아버지의 마지막 삶이 요양원에서 홀로 계셔야 한다는 사실에 너무 마음이 불편하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집에서 돌볼 수도 없는 그런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아버지는 이해하실까? 상실의 아픔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아픔이지만, 다가올 상실에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 <나는 정말 너를 사랑하는 걸까?>>


작가는 사랑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여러 환자들과의 상담을 통해서 나름의 이유를 찾아가는데, 그 이유의 원인은 대부분 환자의 어린 시절 환경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것 같았다. 원인이 있어야 대책을 수립할 수 있기에, 대부분의 정신 분석학자들은 이런 사실을 기반으로 치료방법을 모색한다. 사실 나도 100%는 아니더라도 어린 시절의 환경은 성인이 되었을 때, 대인 관계에 영향을 준다고 믿는 편이다.


나의 존재는 장남이었다. 남자 중 가장 먼저 태어났다는 의미도 있지만, 무엇이든 대표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그리고 대표는 무엇이든 잘해야 했다. 장남인 덕분에 많은 혜택이 있었다. 형제자매 중 가장 오랜 시간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학교를 들어가고 알게 된 것은 장남은 장남이라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장남다운 행동을 해야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거였다. 과연 사랑을 줄 만큼 행동하는 타인이 주변에 몇이나 될까? 솔직히 아내도 종종 미울 때가 있는데...... 아마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물론 입장 바꿔 생각해 봐도 그렇다. 세상 누가 내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사랑하겠는가?


아직도 기억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지금의 아내와 연애할 때 아내에게 크게 혼난 일이 있었다. 같이 치킨을 먹는데 내가 두 개의 닭다리를 먹었다. 물론 한 번에 두 개를 먹은 것은 아니고, 내가 먼저 닭다리를 먹고, 아내도 다른 부위를 먹었다. 그리고 닭다리가 남아 있길래 하나를 더 먹었다. 물론 닭다리를 퍽퍽한 살보다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퍽퍽 살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닭다리를 정말 좋아해."라고 한다면 나는 두 개의 닭다리를 다 먹으라고 주었을 것이다.


"닭다리 두 개를 먹는 것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행동이야."


아내가 한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몰랐다. 닭다리를 두 개 다 먹는다는 것이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 행동이라는 것을 정말 몰랐다. 그런 사례는 <<인간 관계론>>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그날 후부터 아내와 치킨을 먹을 때 닭다리는 아내와 딸에게 모두 주거나, 닭다리로 만든 순살치킨만 먹었다. 심지어 그날 이후 지인들과 치킨을 먹을 때도 마지막까지 닭다리가 남는 경우가 아니면 닭다리를 먹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것은 결국 감정이 아니라 행동과 말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사랑으로 대변되는 말과 행동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과 행동을 보고 상대방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는다.


나는 정말 당신을 사랑하는지 모르겠으나, 당신이 사랑을 느끼는 말과 행동을 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특히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읽었을 때, 나의 이런 생각과 행동이 옳다는 지지를 받는 느낌이었다. 나의 진심은 알 수 없을지라도, 타인이 사랑을 느끼도록 말과 행동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사랑 아닐까?


그런데 때로는 정말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상대방이 알아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요즘 타국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부모님 생각을 자주 한다. 나는 내가 정말 당신을 사랑하는지 혹은 당신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지 고민한다고 시간을 헛되이 보냈다. 그 시간에 사랑을 더 많이 느낄 수 있도록 말과 행동을 하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나는 어리석어 모든 것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진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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