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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취생 Jun 04. 2024

출장 중 사색 (6)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30대 후반 독서에 흥미를 가진 이후로 항상 가방에 읽을 책을 한 권씩 넣어 다니는 습관을 가졌다. 출퇴근 시간이나,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에 틈틈이 책을 본다. 지난 출장에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이라는 책을 들고 왔었다. 한 권 밖에 되지 않는 책이라 3개월의 출장 기간 동안 읽을 만한 양이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나올 때는 3권을 가지고 왔다. 책 무게가 꽤 부담이 되지만, 책 읽고 사색하는 것이 현재 나의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라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3권도 이미 다 읽어 간다는 것이다. 이제 출장 나온 지 3주가 다되어 가는데 말이다. 원래 속독이 되지 않아 책 읽는 속도가 늦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나도 모르사이 예전보다 활자를 읽어나가는 속도가 늘었나 보다. 혹은 책에 익숙한 단어가 많았거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과거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조금 읽어보니 이와 비슷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읽으면서 영화<<인셉션>>이 이 소설에서 영감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소설 속 주인공이 오래된 꿈을 읽는 도시의 모습은 위에서 바라보는 뇌의 모습과 비슷했다고 기억한다. 아마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렇게 묘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SF적이고 정말 하드보일드 한 부분이 있어 흥미롭다고 느꼈다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약간 철학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 많다고 느꼈다. 특히 그 불확실한 벽이라는 의미가 철학적인 메시지가 강했다.


 사실 철학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내가 어떤 소설을 읽고 철학을 운운하니 우습긴 하지만 사실 철학이라는 단어가 어떤 현상에 대한 탐구라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 단어이다 보니 오히려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위에서 이야기한 '철학적인 메시지가 강하다'는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해 볼만 한 것이 많았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또한 불 확실한 이라는 표현 역시 철학과 잘 어울린다. 언제나 사람의 생각은 불확실하다. 그리고 그 불확실한 생각안에서 확실한 어떤 것을 생각해 낸다. 하지만 그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항상 예외가 있고, 그것이 어디까지 확실한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확실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현상 혹은 현물들은 불확실한 부분이 많다. 그래서 생각할 여지도 많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주인공의 상반된 성향이 잘 표현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성향은 우리의 모습과도 비슷한 것 같다. 예를 들어 나는 가끔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 솔직히 자주 있었다. 매번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나는 2가지 상반된 성향의 나를 만날 수 있다. 도망치는 나와 순응하는 나......


 나는 도망치는 동시에 순응한다. 이 상반되는 것 같은 단어가 함께 쓰일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실 도망치는 것과 순응하는 것은 다른 것 같지만 하나의 시간이라는 좌표 안에서는 같은 말이 된다. 왜냐하면 도망치는 것이 마치 현실에 순응하지 못해 일어나는 행위처럼 보이겠지만, 오히려 현실에 순응하기 위해 일어나는 행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퇴사를 현실에 순응하지 못해 도망치는 것이라 표현하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오히려 퇴사를 하지 못하는 것이 다가올 현실에 순응하지 못할 것 같아 도망치는 것이라 표현한다. 결국 시간선 안에서는 두 가지가 함께 표현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도 다른 도시지만 하나의 시간 안에서 표현된다.


 나는 이런 우리의 성향을 소설에서 본체와 그림자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보통 그림자는 본체에서 따라 나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본체가 도망가면 그림자는 순응하고 따라간다. 하지만 도시에서 주인공과 그림자는 분리가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누가 그림자고 누가 본체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도망치는 주인공과 순응하는 주인공은 분리되어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아간다.


 언제부터인가 모든 책을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라고 추측(고민 혹은 사색)하면서 읽게 되었다. 이렇게 추측하면서 읽는 이유는 과거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다가 도출한 결과 때문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내가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관점과 생각이 누군가에게 영감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일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마음으로 글을 쓴다고 누구에게나 영감을 줄 수 있지는 않다. 결국 이야기의 완성은 읽는 사람인 독자에 의해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작가의 책을 완성하기 위해서 작가의 의도를 추측하면서 읽는다.


 그런데 이는 마치 <도시 그 불확실한 벽>의 주인공이 도시의 도서관에서 오래된 꿈을 읽는 장면과 비슷하다. 처음에 주인공은 그냥 오래된 꿈을 읽었지만, 그 꿈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래된 꿈 읽기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하지만 소설의 말미에는 다른 도시에서 주인공의 본체가 만난 건지 그림자가 이미 만난 건지 알 수 없는 한 소년과 하나가 되며 진정한 꿈 읽기를 완성한다. 일종의 타인의 의식과 나의 의식의 통합이다. 누군가와 의식을 공유하는 현상 그것은 그 의식을 공유받는 사람이 의식을 공유해 주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가가 결정한다. 그리고 그것은 일단 의도를 추측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가끔 나의 추측이 맞다고 느낄 때 나는 작가와 의식이 연결되었음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런 의식의 공유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기쁨을 준다. 이는 마치 내가 어제의 나보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듯한 느낌과 비슷하다.


 인간은 외롭고 고독한 존재이다. 그리고 누구나 본체와 그림자로 표현되는 그런 상반되지만 하나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혹은 작가와 독자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것을 둘로 나눌 수 있지만 둘로 나눌 수 없다. 살다 보면 가끔 지금의 삶에 크거나 작은 이질감을 느끼고 현재 내가 속한 도시 (어떤 장소)에서 도망치거나 혹은 순응하거나를 선택한다. 그러다 보면 과연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내가 진정 나인지 혹은 나인 척을 하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과연 나의 본모습은 무엇이며 어디에 살고 있는 내가 진정한 나일까? 하지만 결국은 그 두 가지 모습 모두가 나인 것을 인정하고 두 곳 중 한 곳에 있는 나에게 용기를 가지고 가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내가 있는 새로운 세상으로 떨어지더라도 나머지 한쪽인 내가 나를 잡아 줄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나와 또 다른 나를 가르는 불확실 한 벽, 그 벽을 넘어서 나는 진정한 내가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내가 책을 읽으며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추측 혹은 생각해 본 내용을 글로 써봤다. 그런데 그 시간 또 다른 나는 그 책에서 나오는 표현들에 주목했었다. 작가가 소설에서 사용하는 표현들에 감탄하면서 독서를 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렇습니다. 그가 당신을 받아줄 거예요. 그렇게 믿으세요. 당신의 분신을 믿는 건 곧 당신 자신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옐로 서브마린 소년의 말-


 세상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은 나 자신이다. 하지만 나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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