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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취생 Jun 10. 2024

출장 중 사색 (7)

오묘한 그 감정. 사랑에 관하여

 타인의 연애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이 나의 지론(조언해봐야 듣지 않고, 괜히 불편한 상황만 생기는 경우가 많다.)이지만, 이상하게 타인의 연애 이야기는 언제나 재미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은 대부분 즐겁고 무난한 연애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들은 'happily ever after'인 연애이야기는 물어보지도 않고 잘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왜 잘 안 풀리고 고생하는 연애이야기가 더욱 흥미진진할까? 추측건대 아프고 힘든 연애이야기는 왠지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하는 안심과 서로에게 위로가 되기 때문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남의 연애에 왈가왈부하지 않고 듣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잘 안된다는 것이 문제다.


 타인의 연애에 괜히 말을 꺼내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모든 연애는 정답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나의 연애도 포함된다. 일단 연애할 때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랑은 상대방이 있어야 가능하기에 연애는 상호 작용이 일어난다는 특징이 있다. 다시 말해 생물이 환경에 영향을 받으며 진화하 듯 연애도 그런 비슷한 부분이 있다. 모든 진화가 그러하연애도 서로의 환경에 적응한 연애만 살아남고 그 외의 연애는 멸종한다. 따라서 인정해야 한다. 연애는 변화하며 그에 따라 사랑의 종류도 변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살아남기 위한 진화이다. 설렘으로 시작한 감정이 안정감으로 변하지 못하면, 그 연애는 멸종할 수도 있다. 따라서 설렘도 사랑이고 안정감도 사랑이다. 이는 통계적인 결과지만 물론 설렘을 속하는 사람들도 낮은 확률로 있을 것이다. 통계는 모집단의 특징을 설명할 순 있지만 모집단일 순 없다.


 "퇴근하고 집에 갔는데 그날 저녁 아내가 나를 유혹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가족끼리는 이러는 거 아니야라고 말했어."


 근무 중 휴게시간, 커피 한잔을 하며 담소 중 한 동료의 농담에 모든 사람이 그 말을 듣고 웃었다. 물론 그 말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지만, 아직도 아내의 유혹에 설레는 나도, 이렇게 편하게 아내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동료도 아직 사랑을 하는 중이다.

 


  동생이 연애를 시작했다. 거의 10년 만에 시작한 연애이다. 10년 전 동생의 연애가 종말을 맞았다.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끝이 났다고 들었다. 그 후 동생은 연애와 담을 쌓고 회사 일이나 자신의 취미 활동에 몰입하며 살았다. 그 몰입만이 자신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 굳게 믿는 것 같았다. 형의 입장에서 동생의 몰입할 대상이 한정되었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상처는 아물지만 흉터를 남긴다. 그리고 그 흉터는 일종의 교훈이 된다. 그리고 그 교훈은 두 가지로 나뉜다. 비록 흉터가 되더라도 결국 상처는 아문다는 교훈과, 또다시 이런 흉터를 만들고 싶지 않다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이 그것이다. 항상 고통은 성장을 동반하기에 두 가지 교훈은 모두 옳을 것이다. 하나는 상황의 인정을 통해 성장하며 또 다른 하나는 자기 개발을 통해 성장한다. 다만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만 옳다고 생각하게 될 경우 다음 연애도 종말 할 확률은 높아진다.


 동생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교훈에 더욱 집중했다. 자신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 타인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동생의 말에 따르면 그는 최선을 다했지만 이별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이해되지 않은다고 말했다. 나는 그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까 걱정이 되었다. 남동생은 항상 후회 없는 사랑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의 지론에 반하지만 내가 배운 사랑의 다른 하나의 교훈을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


 상처를 받지 않고 상처를 주지 않는 것에만 집중하면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많이 줄어든다. 나는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두 가지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바로 육체적인 표현과 정신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우리는 대체로 정신적인 표현은 고귀한 반면 육체적인 표현은 조금 저급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들이 있는데, 그중 나는 유교적 영향이 한 몫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공자는 정성과 격식 모두가 중요하다고 했다. 어느 하나 빠져서는 안 된다고 했다. 정성과 격식을 가지고 이미 돌아가신 조상에 대한 감사의 표현을 하는 것처럼 나의 옆에 살아있는 존재에 대한 감사의 표현도 해야 한다.


 나는 육체적인 표현을 격식, 정신적인 표현을 정성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정성도 중요하지만, 격식도 중요하다. 하지만 격식(육체적 표현)은 지역마다 다르고 살아온 환경마다 다르기에 의도치 않게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따라서 때로는 상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연애할 때 남동생은 이 격식(육체적인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동생은 나에게 말했다.


  "너무 소중해서 지켜주고 싶었어."


그래서 내가 물어봤다.


"혹시 여자친구가 너에게 지켜달라고 했나?"


곧 30대 중반이 되는 남녀가 2개월간 손 잡는 데까지 밖에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동생에게 한말이다.


  격식과 격식이 만나면 오해 혹은 상처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오해가 생기고 아물어야 새로운 그 연애에 맞는 격식이 생겨난다. 그리고 거기에 정성이 더해지면 그 연애는 생존 확률이 올라간다. 만약 정성(정신적인 표현)이 없고 격식(육체적인 표현)만 있다면 이는 이것대로 문제이다. 요즘 이런 것을 대표하는 단어들도 종종 미디어에서 접했는데, 모르겠다. 나의 생각이 구식인지. 어찌 되었든 나는 상처를 입는 것에 대해 너무 둔해지지도 말고 반대로 상처를 입는 것에 대해 너무 겁먹지도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육체적인 표현과 정신적인 표현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으로 실천해야지만 오묘한 감정인 사랑을 진정으로 느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생은 이번에 만난 사람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았다. 너무 소중하다고 표현을 했었다. 그래서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연애에서 최선은 자기가 잘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 라니라 상대가 원하는 것이 자기가 잘 못하는 것일지라도 해주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동생에게 말해주었다.


  남에게 말하길 부끄럽고 부족한 연애를 한 내가 그래도 동생 앞이라고 아는 척을 해봤다. 하지만 나도 잘 안 되는 이런 부끄럽고 건방진 말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나는 이미 유부남이기 때문이다. 사실 순전히 운이 좋아 결혼했지만  사실은 어찌 되었든 나를 연애를 잘하는 사람처럼 포장해 준다.


 아무쪼록 동생이  전 헤어진 사람과 다시 연애를 하던 다음 사람을 만나 연애를 하던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이 오묘한 감정을 한번 음미해 보길 바랄 뿐이다.




사진: UnsplashLeonardo San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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