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구조와 기준으로 채울까
앞에서 유엔의 고령화 정책과 우리나라 복지서비스 안내서를 나란히 놓고 보았다.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시스템과 환경, 지표”의 언어로 들여다보면, 안내서에는 적혀 있지 않은 빈칸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이 듦을 바라보는 시선, 지역사회와 도시의 구조, 통합돌봄과 장기요양의 질, 말기와 보호자 지원, 재정과 인력, 재난 상황까지.
그렇다면 질문은 자연스럽게 이렇게 이어진다.
“이 빈칸들은 정말로 비어 있는 걸까, 아니면 우리가 아직 잘 보지 못한 걸까?”
이번 글은 그 물음에서 출발한다.
국제 프레임워크가 비춰 준 빈틈 사이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안내서의 행간과 별도의 제도 속에서 이미 움직이고 있는 우리 정책들의 얼굴이 드러난다. ‘없는 것’만을 세는 대신, ‘이미 시작된 것들’을 한 번 짚어보고자 한다.
국제사회가 말하는 고령화 대응의 기준은 “무엇을 얼마나 주느냐”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람이 늙어 가는 전 과정을 따라 어떤 시스템을 만들고, 어떤 환경을 조성하고, 무엇을 어떻게 측정하며 정책을 고쳐 나갈 것인지를 함께 묻는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 「2025 나에게 힘이 되는 복지서비스」 안내서만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안내서는 이용자 눈높이에서 “어디에 신청하면, 무엇을, 얼마나 받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지도에 가깝다. 반면 국제 프레임워크는 그 지도가 놓여 있는 나라 전체의 설계도를 함께 그려보자고 제안한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나라에도 이미 그 설계도를 채워 가기 위한 여러 시도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다. 다만 안내서에는 아직 다 드러나 있지 않을 뿐이다.
예를 들어, 국제 기준은 노인의 돌봄을 “서비스 하나하나”가 아니라 지역에서 사람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통합체계로 보자고 제안한다. 병원 진료, 장기요양, 방문돌봄, 주거와 복지가 제각각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 안에서 연결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2024년에 제정된 「의료·요양 등 지역 돌봄의 통합지원에 관한 법률」, ‘돌봄통합지원법’이 그 역할을 맡으려 하고 있다. 2026년 시행을 앞두고, 지역 단위의 전담조직과 전문인력, 정보 연계, 평가체계를 갖추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안내서만 보면 “돌봄 서비스 목록”이 먼저 보이지만, 그 뒤에서는 이 서비스를 지역에서 한 덩어리로 묶어 주려는 법과 제도가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병원에서 지역으로 돌아가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국제 프레임워크는 ‘퇴원 뒤에 벌어지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본다. 약은 제대로 챙겨 먹는지, 집은 안전한지, 돌봐 줄 사람이 있는지, 필요한 서비스와 연결됐는지. 우리나라 역시 이를 위해 ‘급성기 환자 퇴원지원 및 지역사회 연계’ 시범 사업으로 퇴원지원팀을 꾸리고, 평가–계획–연계–모니터링 절차를 표준화하는 실험을 이어 가고 있다. 어느 병원은 잘되고, 어느 병원은 전혀 안 되는 “운”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서 치료를 받아도 일정 수준의 케어 전환을 보장하자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국제 기준이 강조하는 또 하나의 축은 1차 의료 중심의 만성질환 통합 관리다. 나이가 들어 병원 문을 자주 두드리게 되는 이유의 상당수는 고혈압, 당뇨병 같은 만성질환이다. 이를 동네의원에서 꾸준히, 사람 중심으로 관리하자는 취지에서 우리나라에서도 1차 의료 만성질환관리 사업이 본사업으로 전환되었다.
환자가 목표를 함께 정하고, 스스로 관리할 수 있도록 돕고, 필요하면 영양·운동·복지서비스와 연계하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 이것 역시 안내서에는 “만성질환 관련 지원”이라는 조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1차 의료가 고령화 시대의 허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수가와 시스템을 재구성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장기요양 분야에서도 국제사회는 “얼마나 많이 이용하느냐”보다, 얼마나 안전하고 존중받는 환경에서 어떤 수준의 질로 서비스를 제공하느냐를 더 중요하게 본다. 우리나라도 장기요양기관 평가 고시를 통해 기관 운영, 환경과 안전, 권리와 책임, 서비스 과정과 결과를 꾸준히 평가하고 공개하는 제도를 운용 중이다.
여기에 더해 2025년부터는 장기요양기관에 유효기간을 두고 갱신 심사를 거치도록 하는 ‘지정 갱신제’가 도입되어,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기관은 자연스럽게 정리되도록 하는 장치가 마련되었다. 노인복지시설의 인권과 안전을 다루는 지침도 만들어졌다. 이는 국제 프레임워크가 요구하는 ‘장기요양 시스템 차원의 질·안전·지속가능성’에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려는 움직임으로 읽을 수 있다.
삶의 마지막 구간, 말기·완화의료에 대한 시각도 중요하다. 유엔과 WHO는 고령화 정책에서 “어떻게 늙어 갈 것인가”만큼이나 “어떻게 삶을 마무리할 것인가”를 함께 논의한다. 우리나라 역시 2024년부터 제2차 호스피스·연명의료 종합계획을 수립해, 병원 중심의 말기 의료를 넘어 집과 지역사회까지 포함하는 돌봄 체계를 넓히려 하고 있다. 이용자의 선택권을 넓히고, 인력과 질 관리를 강화하며, 삶의 마지막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려는 계획이다.
환경에 대한 부분도 빼놓을 수 없다. 국제사회는 ‘고령친화도시(age-friendly city)’라는 개념을 통해, 도시 전체를 나이 들어도 살기 좋은 공간으로 바꾸는 일을 강조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노인복지법을 개정해 2026년부터 ‘고령친화도시’ 인증 제도가 도입될 예정이다. 세계보건기구(WHO)의 국제 네트워크 기준을 참고해, 노인의 참여, 안전, 건강, 이동성, 사회관계 등을 고려한 도시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확산시키려는 시도다. 안내서에는 개별 교통·주거·돌봄 제도만 보이지만, 그 뒤에서는 도시 자체를 나이 친화적으로 바꾸려는 제도적 장치가 준비되고 있다.
국제 프레임워크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또 하나의 축은 지표와 모니터링이다. “정책을 했으니 됐다”가 아니라, 건강수명은 얼마나 늘었는지, 집단 간 격차는 줄었는지, 실제로 누구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꾸준히 살펴보자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제5차 국민건강증진종합계획(HP2030)은 건강수명 연장과 건강형평성 제고를 국가 목표로 두고, 대표지표와 격차지표를 운영하고 있다. 흡연·비만·우울과 같은 생활습관 지표뿐 아니라 사회경제적·지역적 격차도 함께 본다. 이는 국제 기준이 말하는 “측정·모니터링·형평성”을 향한 우리식 답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하나 놓치기 쉬운 영역이 가족과 비공식 돌봄자다. 고령화 논의에서 이들은 흔히 ‘배경’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많은 돌봄이 가족과 이웃의 어깨에 얹혀 있다. 우리나라는 남녀고용평등법을 통해 가족돌봄휴가·휴직 제도를 마련해, 일정 기간 임금근로자가 가족 돌봄을 위해 일을 쉬거나 줄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아직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수준의 충분한 보장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돌봄을 온전히 개인의 책임으로만 두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제도 안에 옮겨 놓은 첫걸음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국제 프레임워크는 개별 사업이 아니라 전 생애를 아우르는 큰 그림을 요구한다. 우리나라의 제3차 사회보장기본계획(2024–2028)은 “전생애 사회서비스 고도화”와 지속 가능한 복지국가를 비전으로 내세우고, 여러 부처의 복지정책을 한데 묶어 조정하는 상위 계획의 역할을 한다. 「복지서비스 안내서」가 국민에게 가까이 있는 실무적인 지침이라면, 이 기본계획은 그 안내서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넓은 배경이라고 볼 수 있다.
정리해 보면, 국제 프레임워크가 요구하는 “체계·환경·지표”의 언어로 한국을 들여다보았을 때, 「2025 나에게 힘이 되는 복지서비스」만으로는 보이지 않던 그림이 나타난다. 통합돌봄 법제, 1차 의료 만성질환관리, 장기요양 질관리, 호스피스·완화의료 계획, 고령친화도시 제도, 건강수명·형평성 지표, 가족돌봄제도, 사회보장기본계획 같은 장치들이 안내서의 빈칸을 조금씩 메우고 있다.
물론 아직 채워야 할 부분도 많다. 하지만 최소한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우리가 가진 복지 안내서와 국제 프레임워크는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지만, 노인이 사람답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는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진행 중인 여러 시도가 언젠가 국민에게도 “그냥 많기만 한 제도”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하나의 흐름”으로 느껴질 수 있기를 바란다.
국제 기준의 언어로 한국을 다시 바라보면, 「복지서비스 안내서」의 여백은 전부 ‘결손’만은 아니다. 이미 제정된 법과 장기 계획들, 시범 사업과 지표 체계, 도시와 현장에서 진행 중인 실험들이 그 여백을 서서히 메워 가고 있다. 다만 아직은 서로의 존재를 잘 모른 채, 다른 문서와 다른 자리에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이 글에서 소개한 정책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할 필요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고령사회를 “혜택을 얼마나 나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구조와 기준을 가지고 함께 늙어 갈 것인가”의 문제로 조금씩 옮겨 가고 있다는 흐름 자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