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보편적으로 깔고, 조금 더 두껍게

by 먼소리뚜버기

공중보건이나 사회복지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은 취약계층인 기초생활수급자, 노인, 장애인, 한부모 가정을 떠올리곤 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복지정책은 오랫동안 이런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장되어 왔다. 고도성장 과정에서 생긴 틈을 메우고, 가장 약한 사람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선택이고, 지금도 여전히 꼭 필요한 정책들이다.

하지만 조금만 거리를 두고 보면 건강과 복지는 특정 집단의 문제가 아니다. 태아의 건강관리에서 영유아 예방접종, 학교에서의 정신건강, 직장인의 만성질환 관리, 노년기의 기능 유지와 돌봄까지, 우리 삶의 거의 모든 구간에 얽혀 있다.

어느 한 시기에서 놓친 것들은 다음 단계의 건강 격차로, 또 그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다. ‘누가 더 약한가’보다 ‘우리가 어떤 삶의 궤적을 그리며 나이 들어가고 있는가’에 더 가까운 문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이런 흐름을 하나의 선으로 보자고 제안한다. 사람의 삶을 영·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 성인기, 노년기처럼 잘라 보기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 과정으로 보고 정책을 설계하자는 것이다. 치료뿐 아니라 예방·건강증진·재활·완화의료까지 함께 엮어 전체 건강 수준을 끌어올리려는 ‘생애주기 접근’이다. 여기에 “아파도 돈 걱정 때문에 병원에 못 가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라는 ‘보편적 건강보장(UHC)’ 원칙이 더해진다.

영국의 마멋(Marmot) 연구팀은 여기에 ‘필요비례적 보편주의(Proportionate Universalism)’라는 개념을 덧붙인다. 이름은 어렵지만 뜻은 간단하다. “기본적인 서비스는 모두에게 주되, 더 어려운 사람에게는 더 많이 도와주자.” 소수만 골라 지원하는 방식은 낙인을 남기기 쉽고, 모두에게 똑같이만 주는 것으로는 불평등을 줄이기 어렵다.

그래서 “보편적으로 깔고, 더 취약한 사람에게 조금 더 두껍게”라는 방식을 제안하는 것이다. OECD 분석에서도 비만 예방처럼 보편적·예방적 정책에 1달러 투자에 약 5.6달러의 경제적 효과가 돌아오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방은 ‘돈만 새는 비용’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의료비와 사회적 비용을 줄여 주는 투자라는 이야기다.


우리나라 역시 이런 흐름과 동떨어져 있지는 않다. 보건복지부의 「제5차 국민건강증진종합계획(HP2030)」은 “모든 사람이 평생 건강을 누리는 사회”를 비전으로 내걸고, 생애 전 과정을 아우르는 건강 투자와 “모든 정책에 건강을(Health in All Policies)”을 반영하겠다는 전략을 세워 두었다. 생애주기 전 과정을 포괄하면서, 동시에 취약계층과 고위험군에 대한 별도 전략을 두는 등 보편성을 바탕에 두되 필요에 따라 더 두껍게 지원하려는 방향도 담겨 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보이는 풍경은 조금 다르다. 정책과 예산의 무게중심은 여전히 노인, 장애인, 아동 등 취약계층에 상대적으로 더 많이 맞춰져 있고, 그 사이에 있는 청년·중년층의 지속적인 건강관리 서비스는 상대적으로 덜 촘촘하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국가건강검진 등을 통해 위험 신호는 발견되지만, 이를 일상에서 꾸준히 관리해 줄 장치는 부족하다. 이미 일하고 있고, 당장 크게 아프지는 않고, 괜찮아 보이는 사람은 정책의 관심에서 비켜날 수 있다.

이 구조는 몇 가지 문제를 낳는다. 첫째, 낙인효과다. ‘나는 정부 지원을 받는 사람’이라는 감각은 누군가에겐 도움이 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괜히 찍히는 것 같다’는 부담이 된다. 실제로는 지원이 절실한 사람이 눈치가 보여 서비스를 망설이는 경우도 생긴다.

둘째, 예방의 부족이다. 우리나라 보건의료 지출 구조는 여전히 치료 중심 성격이 강하다는 지적이 많고, ‘아프지 않도록, 덜 아프도록’ 돕는 예방·건강증진 투자가 충분한지에 대해서는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결과적으로 만성질환 부담과 장기 의료·돌봄 비용이 함께 커진다.

셋째, 정책의 연결 부족이다. 건강은 병원이나 보건소 안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학교의 교육 방식, 직장의 근로환경, 도시의 보행 환경, 주거 조건, 기후 위기와 미세먼지 같은 것들이 모두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 WHO가 “모든 정책에 건강을 반영하자”라고 말하는 이유다. 우리나라도 이 원칙을 선언적으로는 받아들였지만, 다양한 사회 정책 전반에서 건강영향을 실제로 따져 보는 문화와 제도는 아직 충분히 자리 잡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히 새로운 사업을 몇 개 더 얹는 일이 아니다. “누구에게, 언제, 무엇을, 어떻게”라는 질문을 다시 정리하는 일에 가깝다.

우선, 모든 사람에게 깔리는 기본선이 필요하다. 건강검진, 예방접종, 생활습관 개선 프로그램, 정신건강 상담, 일·가정 양립을 돕는 제도 같은 것들은 ‘특정 집단만을 위한 혜택’이 아니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이용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야 한다. 학교, 직장, 지역사회 같은 일상 공간에서 이런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확충하는 것이 생애주기 건강의 최소 조건이다.

그다음에는 앞서 말한 ‘필요비례적 보편주의’가 따라야 한다. 모두에게 기본적으로 열어 둔 서비스 위에, 더 어려운 사람에게는 더 많이·더 자주·더 촘촘히 닿을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저소득층이나 만성질환 고위험군에는 본인 부담을 줄이고, 상담과 프로그램 참여 기회를 늘리고, 찾아가는 서비스를 강화하는 식의 설계가 가능하다. 보편성과 형평성을 함께 잡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이다.

재정이 흘러가는 방향도 조금은 바뀔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지출이 ‘이미 나타난 질병 치료’에 무게를 두었다면, 앞으로는 ‘아직 보이지 않는 위험 줄이기’ 쪽으로 비중을 옮겨야 한다. 예방과 건강증진에 쓰는 돈은 당장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지출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막을 수 있었던 의료비와 질병으로 인한 사회적 손실을 줄여 주는 투자로 돌아온다.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생각해도 언젠가는 택해야 할 길이다.

그리고 건강을 의료·복지 영역의 일로만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신건강을 고려한 학교 정책, 안전하고 유연한 노동환경, 걷기 편한 도시 설계, 기후 위기를 고려한 환경정책. 이런 것들은 얼핏 보면 각기 다른 영역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두 건강 정책이기도 하다.

“우리가 만드는 모든 정책이 결국 사람의 삶과 몸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함께 묻는 문화와 구조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보건복지부 혼자서가 아니라, 교육·국토·환경·고용 등 여러 부처가 함께 책임을 나누는 체계가 뒤따라야 한다.


이런 전환이 이루어진다면, 가장 먼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건강 격차의 완화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기본 서비스와 더 취약한 사람에 대한 추가 지원이 함께 작동할 때, “태어난 집과 동네에 따라 건강이 갈리는 정도”를 줄일 수 있다.

둘째는 재정의 지속가능성이다. 치료에만 몰린 지출 구조에서 예방에도 충분히 투자하는 구조로 옮겨가면, 장기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의료비 폭증을 막고 재정 건전성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

셋째는 사회통합이다. 특정 집단에만 혜택을 주고 나머지는 방관하는 방식보다, 모두를 기본선 위에 올려놓고 필요한 사람을 더 도와주는 방식은 “우리가 모두 같은 시스템 안에 있다”라는 감각을 키워준다.

사실 이런 방향은 새롭지도, 거창하지도 않다. WHO, OECD, 마멋 리뷰 등 국제사회가 오래전부터 권고해 온 길이고, 우리나라의 HP2030 같은 국가 계획도 이미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다. 다만 여전히 문서 속 비전과 현장의 체감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그 간극을 줄여 나가는 일이 앞으로의 과제다.

우리나라 공중보건과 사회복지는 이제 특정 취약계층을 도와주는 제도라는 울타리를 넘어야 한다. 여전히 그들을 보호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거기에 머무를 수는 없다. 전 국민·전 생애를 아우르는 기본선을 깔고, 더 어려운 사람을 두텁게 지지하는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치료에만 쏠려 있는 시선을 예방과 건강증진으로 조금씩 옮겨야 한다.

“누구나, 어느 시기에든, 건강 때문에 삶 전체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것.”

공중보건과 사회복지는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가 가진 도구다. 지금은 그 도구를 특정 집단에만 머무르게 두지 말고, 조금 더 넓고, 조금 더 공평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조금 더 일찍 꺼내 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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