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세번째 백만불짜리 점심

* 유럽여행 21일차 20240606(목)

* 유럽여행 21일차 20240606(목) 아이거북벽캠핑장 - 피르스트(곤돌라) - 그로세샤이덱 (도보)- 그린델발트역 - 즈바이뤼치넨역 - 라우터부르넨역 - 뮈렌(골돌라,기차) - 라우터부르넨역 - 클라이네샤이덱역 - 라우터부르넨 - 즈바이뤼치넨역 - 그린델발트역

* 부제 : 노부인과 알프스

피르스트 전망대의 절경


피르스트 전망대의 절경


좋은 공기 탓일까? 어제의 강행군에도 불구하고 이른 아침 상쾌하게 눈을 떴다. 날씨는 어제 못지않게 화창했다. 오늘은 피르스트산에서 알프스의 두 번째 트레킹을 할 생각이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참고했던 안수지님의 '유럽 캠핑 30일'에 소개된 바흐알프제와 그로세샤이덱 트레킹 코스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오늘 그 코스에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어제와 같이 아름다운 마을 길을 따라 그린델발트터미널로 향했다. 그곳에서 123번 버스를 타고 그린델발트역을 지나 피르스트산에 오르는 케이블카를 탈 수 있는 '피르스트반'에서 내렸다. 모든 이동 수단을 '융프라우 VIP 패스' 하나로 무제한으로 탈 수 있어 편리했다.


피르스트반에서 아담하고 조금은 오래된 듯한 케이블카에 혼자 올라탔다. 케이블카가 출발하자 피르스트 정상까지 25분이 소요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마음 느긋하게 갖고 알프스 산자락들을 구경하라는 뜻이었다. 케이블카 아래로 가늘고 긴 커브 길을 따라 띄엄띄엄 오두막집이 보이고 넓은 풀밭에는 소들이 마치 정지화면처럼 풀을 뜯고 있었다. 케이블카가 수십 미터는 되는 침엽수 나무 꼭대기를 넘어갈 때면 짜릿한 스릴감이 재미를 더했다. 그리고 키 큰 나무들 위로는 멀리 기암절벽의 설산들이 어김없이 버티고 있었다. "그래, 바로 이게 스위스지~!"


피르스트 전망대의 뷰는 이루 말로 할 수가 없다. 피르스트산은 융프라우 산맥의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제 황홀했던 멘리헨의 풍경이 융프라우산 턱 밑에서 바라보는 근경이라면, 오늘 피르스트의 풍광은 한 걸음 떨어져서 융프라우산맥의 능선을 파노라마로 바라볼 수 있는 원경이었다. 좌측 동편에서부터 이름 모를 뾰족뾰족한 삼각뿔 모양의 설산 정상들이 미텔호른(Mittelhorn), 슈렉호른(Schreckhorn), 아이거(Eiger)를 넘어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연이어 걸어가는 사신들의 행렬처럼 장엄함과 엄숙함까지 느껴졌다. 도저히 한 눈에 담을 수 없는 넓은 시야의 풍경에 전망대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두번째 알프스 트레킹

피르스트의 이정표
피르스트에서 그로세샤이덱 트레킹 코스
인생샷으로 유명한 바흐알프제 <출처:구글 이미지>
융푸라우 능선을 배경으로


본격적으로 트레킹에 나서기 위해 사람들을 따라 이동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여러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산악 이정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바흐알프제는 호수에 비치는 설산을 배경으로 인생샷을 찍을 수 있는 인기 스팟이어서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바흐알프제 방면으로 올라가는 등산로는 막혀있었다. 아직 눈이 녹지 않아 등산로를 개방하지 않은 것이다.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아쉬움에 발길을 쉬 돌리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다시 독일어로 된 이정표를 한 참 '해독'한 후 바로 그로세샤이덱 방면으로 길을 잡았다. 이정표에 따르면 그로세샤이덱까지 1시간 15분 거리였다. 길은 잘 닦여 있었고 대부분 평탄하여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설산 능선을 향해 뻗은 길이 나왔다.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젊은 동양인 남녀 한 쌍이 연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싱가포르에서 왔다는 커플에게 함께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고 나도 한 장 부탁했다. 착실해 보이는 젊은이가 여러 장의 사진을 찍어주어 이곳에서 멋진 인생샷을 또 하나 건질 수 있었다.


그로세샤이덱 트레킹 코스
계곡물과 미델호른
산에서 내려오는 빙하수


등산로는 심플했다. 푸른 산 어깨를 따라 완만한 푸른 들판에 실 가닥처럼 놓인 하얀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가는 동안 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여러 물줄기가 길을 같이 하기도 하고 때론 가로질러 힘차게 흘러 내려갔다.


구글 지도로 확인하니 물줄기들이 실뿌리처럼 온갖 설산 정상 쪽으로 뻗어 있었다. 설산에서 녹아내린 개울물이 그린델발트로 모여들어 큰 개천을 이루고 산들과 산들 사이를 지나 인터라켄의 아레강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아레강은 다시 라인강으로 합류하여 독일과 네덜란드를 적신 후 북해로 빠져나갔다. 빙하수는 장엄하고 엄숙한 알프스산맥에 활기와 생기를 불어넣는 숨은 주인공이었다. 어느 작은 나무다리 아래에서 바위에 주저앉아 '활기 넘치는' 그리고 '먼 여행을 시작하는' 빙하수에 피곤한 발을 담갔다. 어찌 이 소소한 즐거움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스위스에서 세번째 백만 불짜리 점심

두마리 곰 나무조각상
쉬어가는 곳
슈렉호른, 아이거를 바라보며 점심을
노부인의 트레킹


피르스트를 출발한 지 어느덧 1시간 20분이 경과하여 오후 1시가 되어갔다. 미텔호른이 가까워지는 것이 목적지인 그로세샤이덱에 거의 다 온 듯했다. 마침, 탁 트인 전망을 갖은 쉼터가 나와서 점심을 하고 가기로 했다. 원형의 평탄한 전망대 겸 휴게 공간에는 귀여운 곰 모양 나무 조각에서 나무 구유로 쉼 없이 샘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옆에는 넓은 나무 탁자와 의자 그리고 건너편에는 단출한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원래 산행 중에는 식사를 잘 하지 않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백만 불짜리 풍경을 어찌 그냥 지나갈 수 있겠는가?


나무 탁자에 걸터앉아 아침에 블루베리잼과 야채 샐러드로 '야심 차게' 세 겹으로 쌓은 샌드위치를 꺼내 먹었다. 음료수는 당연히 '곰돌이 표 샘물'로 채워 마셨다. 그러고 보니 운 좋게도 벌써 스위스에서 세 번째 '백만 불짜리 점심'을 한 것 같다. 첫 번째는 비현실적인 뷰를 갖은 발렌제 휴게소였고(5월24일) 두 번째는 바람 부는 설산 아래 심플론 고개 휴게소였다(6월3일). 참으로 수지맞은 스위스 여행이 아닐 수 없다.



노부인과 미텔호른

고산지대의 풀꽃들
노부인과 미텔호른


점심을 거의 마쳐 갈때 쯤 하얀 백발의 노부인께서 쉼터 앞을 마치 목각 인형처럼 한걸음 한걸음 발을 옮기며 걸어가시는 모습에 사뭇 놀라 바라보았다. 팔구십은 되어 보이는 할머님께서는 등산화에 등산스틱을 짚고 파란 배낭을 메고 홀로 천천히 트레킹을 하고 계셨다. 특별할 것은 없었지만 한국에서는 접하지 못한 생경한 모습 때문이었을까? 자꾸 눈길이 갔다. (일단, 백발의 한국 할머님들은 거의 혼자 높은 산에 오르지 않으신다. 등산화나 스틱도 거의 사용하지 않으신다)


점심 후 나무판으로 둘린 화장실에서 간단히 용변을 보고 다시 길을 나섰다. 자연스러운 곡선을 한 등산로를 따라 작은 고랑이 이어져 있었고 그 고랑 가장자리의 젖은 흙에는 노란 풀꽃들이 즐비하게 피어 있었다. 이 높은 고산지대에서도 꽃을 피우는 생명의 풍성함과 풀꽃의 소박한 아름다움에 감사한 마음까지 들었다.


얼마 가지 않아 저 멀리 그 노부인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노부인은 주변을 돌아보지도 않으시고 앞만 보고 '싸묵싸묵' '뚜벅뚜벅' 걷기만 하셨다. "저 노부인은 언제부터 이 산길을 걸으셨을까?" "혹시 어렸을 때부터 이곳을 거닐지 않으셨을까?" "'지금 어떤 심정으로 이 산길을 걷고 계시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뒤를 따라 걸었다.


길은 철갑으로 무장한 거인 같은 미텔호른의 깎아지는 절벽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유구한 세월을 견디며 서 있는 거대한 미텔호른 아래로 걸어 들어가는 한 노부인의 모습이 산과 대조를 이루며 너무도 왜소하고 작게 느껴졌다. 자연 앞에서 인생은 얼마나 미미하고 약한 존재인가? 하지만 그 부인은 거대한 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계속 걸어갈 뿐이었다. 이 광경이 엉뚱하게도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연상케 했다.


소설 속 한 노인은 먼바다에 나가 큰 물고기와 사투를 벌여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 상어 떼에게 모두 뜯기고 뼈와 지느러미만 남은 채 항구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바다에서 승리와 환희를 얻지만, 다시 바다에 모든 것을 빼앗기는 인생의 허무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작가는 눈에 보이는 승리의 결과물보다 더 소중한, 보이지 않는 뭔가를 보여준다. 사투의 과정에서 운명에 맞서는 한 인간의 위대한 정신을 말이다.


인생은 결국 허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운명과 맞서 싸우는 인생의 불꽃 같은 정신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하고 아름답다. 마치 고랑 가에 피어난 꽃들처럼 말이다. 거대한 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걸음을 내딛는 노부인처럼 말이다.


나는 유럽 여행을 하는 동안 인류의 위대한 정신을 입증하는 살아있는 증거를 수 없이 볼수 있었다.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이 그러했고 베로나의 아레나가 그러했다. 또한 험악한 알프스산맥에 길을 내고 터널을 뚫어 철길을 깔고 수천 미터 산 정상에 케이블카와 전망대를 설치한 스위스 사람들을 통해 인류의 위대한 정신을 보았다. 끊임없는 투쟁과 도전이 오늘날의 인류를 있게 한 것처럼 앞으로도 인류는 위대한 정신과 꿈을 가지고 이 무모한 도전을 계속할 것이라 확신한다.


그로세샤이덱 너머 알프스 설산들 (마이린겐 방면)
미텔호른 고개에 위치한 그로세샤이덱
라우터부르넨의 폭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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