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여행 20일차 20240605(수)
* 유럽여행 20일차 20240605(수) 클라이네샤이덱-벵겐-멘리헨 -그린델발트
알프스를 트레킹하다
융프라우에서 가장 아름다운 트레킹 코스는 맨리헨과 클라이네샤이텍을 잊는 33번 길을 꼽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33번 길은 폐쇄되어 있었다. 6월 초인데도 아직 눈이 녹지 않아 등산객의 안전을 위해 개방하지 않은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차선책으로 뱅겐이라는 아름다운 고산 마을까지 가는 코스를 택했다. 이 또한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는 아름다운 코스로 도보 2시간 정도의 길이다.
융프라우 설산 능선을 왼쪽 어깨에 두고 클라이네샤이텍역을 벗어나 옆으로 난 가늘고 긴 길을 따라 완만한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들은 정말 천의 얼굴을 가진 듯하다. 바라보는 위치와 앵글과 높이에 따라 너무 달라 보이고 수시로 변하는 날씨와 구름에 따라서도 그 얼굴을 달리 하니 말이다. 내려오는 길에 연신 발걸음을 멈추고 변하는 산봉우리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푸른 풀밭과 나무들 사이를 휘감고 달리던 길이 얼마 가지 않아 작은 연못에 이르렀다. 연못 가에는 나무 벤치가 준비되어 있었다. 햐~ 이런 기가 막힌 뷰 포인트가 있다니! 아이거, 묀히, 스핑크스전망대 그리고 융프라우 정상까지 거대한 설산의 능선을 바로 코 앞에서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명당이 아닐 수 없다. 그곳 벤치에 앉아서 깨끗한 날을 허락하신 신께 감사드리며 바로 앞에 병풍같이 펼쳐진 설산들을 요목조목 감상했다.
길은 벵겐역을 향하는 산악 철길을 좌우로 오가며 나 있었다. 중간에 자그마한 산속 기차역 플랫폼을 지나기도 하고 산중 호텔 같은 건물 앞을 지나기도 했다. 푸른 풀밭과 나무들 사이로 좁은 철길을 따라 끼-끽- 덜컹거리며 빨리 달리지 못하는 노란 기차와 저 멀리 솟은 하얀 설산들을 보고 있노라면 너무도 비현실적인 느낌에 이게 꿈인가 싶어진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건가? 평생 처음 보는 풍경과 상식적으로 공존하기 어려운 것들이 입력되다 보니 뇌 회로가 감당하지 못하고 인지부조화에 빠져 시간과 공간 감각마저 아득해졌다.
갈수록 길은 가파른 내리막으로 이어졌다. 그때 아래쪽에서 힘 있게 올라오는 한 산악자전거를 보게 되었다. 멀리서는 안전 헬멧을 쓰고 있어서 식별이 안 되었는데 가까이 오니 반백의 중년 여성분이 아닌가? 헐~! 클라이네샤이덱역을 출발할 때도 그 높은 고산지대에 3대로 추정되는 할아버지, 아저씨, 소년이 시간차를 두고 숨을 몰아가며 페달을 밟으며 산악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흥미로웠는데 이제는 아주머님이 혼자서 산비탈을 오르는 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마 저 아주머님은 어렸을 때부터 가족들 또는 친구들과 함께 산에서 트레킹, 사이클링, 캠핑 등 자연스럽게 산을 즐기는 법을 체득하지 않았을까? 스위스(유럽)인들에게 산악 레저, 스포츠가 삶의 일부로 건강하게 자리 잡은 것 같아 부러웠다.
돌로 된 철교 밑을 지나고 탁 트인 언덕도 지나고 울창한 숲도 지나며 한참을 내려오니 멀리 작은 마을이 맞아 주었다. 멀리 설산을 품은 예쁜 꽃과 정원으로 잘 단장한 통나무집들 사이로 난 마을 길을 걸어 나와 벵겐역에 도착하니 막 기차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리면서 조용한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린델발트로 돌아가기 위해선 2가지 루트가 있었다. 기차를 타고 인터라켄 쪽으로 가다가 환승하는 것이 한 가지였고 곤돌라를 타고 맨리헨으로 올라가서 거기서 다시 곤돌라로 그린델발트 터미널로 내려가는 방법이 있었다. 나는 맨리헨 곤돌라를 타기로 마음먹고 곤돌라 승강장이 있을 것 같은 쪽으로 향했다.
멘리헨에서 인생샷을 찍다
곤돌라는 가파른 경사를 타고 나를 단숨에 맨리헨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트래킹으로 지쳐 있는 데다 곤돌라의 울렁거리고 어지러운 느낌이 싫어서 올라오는 내내 의자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어야 했다. 맨리헨은 융프라우산에서 마치 콧대처럼 길고 높게 뻗어 내려와 그린델발트와 벵겐 사이를 가르고 있고 지대가 높아 융프라우 지역의 모든 산줄기를 전망하기에도 좋고 주변을 360도로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천혜의 위치였다. 바다로 치면 등대 자리라고나 할까. 마치 오늘의 행보를 복습하기라도 하듯 그린델발트 쪽에서부터 시작해서 슈렉호른, 아이거와 융푸라우 정상을 포함하여 동쪽에서 서쪽 끝까지 멋진 설산들의 행렬을 모두 조망할 수 있었다.
아직 녹지 않은 두꺼운 눈밭 위에 서서 너무나도 황홀한 풍경에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햐~! 그래 내가 이걸 볼려고 그 고생을 했나 보다. 참 오길 잘했다!'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한 인도 아가씨가 나를 부르는 게 아닌가? 코에 피어싱을 한 꼽쓸머리에 까무잡잡한 20대 초반의 학생 같은 느낌의 여성이었다. 실은 곤돌라에서부터 내 오른쪽에서 조용히 앉아서 혼자 관광하는 친구였다. 처음엔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아가씨 왈, 설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내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서 뒤에서 몰래 내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다. 그 사진을 나에게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에어드랍(AirDrop)으로 전달해 주겠다고 했는데 그 친구 폰은 아이폰이였고 내 폰은 안드로이드여서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메일로 보내자니 서로의 개인정보라 말하기가 뻘쭘했다. 그래서 내 폰으로 다시 찍어 달라고 했다.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해서 다시 포즈를 취하고 몇 장의 사진을 찍게 되었다. 햐~! 이 사진이 인생샷이 될 줄이야. 정말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여행 최고의 사진은 이렇게 해서 탄생한 인도 학생(?)의 작품이다. 스위스까지 혼자 올 정도면 인도에서 귀족쯤 되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보며 차분한 얼굴의 인도 학생(?)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해 본다.
맨리헨에서 충분히 머무른 후 다시 곤돌라를 이용해 편하게 그린델발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참으로 꿈 같은 하루가 아닐 수 없다. 평생 기억에 남을 하루다. 하루에 30년 묵은 버킷리스트 두 개를 성취한 뜻깊은 날이기도 하다. 너무나도 좋은 날씨를 허락하신 신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너무도 편리하고 안전한 인프라를 제공한 스위스에도 감사를 표한다. 덕분에 아름다운 신의 작품을 몸소 감상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모든 게 감사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