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여행 7일차 20240523(목) 잘츠부르크 - 인스브루크
정상에 만년설이 덮여있는 산 능선을 배경으로 쭉 뻗은 둥근 돌기둥의 탑 위에 고혹적인 자태의 하얀 마리아상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가? 직장인이라면 컴퓨터 스크린 보호 화면으로 이 멋진 풍경의 사진을 한 번쯤은 봤을 것이다. 인스브루크라는 도시의 존재에 대해서 그때 처음 알게 된 것 같다. 바쁜 일상에 매몰되어 있는 직장인들에게 이런 사진은 청량감을 주기도 하지만 가끔은 억울한 마음과 비애를 주기도 하는 것 같다.
"나는 언제 저런 데 가보나? ㅋ~"
인스브루크를 나에게 각인시킨 사진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설산을 배경으로 연노랑, 연핑크, 연파랑, 연녹색의 예쁜 파스텔 톤의 집들이 강가를 따라 도열해 있는 사진이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언젠가는 내가 저곳에 가보리라 마음먹었었기에 이번 유럽 여행에서 인스브루크는 반드시 가봐야 할 곳이었다.
잘츠부르크에서 차로 2시간 20분 정도를 달려 인스브루크에 도착했다.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화창했다. 인스브루크는 1세기부터 로마제국이 군사적 주요 거점으로 개발하기 시작한 곳으로 현재도 북으로는 독일 뮌헨, 남으로는 이탈리아 베로나, 동으로는 잘츠부르크, 서쪽으로는 스위스 쥐리히로 연결되는 알프스의 중요한 교통의 요지이다. 지명은 인강(Inns)과 '다리'라는 뜻의 브루크(Bruck)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산악지역에 있는 도시답게 그렇게 크지 않아서 차를 놓고 도보로 시가지를 둘러볼 생각으로 시내 가까운 곳에 취사가 가능한 아파트먼트를 숙소로 잡았다. 원래는 2시 이후 체크인이지만 친절하게도 바로 방을 배정해 주어서 짐을 풀고 비에 젖은 텐트와 침낭을 널어놓고 구글맵만 믿고 거리로 나셨다. 헐~! 나서자마자 숙소 앞에 '준수한' 푸른 설산이 눈앞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지 않는가!
인스브루크에서 설산 풍경은 '기본값'이었다.
인강 다리를 건너 인스브루크 관광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개선문을 향해 걸어갔다. 가다 보니 대학교 캠퍼스를 지나고 큰 규모의 병원을 지나게 된다. 다른 건물들과 달리 현대화된 시설들 사이로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도 이런 차분한 곳에서 일하고 싶구나~ 라는 생각이 스쳐 갔다.
고풍스러운 건물들을 좀 더 지나다 보니 개선문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크지는 않았지만, 주변 건물들과 잘 어울리는 크기에 매우 아름다운 문이었다. 합스부르크 시대에 문화와 예술을 부흥시킨 여제로 유명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둘째 왕자 결혼을 기념하여 지어진 건축물이다.
내가 놀랐던 점은 문화재를 대하는 관점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것 같다는 것이었다. 개선문 바로 앞으로 횡단보도가 있어서 건너면서 개선문을 바로 만질 수도 있고 1차선 정도밖에 안 되는 개선문을 차들이 지금도 지나 다니고 옆문은 자전거 도로로 사용하고 있었다. 문화재가 시민들과 분리되지 않고 같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나라도 과거에 비하면 문화재에 대한 접근성이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많은 차이가 있어 보였다.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성 안나 기념탑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하얗고 노란 파스텔톤 건물들 사이로 나타나는 빨간색 트램은 유럽만의 매력일 것이다.)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여 지어진 성 안나 기념탑 주변에는 많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탑 위의 금빛 별 모양 아우라를 두르신 마리아님의 무심한 듯 고혹적인 자태는 참으로 예술적이고 아름다웠다. 스크린 보호 화면에 봤던 것보다는 실제로 보니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아서 살짝 실망하기도 했지만 이내 광장의 크기와 주변 건물 높이들과 딱 어울리는 규모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인스브루크에서의 버킷리스트 하나를 지웠다.
이어서 관광 명소인 황금지붕 쪽으로 더 들어갔다. 그리 크지 않은 타운 광장을 지나니 좁고 아주 오래된 거리에 접어들었다. 넓지 않은 구시가지는 모두 오래된 돌기둥에 아치 모양의 아케이드를 따라 건물들이 연이어 서 있다. 그런데 모두 그 색상이 다르다. 그리고 지붕과 창문의 양식이 제각각이다. 특히 외부로 돌출된 베이 윈도우(Bay Window) 모양이 다 달라서 개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그런 집들이 모여서 자아내는 조화미가 아주 독특하고 매력적인 거리의 모습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아~! 이 갬성(?) 어쩌나! 예상치 못한 매력에 한참을 그곳에서 서성일 수밖에 없었다. 인스브루크는 비엔나나 잘츠부르크에 비하면 작은 크기지만 그 규모에 맞는 광장과 거리들을 아주 절묘하게 갖고 있었으며 아담함에도 오히려 더 조화롭고 아기자기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지방 중소 도시가 주는 인간적인 크기에서 오는 평안함과 아늑함까지 느낄 수 있는 도시가 아닌가 싶다.
황금지붕을 지나 왕궁 정원 쪽으로 가기 위해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난 골목길을 걷는 재미도 쏠쏠했다. 대성당을 지나니 생각지도 못한 넓은 공간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러자 우측으로 앞발을 든 멋진 말과 기사의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뭐에 홀린 듯이 가까이 가보니 더 멋있고 주위를 둘러싼 분수는 비엔나의 '도나의 샘'을 연상시킬 만큼 예술적이었다.
그때였다. 동상의 뒷편을 돌아서 우측으로 오는 순간 나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동상 뒤로는 하얀 왕궁 건물과 화려한 비취색 돔이 그리고 그 뒤로는 웅장한 푸른 설산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인간이 만든 조형물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었는데 갑자기 신이 만드신 자연의 웅장함과 아름다움까지 함께 맞이하려고 하니 뇌가 감당할 수 없어서 잠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좁은 골목에서 나와서 미쳐 뒷배경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말 그대로 인스브루크의 아름다움에 압도당하는 순간이었다.
분수대 옆 큰나무 밑 잔디에서 지친 다리를 쉬면서 주변의 경치와 지나가는 사람들을 여유롭게 감상할 수 있었다. (구글맵을 보니 동상은 레오폴드 5세를 기리는 레오폴드 분수로 관광명소임) 그곳에서 여한이 없을 정도로 충분히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인스브루크의 두 번째 버킷리스트를 지우기 위해 인강변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인강변의 풍경도 너무도 아름다웠다. 고산의 빙하가 녹아내린, 비취색의 풍성한 유량이 넘실거리며 흘러가는 인강. 그 너머로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건물들 그리고 그 위로 펼쳐지는 푸릇하면서도 하얀 설산의 능선들. 파란 하늘과 빛나는 뭉게구름. 정말이지 인스브루크의 매력에 풍덩 빠지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인강의 '아름다운 하우스들'이 나타났다. 배산임수, 인강을 앞으로 두고 설산을 뒤로 등진 인스브루크의 아름다운 집들을 연신 핸드폰 카메라에 담았다. 이로써 또 하나의 버킷리스트를 지울 수 있었다. 잘 정비된 강뚝과 산책길을 따라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많은 것을 기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의 무언가를 얻었을 때의 행복감이랄까! 작지만 섬광이 있는 다이아몬드같이 빛나는 인스브루크는 험준한 알프스산맥 사이에서 빛나는 작은 보석으로 내 뇌리에 남게 되었다.
P.S 처음 계획과는 다르게 오스트리아의 주요 도시( 비엔나, 잘츠부르크, 린츠, 인스브루크)를 모두 방문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도시들은 비슷비슷한 것 같지만 각자만의 개성이 뚜렷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두 아름답지만, 그 느낌이 모두 다르다 하겠다. 마치 인스브루크 구시가지의 집들이 각자 개성을 드러내면서도 전체의 조화미를 이루듯이 오스트리아의 도시들도 각자의 아름다움을 뽐내면서 하나의 오스트리아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