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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서 인문학의 화두를 읊다(1)

서문

by 나세진

어릴 적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전 육십 권으로 이루어진 만화 삼국지를 탐독했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입가에 엷은 미소가 지어진다. 운이 좋게 나는 어린 시절을 아날로그 문명과 디지털 문명 모두를 두루 섭렵할 수 있었던 세대에 속했다. 종이에 인쇄된 텍스트를 심심풀이 삼아 손에 쥐며 시간을 보냈던 터라, 중학생이 되고서도 인쇄물을 손에 놓지 않는 것이 ‘쉬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주로 만화책과 중국 고전 이야기를 쉴 새 없이 친구들과 나누었다. 요즘의 10대에서 20대 연령층은 이해하지 못할 발언일 듯하다. 책을 읽는 것이 쉬는 것이라니!

사회상과 정치에 얽히길 거부한 채, 숲속에 은거하여 담화를 나누던 죽림칠현처럼, 입시에 얽히지 않고 그다지 쓸모 있어 보이지 않던 중국 고전을 화제로 왜 그리도 진지하게 열을 올렸는지 웃음이 난다. 물론 죽림칠현처럼 높은 경지의 철학적 담론을 나누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입시와 동떨어진 대화라는 관점에서는 죽림칠현과 비슷한 성질을 갖는다.

남자들 사이에서는 빠질 수 없는 책은 단연 『삼국지』였다. 소설가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가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했다. 만화 삼국지를 기본적인 토대로 깔아두고, 더욱 열성적으로 삼국지에 빠진 마니아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설을 읽었다. 사실 이문열의 삼국지는 중학생 수준에서 읽기 수월한 책은 아니었다. 작가의 현학적이고 고답적으로 느껴지는 고상한 기풍의 문체, 수도 없이 등장하는 낯선 한자어는 중학생 수준에서 소화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악착같이 덤벼보는 마니아들이 있었고, 그렇게 만화와 소설을 두루 섭렵한 마니아들은 삼국지 게임에 발을 담가 ‘마스터’에 반열에 올랐다. 당시 친구들 사이에서 ‘마스터’의 기준을 정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친구들을 상대로 삼국지 인물을 말하는 대결에서 6연승을 해야 하고, 단순 사실을 묻는 퀴즈에서 열 중 아홉을 맞혀야 했다. 가장 공부를 잘하는 친구가 논술형 문제를 만들면, 도전자는 자신의 견해를 담아내어 조리 있게 말하며, 그 견해가 죽림칠현(?)들의 만장일치로 인정을 받아야만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삼국지 게임으로 천하통일을 해야만 ‘마스터’가 되었다.

나 역시 마스터가 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 코에이(KOEI) 게임 회사에서 만든 삼국지Ⅱ를 시작으로 삼국지Ⅵ까지 접하며 나름의 내공을 쌓았다. 게임이 지루해질 때면 소설이나 만화를 다시 펼쳐 들고 부러 심장을 들끓게 만드는 에피소드에 과몰입했다.

그 시절 가장 즐겨 읽었던 두 가지 에피소드를 꼽자면, 하나는 관우의 ‘과오관참육장(過五關斬六將, 유비를 찾아가기 위해 다섯 관문을 통과하며 조조의 여섯 장수를 벤 전설적인 사건)’이다. 혼자서 무쌍을 찍어대는 관우의 모습을 그려보며, 단신으로 의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사나이에 홀딱 반해버렸다. 나머지 하나는 제갈량과 사마의의 지략 대결이었다. 무력으로 자웅을 겨루는 소설의 전반부와는 달리, 상대를 속이는 전략을 통한 전쟁의 본질을 느낄 수 있는 대결이 인상 깊었다.

하지만 중학생 시절 이문열의 삼국지를 소설로 독파한 시점을 훌쩍 넘어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삼국지를 다시 들었다. 공자는 마흔이란 나이를 가리켜 불혹(不惑, 미혹되지 아니함)이라 하였건만, 불혹은커녕 더욱 세상 유혹에 쉽사리 빠져드는 나이다. 하지만 삼국지를 성인이 되어 다시금 독파하니, 또 다른 감회에 휩싸이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야기 속 사건이 다른 각도로 느껴지는 현상을 겪었기 때문이다. ‘경험하고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금언이 전광판에 붉은 글씨로 지나가는 듯, 작품을 읽는 눈은 과거의 미숙했던 자신에 비해 더욱 깊이 있게 인물과 사건을 뚫고 내려갈 수 있었다. 넓게 펼쳐진 인간 군상 속에서 뛰어난 사람들과 나 자신을 비교한다면, 부족하고, 뛰어나지 않은 자신을 쉽게 발견하게 되지만, 과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를 동일 인물이라 간주했을 때, 스스로 ‘약간이나마 발전을 이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글을 쓰게 된다.



※ 삼국지를 주제로 몇 가지 인문학의 화두를 읊고자 한다. 나관중의 『삼국지 연의』를 중심으로 주제별 글밥을 엮어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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