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Ⅰ. 작은 불꽃이 켜지던 순간
차량을 구매하고 처음 시동을 걸었을 때의 떨림이 아직도 기억난다. 요즘 자동차들처럼 버튼을 눌러 시동을 거는 방식이 아니라, 열쇠를 삼단으로 돌려 시동을 거는 방식이었다. 생각보다 날카롭고 요란한 소리였다. 차가 들썩이며 깨어나는 이 소리에 익숙해지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브레이크에서 살포시 발을 떼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아내가 몰고 다니는 아반떼와 비교하니 유독 시끄럽다는 인상이 먼저 들었다. 지하 주차장을 몇 바퀴 조심스레 돌며 감을 익힌 뒤 도로로 나갔다. 그때부터 예상치 못한 반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연한 라벤더색의 청아한 외모와 달리, 스파크는 운전자에게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 엔진 배기량이 1,000cc에 미치지 않아서인지 치고 나가는 힘이 부족했다. 액셀을 조금만 밟아도 RPM은 금세 3,000을 넘기는데, 계기판의 속도는 좀처럼 올라가지 않았다. 지금까지 몰아왔던 차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운전의 감각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정지 신호에 멈췄다가 출발 신호를 받고 다시 움직일 때면, 겨울 아침 이불 속에서 좀처럼 느릿느릿 빠져나오지 못하는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실속형 연비 운전을 지향하던 나조차도 답답함을 느낄 만큼 출발은 더뎠다. 이런 감정은 주행 중에도 계속 따라붙었다.
특히 차로를 변경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 교통의 흐름에 맞게 속도를 내주어야 안전하게 차로를 변경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차는 적합하지 않았다. 속도가 나지 않아 옆 차로로 가야 할 때 몇 번이고 긴장하곤 했다. 차 안에서는 ‘부와아~앙!’ 요란함 가득한 스포츠카 감성을 느낄 수 있다면, 바깥에서는 낑낑대며 굴러가는 짐 가득 실은 손수레 감성을 느끼게 된다. 즉, 엔진은 콘서트 중인데 바퀴는 리허설도 안 하는 셈이다.
힘들었던 건 오르막길도 마찬가지였다. 경사가 심한 구간에서는 RPM을 4,000 이상 유지해야만 간신히 속도를 지킬 수 있었다. 의정부에서 포천으로 넘어갈 때마다 지나야 하는 귀락마을 인근의 고갯길은 늘 부담이었다.
어느 날, 그 길을 오르던 중이었다. 바로 뒤 차량이 하이빔을 쏘고 경적을 울리며 무차별 폭격을 가해왔다. 십중팔구는 앞질러 가기 마련인데, 그날의 폭격은 고개를 넘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나도 빨리 가고 싶다고!’ 외치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 차는 사람의 마음을 조급하게, 때로는 화가 치밀어 오르게 만드는 차였다.
2013년 방영된 ‘별에서 온 그대’란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 도민준은 외계인이었고, 여러 가지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순간이동, 닿지 않고 물건 움직이기 등 매력적인 초능력이 많았지만, 특히 인상적인 그의 초능력 중 하나가 시간을 멈추는 것이었다. 나도 그 능력이 있다면, 시간을 멈추는 능력으로 그 사람을 혼쭐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와 같이 마음속으로 ‘참을 인(忍)’을 새기며 심호흡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한동안 스파크를 도로 위의 ‘표준 속도’에 맞추려 애썼다. 결과는 뻔했다. RPM은 점점 더 거칠게 올라가고, 엔진 소리는 귀를 어지럽혔다. 마치 과부하를 견디다 못한 엔진이 피스톤, 베어링 등 모든 부속을 망가뜨리며 항의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모습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아랫사람을 끝없이 몰아붙이는 현대 사회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직장 상사가 질문했다. “오늘 일해야지? 너는 터미네이터 같은 놈이잖아.” 그 말은 들은 나는 그날도 자신을 ‘부아앙’거리며 굴러가도록 가속페달을 힘껏 밟았다. 커피 한 잔, 커피 두 잔, 농담까지 섞어가며 가열하게 속도의 불꽃을 태웠다. 그런데 밤 10시쯤, 갑자기 프린터에 화를 내며 욕을 하기 시작했고, 키보드를 부서질 듯 내리쳤다. 다음 날 나는 직장에 지각했다. 지각의 이유는 양말 한 짝을 못 찾아서였다. 정신적인 윤활유가 타버린 것이다.
근대로 접어든 이후 인류는 줄곧 앞만 보고 달려왔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그 연장선 위에 서 있다. 바쁜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에 떠밀린 채 다람쥐 쳇바퀴 위에 올라 있는 기분이 든다면 한 번쯤은 멈춰 서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는 왜 그렇게 조급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의 삶의 템포가 거북이 같은 게 아니라 대한민국 도로의 평균 속도가 빠르기 때문은 아닐까 싶었다. 도로 자체가 거대한 무빙워크처럼 가만있어도 쉼 없이 굴러가고 있었고, 나는 그 위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액셀을 밟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동안 나는 빠르게 다니는 차를 배려하는 것이 좋은 운전이라 믿어왔다. 규정 속도를 지키는 차가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바쁜 일상이 당연한 시대에서,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서두르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파크와의 싸움에서 결국 패배를 인정했다. 그리고 내가 ‘좋은 운전’이라 믿어왔던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조금은 여유롭게 운전하기로 마음먹었다. RPM을 부드럽게 올리고, 소음을 줄이며 차의 리듬에 맞췄다. 그러자 연비는 자연스레 좋아졌고, 차량 유지비도 줄었다.
운전 방식이 바뀌자 생활도 달라졌다. 미리 준비하고, 조금 일찍 출발하게 되었다. 아슬아슬하게 움직이지 않다 보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차를 덜 몰아붙이자, 나 자신도 덜 몰아붙이게 되었다. 스파크와 나 사이의 거리는 그렇게 가까워졌다.
시내 주행에서는 사실 계속 속도를 낼 일이 많지 않다. 조금 달리다 보면 곧 신호에 걸린다. 조급한 가속은 오히려 위험을 부를 뿐이다. 여전히 바짝 붙어 천천히 가는 차를 압박하는 도로 위의 조급한 차들이 있지만, 안전에 지장이 없는 한,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상황을 흘려보내는 법을 배우자, 갈등으로 인한 피로도 줄어들었다.
어느새 나의 운전 철학은 ‘상선약수(上善若水)’로 바뀌어 있었다. 이 말은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는 뜻으로 노자의 《도덕경》을 출전으로 한다. 아래로 흐르는 계곡물을 관찰하면 쉽게 말뜻이 이해된다. 물은 큰 바위를 만나도 다투지 않는다. 갈라져 흐르다가 다시 만난다. 이 모습을 떠올리며 방어 운전이란 무엇인지 새롭게 생각해보니 관계론적인 성격이 짙다는 걸 깨달았다.
방어 운전은 단순히 위험을 벗어나는 기술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도로 위의 모든 존재와 조화를 이루려는 태도가 기술 위에 덧씌워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타인의 입장을 헤아리며 흐름에 몸을 싣는 것. 그것이야말로 도로 위에서 화(和)를 이루는 상태다.
가끔 앞이 탁 트인 도로를 보면 무의식적으로 액셀을 밟게 된다. 그때 어김없이 들려오는 부아아앙, RPM이 치솟는 소리. 이 소리는 이제 수행자의 어깨를 점잖게 타이르는 죽비(竹篦) 소리처럼 들린다. 서두르지 말라는, 삶의 속도를 되묻는 경책인 것 같다.
“너무 조급하게 앞서가려 하지 말아라. 속도에 대한 열기를 잠시 식히고, 네 삶의 템포에 맞춰 가거라. 진정한 불꽃은 속도가 아니라 여유를 지키려는 의지에 있다.”
문득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 떠오른다. 당장의 성과를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우직하게 나무를 심어 인고의 세월을 기다린 이야기. 마침내 숲을 만들어낸 숭고한 정신의 이야기다. 어느 봄날, 그늘진 곳에 차를 세워두고 이 책을 얼굴 위에 올린 채 낮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