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 * *
“최근 들어 가끔은 단잠을 자는 것 같아요. 약 때문인가요?”
“안심하긴 일러. 몽마는 끈덕지게 쫓아다닐 거야. 약으로도 마음에서 우러나는 근본적인 사기(邪氣)는 제거하기 힘들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뭔 경험이 있었는지 일단 이야기나 들려줘 봐. 근본을 해결해야지 약만 먹어서 쓰겠나?”
정신건강의학과를 수년간 의지하며 다녔고, 신경 안정제를 먹더라도 대증요법처럼 문제의 근본은 도려낼 수 없었다. 그러한 이력을 간파하기라도 한 듯 늙은 한의사는 눈을 부릅뜨며 입을 열길 재촉했다. 마가 끼었다느니, 사악한 기운이라느니, 하는 말은 여전히 신뢰감을 줄 수 없었지만, 마음의 문을 약간이라도 열기엔 충분했다.
내 이야기를 듣는 듯, 듣지 않는 듯, 파동이 규칙적인 파장으로 성쇠를 반복하듯, 그는 경청과 질문의 리듬을 타고 있었다.
“마음에 곯디 곯은 부분은 언젠가 터지게 마련이지. 지금이 그때인 것 같군. 손목 내밀어봐.”
마음을 비우고 그에게 손목을 맡겼다.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눈을 감았다. 마치 맥이 뛰는 소리와 교감하는 것 같았다.
“꿈에 그 우라질 놈이 자주 나온단 말이지? 오히려 잘 됐어. 달이 차면 다시 기울게 마련이듯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네?”
“좋은 현상이라고 이 양반아. 여태껏 꿈속에서 두려움에 아무것도 못 했겠군.”
“네, 악몽을 꾸게 되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더라고요. 외려 실제보다 더 겁쟁이가 되는 걸 느낍니다.”
수많은 악몽과 극복의 시도, 그리고 실패라는 결과가 열차의 객실처럼 연이어진 나날을 보냈다. 반복되는 폭력은 이성적 사고를 매번 잠재웠다. 실제로 맞은 적은 없었지만, 꿈에선 주먹과 발길질이 날아왔고, 그때마다 매번 고통 없는 공포를 느꼈다.
하루는 어두컴컴한 건물 안 비상계단으로 심장이 터질세라 위로 도망쳤다. 아래로는 김동후가 나를 죽일 듯한 표정으로 뒤쫓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비상계단을 벗어날 문은 없었다. 계단과 계단참이 번갈아 무한히 반복될 뿐이었다. 그는 꿈속에서 굶주린 야차와 같았다. 계속하여 올라가길 반복하다 보면, 건물의 끝과 마주한다. 그건 낭떠러지나 다름없이 절망적이었다. 결국엔 꼭대기에서 그의 주먹을 맞고 깨어났다.
실제로 일어났던 일도 어김없이 꿈속에서 재현되었다. 매년 우리 학교는 전교에서 단 한 명에게 노보시비르스크의 과학 연구 단지로 견학을 보내주었다. 선생님들의 토의를 거쳐 성적이 상위권에 도는 학생 중 한 명만이 러시아로 갈 수 있었다.
단 한 명의 주인공은 나였다. 담임인 한지상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나를 추천했기 때문이다. 평소 나는 세계 과학 경시대회를 준비했고, 기술 분야의 신문 기사를 차곡차곡 스크랩했다. 김동후의 성적은 나보다 좋았지만, 과학에 대한 학문적 흥미도와 적극성을 담임 선생님이 높이 사준 덕에 내가 뽑힌 것이었다.
러시아행 항공권의 주인공이 공표되자 김동후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모두가 묵묵히 숙제와 자율학습에 빠져 있는 시간, 그는 침묵을 깨고 내 책상을 엎어버렸다.
“야 이 XX야. 너 담임한테 미리 가서 알랑거렸지?”
“그런 적 없어.”
“어떻게 나보다 등수 낮은 놈이 러시아에 갈 수가 있지? 하, 담임도 맘에 안 드네.”
후회의 대부분은 사건이 벌어진 당시 적절한 행동을 보이지 못해서 만들어진다. 이 꿈 역시 그랬다. 나는 친구들 앞에서 수모를 당하는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학급 친구들도 김동후의 군림을 못마땅해했으나, 독립군처럼 강직한 소신파 친구 몇몇을 제외한 나머지는 입에 거미줄을 친 채로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한의사는 악몽에 맞서지 않으면 방광의 기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충고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뭔가 방법이 없을까요?”
“좋은 꿈과 나쁜 꿈이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실로 종이 한 장 차이야. 그 종이 한 장의 차이는 결국 굳은 심지에서 만들어 가는 거야. 꿈속에서조차 한 방 때리는 것이 겁나는가?”
“과거 실제 상황에서는 충분히 때릴 수 있었어요. 다만 그걸 망설이게 하는 하나의 율법이 무서웠던 거죠.”
“율법? 뭔가가 자넬 옥죄고 있나 본데, 일단 극약처방으로 자기 전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수백 번 읊어.”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다는 뜻. 그의 말대로 자기 전에 일체유심조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어차피 꿈이다. 얻어맞은 곳이 아프지도 않은데 왜 이리도 겁이 나는 것일까. 아플 거라는 착시현상에 짓눌려가는 자신에 야속함을 느꼈다.
한약은 마음속 화기를 다스리면서도 냉정하게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늙은 한의사의 말에 현혹된 걸일까. 그를 믿고 의지하려는 마음이 점점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항상 우위를 점했던 몽마의 힘에 균열을 일으키는 일이 나타났다.
어처구니없었던 도난사건이 꿈으로 재현되었다. ‘반장, 네가 그랬지’, 라고 쏘아붙이는 김동후의 말에 도미노처럼 아이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그럴 때마다 갈고리로 채찍질 당하는 느낌이었다.
깊은 물 속에 잠겨 숨이 막히는 걸, 꿈결 속에서 둥실둥실 떠가며 체감하고 있었다. 허우적대고 있을 때였다. 꿈 밖에서 꿈 안을 향하여 팔을 내미는 또 다른‘나’를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꿈 바깥에서 나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나’가 꿈의 통로를 향해 일체유심조를 읊조린 걸까.
‘헛소리 좀 하지 마!’, 이 한 마디로 암울했던 역사를 바꿨다. 순간의 용기 덕택에 김동후의 표정은 사납게 일그러졌다. 김동후는 자신에게 바락바락 날이 선 대립각을 세우는 걸 용인할 위인이 아니었다. 수평적인 친구 관계에서만 편히 할 수 있는 말을 당돌하게 내뱉은 결과는 밖으로 끌려가는 것뿐이었다.
“반장, 네가 훔쳤어, 안 훔쳤어? 딱 보니 훔친 거 같은데?”
김동후의 졸개들이 나를 에워싸고 으르렁댔다.
“훔치지 않았어.”
“그래도 이놈이!”
“윽!”
졸개의 대열에 비교적 늦게 합류한 녀석에게 무르팍을 까였다. 김동후는 지루함을 머금고 하품을 했다. 그는 서서히 다가와 내 얼굴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눈을 찌르고 싶었다. 찰싹! 실하고 차진 소리를 내며 내 뺨은 흔들렸다.
일체유심조.
꿈 밖에서 읊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 마음은 내면에 있고 내면은 곧 나의 일부이다. 불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화엄경이 중생을 위해 알려준 이처럼 고귀한 진리는 평범한 나에게 큰 각성제가 되어 주었다.
나는 참다못해 폭발한 주먹을 그의 얼굴을 향하여 내질렀다. 분노로 불을 뿜으며 추진된 주먹은 그의 구릿빛 살갗 앞에서 망설이더니 동력을 잃고 멈추려 했다. 늦었다. 관성의 법칙에 따라 주먹은 그의 얼굴을 소심하게 툭 건드렸다. 돌이킬 수 없구나, 하며 후회하고 있는데 늙은 한의사가 날 흔들어 깨웠다. 시의적절한 흔들림이었다.
“알려준 주문이 효과가 있었나 보군.”
늙은 한의사는 밋밋하게 말했다.
* * *
한철민과 저녁 약속을 잡았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온 한철민은 부모님 근처에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에 고향과 가까운 속초에 변호사 사무실을 차렸다.
낭랑한 파도 소리를 자아내는 속초의 해변에서 파도 소리가 점잖게 들려왔다. 바다가 보이는 식당에 자리 잡아 우리는 물회를 한 그릇씩 주문했다.
“철민아, 우리 읍내 시장 옆에 용하다는 한의원에 가봤어?”
“아니, 소문만 들었지. 뭐 우리처럼 젊은 친구들이 아프면 병원엘 가지 왜 한의원엘 가겠어.”
“내가 요즘 그 한의원에 다니고 있어.”
“네가? 세상은 소립자들의 운동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녀석이?”
“그렇긴 한데… 뻑적지근했던 몸이 풀리면서 좋아지고 있긴 해.”
“그나저나 거긴 왜 간 거야?”
“…”
짓누르는 고난과의 동행이 만든 강박증적 감정이 일궈낸 단단한 자존심 때문에,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친한 친구일수록 더욱 그러고 싶었다.
“관둬, 밥이나 먹자. 말 안 하는 건 여전하네. 너 만취한 날 뭐라 중얼댔는지 알기나 하니?”
“뭐랬는데?”
“한지상 선생님.”
그는 내 의중을 파악하고 일부러 물회에 빠진 소면을 휘돌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릇 속의 소용돌이는 나를 더욱 부끄럽게 만들었다. 속마음을 감출 만한 도료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랬냐….”
“곧 한 선생님 기일인 거 알지?”
“알지.”
“이번에도 갈 거지?”
“…”
몸 안의 모든 것들의 미세한 곤두박질을 달래느라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생뚱맞은 웃음만 내보일 뿐이었다.
“힘들겠지만 난 네가 갈 거라고 믿는다.”
“어째서?”
“선생님을 가장 많이 닮은 게 너였거든.”
씁쓸한 표정으로 소주를 들이켠 다음 식탁에 내려놓았다. 잔에 담긴 맑은 액체와는 대조적인 탁한 소리가 울렸다.
선생님의 기일 날이 되어 한철민과 함께 모교로 갔다. 모교의 모래 운동장은 더위에 훅훅 쪘지만, 운동장 가장자리에 균일하게 심어진 떡갈나무는 널따란 잎으로 그늘 길을 만들어주었다. 그늘이 짙게 드리운 길을 따라 숨을 죽이며 뒤뜰로 갔다.
뒤뜰에는 둘레가 두 아름쯤 되어 보이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그루터기만 남은 채 땅딸보처럼 서 있었다. 나무의 뿌리는 손등의 핏줄처럼 여러 갈래로 쭈뼛쭈뼛 뻗어 땅속에 박혀 있었다. 흡사 낭떠러지에 굴러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버티는 손등의 모습과 같았다.
우리는 묵묵히 그루터기의 윗부분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잘려 나간 부위의 나이테가 거칠게 패인 얼굴의 흉터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나무의 밑동을 바라보며 한지상 선생님을 떠올렸다. 반들반들하게 빛날수록 더욱 고통을 호소하는 것 같았다.
나무를 보며 그를 떠올릴 때마다 그에게 진 빚이 환기되어 마음을 무겁게 억눌렀다.
“넌 선생님 말씀을 끝까지 지키려고 했어. 끝끝내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았잖아.”
잠자코 한철민의 말을 들었다. 한 선생님을 미워하는 마음이 올라와 요동쳤다. 자연스레 차오르는 우물처럼 눈물샘은 쓰디쓴 눈물로 채워졌다.
“아니, 용기가 없어서 그랬어. 그랬다고 해두자.”
* * *
한약을 중탕하여 컵에 부었다. 몽마가 접근하는 방식은 한약을 중탕하는 것과 흡사하다. 꿈속에서 지난번과 같은 장소에 또다시 갇혔다. 나선형의 형태로 계단과 계단참이 번갈아 나오는 어두운 탑에 갇혔다. 뒤를 돌아보면 더욱 심한 공포를 느낄까 차마 돌아볼 수 없었다. 비상구를 말하는 초록색 등불만이 희미하게 탑의 내부를 채우고 있었다. 바깥에 있는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서 염불을 외듯 꿈속에서 일체유심조를 마음속으로 허겁지겁 외웠다.
달리고 달리다 내부의 장기가 더욱이 버티지 못할 만큼 숨이 가빠졌을 때, 잡히지 않으려고 달음박질치는 행동은 결국 부질없는 결론으로 귀결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뛰다가 잡히나, 일찌감치 걷다가 잡히나, 잡힌다는 건 매한가지였다. 스스로 차오르는 숨을 진정이며 뛰는 걸 멈췄다. 포기를 하니 되레 마음이 가벼워졌다. 초록 불을 맞으며 무섭게 달려오는 김동후를 기다렸다.
다리는 계단참에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그는 씩씩거리며 한 걸음씩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앨프레드 히치콕의 영화처럼 한 걸음, 한 걸음이 살인마가 다가오는 한 장면과 같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눈앞의 그가 하나의 데이터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애매하게 추진되어 뻗은 주먹이 그 녀석의 턱을 아래로부터 위로 건드렸을 때, 그 녀석은 수많은 초록 코드로 흩어지고 말았다.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 같았다.
어둠의 탑 속 나선형 계단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선명하게 남은 것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코드들의 흩어짐, 불붙은 잿가루가 바람에 날려 하늘하늘 흩뿌려진, 내가 부숴버린 형체의 춤추는 모습이었다. 가뭇없는 형체의 발견에 당황하여 새벽잠에서 깼다. 나는 이 꿈을 날짜와 함께 녹색혁명이라고 자위하며 메모지에 기록해두었다.
혁명의 성공 뒤, 꿈속에서는 짓궂은 방식으로도 김동후를 제압할 수 있었다. 우리 고등학교에서 가장 무섭기로 소문난 한문 선생님의 수업 시간이었다. 항상 허리춤에는 손오공의 여의봉과 같은 장대가 껴 있었다. 선생님이 문턱을 넘자 학생들의 비도덕적 언행으로 얼룩진 탁한 공기가 삽시간에 정화되어 가지런하게 정돈되었다.
굴원의 어부사를 독음으로 선생님이 엄숙하게 읽어나갔고, 그에 맞춰 학생들은 따라 읽었다. ‘창랑지수청혜 가이탁오영(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이란 대목을 읽는 부분에서 왼쪽 뒤편 대각선에 자리한 김동후에게 시선을 돌렸다. 드르르륵, 의자 다리가 바닥을 끌며 내는 마찰음이 수업 분위기를 끊었다. 흡사 패션쇼 모델과 같은 당당한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친구들과 선생님은 연필이나 옥편을 빌리러 간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눈길을 줬다가 거두었다. 사정없이김동후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갈겨댔다. 그의 목이 세 차례나 꺾였을 때, 한문 선생님은 호통을 쳤고, 갑작스러운 뒤통수 후리기에 놀란 김동후는 선생님의 호통이 있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회심의 미소를 날리며 얼른 깨어나길 재촉했다. 한문 선생님이 허리춤에 찬 여의봉을 빼 들고 성큼 걸어올 때, 재빨리 외부의 나와 호응하여 꿈에서 깨어났다. 여전히 현실과 달리 꿈이 두려움을 주었다.
꿈속에 등장하는 김동후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 무렵,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었다. 김동후를 극복할 기회는 악몽을 꿀 때만 주어진다. 만일 꿈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는 없을까. 몽마가 찾아오길 마냥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나는 김동후가 아닌, 악몽의 창조자인 몽마와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김동후는 몽마의 활과 창 같은 전투의 도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셈이다. 물론 몽마의 입장에서는 김동후야말로 나를 괴롭힐 가장 강력한 무기라 생각했겠지만.
어느덧 악몽을 꾸는 빈도는 뜸해졌다. 꿈을 꿀 때마다 김동후의 머리통을 갈기고 도망가며 웃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와의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때리면 때릴수록 통쾌함보다는 더욱 무언가에 짓눌리는 느낌이 더해졌고, 어디까지나 몽마가 대결을 신청할 때 수비만 하는 형국으로 점점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수성만 하는 것은 진정한 승리가 아니었다. 돌연 꿈 자체를 나의 의지대로 요리조리 주무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동후라는 폭력의 겉껍질 이면에 섞여 있는 핵심부를 하루빨리 찾도록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 * *
“반장, 상대방의 악행을 고스란히 똑같은 악행으로 갚아주긴 쉽다. 그래서 악을 선으로 갚으려고 노력하는 건 한 차원 고상한 인격의 경지라고 할 수 있지. 네가 그런 인격을 갖추길 바란다.”
하지만 그런 원론적인 말을 적용하기에 김동후는 너무나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흔히 언론에 알려진 빵셔틀을 부리기 일쑤였고, 친구들의 체육복과 교과서, 문제집을 자신의 것인 양 자연스럽게 가져오곤 했다.
“도저히 공감할 수 없습니다. 김동후가 폭력으로 아이들을 지배한 지 오래입니다. 선생님 식대로 하면 뭐가 달라지나요?”
“알고 있다. 선생님도 동후를 어떻게 처리할지 곰곰이 생각 좀 해봐야겠구나. 하지만 상대방을 진정 존중하고 사랑으로 대한다면, 그 따스함으로 천만 근 쇠붙이도 녹일 수 있다.”
한결같은 선생님의 사랑은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견고하게 보였다. 천만 근 쇠붙이는 악으로 물든 김동후의 성정이 아니라 선생님의 굳은 심지를 말해주는 표현 같았다.
“네가 힘으로 동후를 쓰러뜨릴 수 있단 걸, 그리고 지금 동후가 세운 시스템의 꼭대기에 편히 오를 수 있다는 걸, 선생님도 알아.”
“그런데 왜죠? 저는 김동후처럼 하면 안 되나요? 애초에 그 녀석이 잘못한 거잖아요. 그리고 선생님께서 이런 식으로 김동후를 봐주시니 앞으로도 고통받는 친구들이 늘어날 거고요.”
“봐주는 것이 아니다. 교화하려는 것이야. 사람을 징벌의 대상으로만 여긴다면 학교는 교육의 장소가 아니라, 그저 규범을 가르치고, 그것에 어긋나는 학생에게 형을 집행하는 장소만 될 뿐이야. 또한 네가 만약 김동후와 같은 방식으로 동후를 쓰러뜨린다면, 결국 힘으로 이룩한 시스템 자체는 변함없이 유지될 것이고, 시스템의 맨 위에 네가 앉아있게 될 뿐이다.”
“저는 선생님처럼 교육자가 아닙니다. 마음 같아선 이렇게 활개를 치고 있는 녀석을 지근지근 밟아버리고 싶다고요.”
“선생님이 네 편이 되어 주잖아. 지금 교실에 가서 동후 불러와. 왜, 동현이를 때렸는지 물어볼게.”
나는 젖은 수건처럼 축 늘어진 채로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선생님의 율법과 같은 말씀은 바이메탈처럼 일정 온도로 뜨거워진 피를 냉각하곤 했다. 교실을 들어서자 김동후는 나를 보며 씩 웃었다. 김동후의 행동이 교실의 환경을 뿌리까지 잠식할 수 있는 건 그 옆에 붙어 기생하고 있는 추종자 몇 명과 소시민들의 합작으로 사태가 음지화가 되었기 때문이라 믿었다.
“야, 반장. 담임이 뭐라고 했어?”
“너, 지금 선생님이 오라고 하신다.”
“하, 담임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 지껄인 건 아니겠지? 하긴 지껄여봐야 뭐 별수 있나. 이상주의자 담임 앞에서는 반성하는 척만 하면 돼. 하여튼 앞으로 혀 잘못 굴리면 죽을 줄 알아.”
그의 욕설에는 일종의 억울함이 담겨 있었다. 우승열패의 생리를 왜 막느냐는 억울함 같았다. 김동후는 곽동현을 때렸다. 김동후가 특정 여배우가 예쁘다고 추켜올리자, 곽동현이 그 여배우가 그리 예쁜 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김동후의 손이 올라가고 순식간에 곽동현의 왼뺨과 오른뺨엔 여덟 차례씩 뜨거운 유성우가 떨어졌다. 가해자의 태도는 악신(惡神)마저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로 조악했다.
십 분 정도 지나자 김동후는 미소를 지으며 유유히 교실로 걸어왔다. 개선문을 지나듯 내가 있는 곳을 스치며 입을 열었다.
“꼰대 담임. 하여튼 대학만 가면 죽여버려야지. 별 시답잖은 이야기로 귀찮게 하고 있어. 내가 이렇게 설칠 수 있는 게 자기 때문인 줄 모르나 봐.”
김동후는 내가 담임 선생님을 존경하고 따른다는 점을 아킬레스건 삼아 능글맞게 웃었다. 소시민들은 조용히 고개 숙여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고, 김동후의 걸음에 보조를 맞추어 몇몇 추종자들이 함께 담임을 욕하고 있었다. 그들은 선생님을 모욕하는 은어를 만들어 스멀스멀 흘리고 다녔다. 허탈한 웃음이 맥없이 내부에서 흘러나왔다.
“김동후, 네가 한번 읽고 해석해봐라.”
영어 수업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월든」의 원문 일부를 발췌하여 읽혔다. 김동후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이런 식의 태도가 드러난 적은 부지기수였다. 몽둥이를 들고 위압감을 조성하는 교사에겐 알랑방귀를 뀌며 몸을 자동으로 움츠렸지만, 악인에게도 선한 영향을 미치려는 담임의 말은 만만하고 우습게 보았다.
“이게 수능에 나오기나 합니까? 차라리 문제집 푸는 게 성적에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김동후의 졸개들은 지휘관의 마음에 들기 위해 과장되게 웃으며 추임새를 넣었다. 판소리에서 얼쑤, 절쑤, 하는 말을 비열한 웃음이 대체했다. 하지만 담임은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다부지고 각진 턱만이 햇살에 부각 될 뿐이었다.
“시험에 나오냐 안 나오냐는 중요한 게 아니다. 비록 일부만 발췌했지만 월든 호숫가에 머무른 소로의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3분가량의 시간이 정적과 함께 흘렀다. 담임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담임의 우직함이야말로 그 누구의 고집보다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그는 단순히 교실의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는 기가 약한 선생님과는 달랐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초조해지는 쪽은 김동후였다.
“좋아, 읽지 않아도 좋다. 수업태도 불량으로 감점 처리를 하겠다. 또한 학생부에 지금의 태도를 적나라하게 적겠다. 아마 대학 갈 때 불이익이 있을 거다.자, 다른 누가 한 번 읽어볼까!”
이외였다. 한 선생님은 지금껏 학생부에 대한 불이익을 수단으로 학생들을 통제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한 선생님의 철학과는 상반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생님의 철학과 상반되는 대응일수록 막힌 코가 뚫리듯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김동후의 낯빛은 일순간 푸르뎅뎅하게 바뀌며, 당황함을 드러냈다. 황급히 손을 들며 그는 선생님을 힘껏 불렀다.
“선생님!”
한순간의 외침이 교실 속의 정적을 더욱 깊게 순환시켰다. 명백한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 굴종의 외침이었다.
“뭐냐.”
“잘못했어요. 읽고 해석해 볼게요.”
“김동후.”
“네!”
“됐다. 학생부에 대한 불이익을 주겠다고 할 때, 그제야 넌 부랴부랴 고개를 숙였다. 결국 너는 스승에 대한 예의보다 점수가 더욱 중요했고, 당위보다는 자신에게 유용한 수단이 허물어지는 것에 굴복한 셈이다. 이런 추악함까지 학생부에 반영할 테니 그리 알아라.”
광속으로 붙어 상대방의 얼굴을 가격하려다가, 되레 자신의 눈앞에서 버젓이 기다리고 있는 주먹에 얻어맞은 복서의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김동후는 얼빠진 듯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그를 마음속으로 아니꼽게 여기던 소시민은 드러나지 않게 킥킥거렸다. 독립군 기질의 소신파 학생들은 허연 이를 드러내어 통쾌함을 드러냈다. 김동후의 사냥개들이 웃는 이들을 점검하는 줄도 모른 채로.
뎅, 뎅, 뎅,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야말로 패색이 짙은 김동후의 굴복에 쐐기를 박는 것 같았다. 그는 재빨리 교실 밖으로 나가려는 선생님을 뒤쫓아 갔다. 소시민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감정을 드러내는 용기보다 속으로 비웃음을 감추는 걸 택한 그들은 비굴의 습성이 몸에 밴 듯 책상 위에 엎드려 뿜어져 나오는 미소를 가렸다.
“아가리 당장 싸물지 못해? 왜 처웃고 지랄이야!”
“아니야, 난 진짜 안 웃었다고. 윽!”
예상했던 대로 표정 관리에 실패한 소시민은 모두 김동후의 사냥개들에게 뒤편의 음지로 끌려갔다. 수업 때 웃은 소신파도 피해갈 수 없었다. 화창한 햇살마저 뭉개어 분산시켜버릴 정도로 불길한 색채를 띤, 작은 숲속이었다. 그곳은 여러 선생님의 눈을 피해 흡연까지 가능한 학생들의 은밀한 안가(安家)였으나, 우리 학년의 3학년 진급 이후로는 김동후 일당이 장악하여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나는 점심시간 대부분을 교실에서 농담하며 보내는 소시민들과 소신파 학생들이 교실에 보이지 않자, 불길한 예감이 왔다. 을러대는 주먹에 위축된 아이들의 모습이 쉽게 그려지자 재빨리 한철민과 함께 교내를 찾으러 다녔다. 똑똑한 이현진은 미리 한 선생님을 찾아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선생님은 확실하지 않은 것을 사실인 양 떠들지 말라고 했지만, 언제나 만약을 대비하는 사람이었다.
예상대로 숲속에서 아이들은 입가에 피를 흘리고 무기력한 표정으로 자신의 무능을 드러냈고, 독립군 소신파 학생 또한 마찬가지로 눈빛은 살아있으되 다부진 어깃장 하나 놓지 못하고 얻어맞기만 했다. 무엇이 사냥개들을 저토록 악에 충성하도록 만들었을까.
김동후는 졸업 전까지 한 선생님을 저열한 방식으로 괴롭혔다. 하지만 형식적으로만 은밀함을 갖추었을 뿐, 그가 한 행동들은 한 선생님의 생각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몰래, 그리고 완벽하게 진행되었다고 착각하는 그의 머릿속에서부터 비롯된 일들은 새장 속에서 날개를 퍼덕이며 자신의 비행 실력을 뽐내는 십자매 한 마리와 같았다.
정체불명의 말뚝이 한 달에 한 번꼴로 선생님의 차 타이어에 박혔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흔쾌히 웃으며 진범을 잡지 않고 넘어갔다. 펑크를 때우고 난 뒤 얼마 안 있어 또 같은 일이 반복되자 선생님은 아예 버스를 타고 학교로 출근했다. 바깥을 지나가는 선생님을 교실 안에서 발견하면 자신의 사냥개들과 함께 물풍선을 던지고선 재빨리 고개를 안으로 욱여넣었다. 그러나 호탕한 웃음이 뒤따랐고, 그럴 때마다 김동후는 선생님의 손바닥 안에서 배알이 꼴렸다.
그 어떤 시비와 괴롭힘, 외압에도 한 선생님은 태연자약하게 받아넘겼다. 그리스도교인이지만, 석가여래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그런 사람. 여유로운 미소 속에 감춰져 발효되는 분노와 고통의 감정은 얼마나 주렁주렁 마음에 매달려 있을까. 악에는 악으로 고스란히 돌려주어야 한다는 지론을 지지하는 나는 선생님의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심 답답한 그의 행동을 존경했고, 그의 행동을 어설프게나마 모방하는 고3 한 해를 보냈다. 스승에 대한 존경심으로 그를 대하고, 그의 가르침대로 너그럽게 악을 받아넘기려 했다. 아쉬운 점은 악을 포용할만한 역량이 되지 않아 감정은 계속하여 요동쳤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김동후에게 받은 상처는 깊어졌으나 후회는 없었다.
달을 보며 이상을 떠올리고, 삶의 지표로 삼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도달할 수 없는 이상에 불과하다. 김동후를 겪으며 달을 바랄 것이 아니라 달이 비추는 세계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쪽으로 마음은 지남철처럼 기울었다. 김동후는 선생님의 정신이 비추는 세계였고, 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그의 악행은 더욱 도드라졌으며, 상처받는 주변인들은 더더욱 초라함을 드러냈다.
군대를 전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선생님이 교장으로 승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우직하고 어리석게만 보이던 선생님의 진심이 교육계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입아귀가 자연스레 위로 올라가 초승달 모양을 만들었다. 어쩌면 선생님의 승진은, 자신의 고집스러운 불문율을 지키는 것이, 이 사바세계에도 통한다는 걸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나만 바뀌면 된다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