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니가 T라서 그래

감정(感情)

by 새참의 연필

MBTI가 처음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몇 년이 지난 지금, 더 이상 이야깃거리로 MBTI를 다루는 것이 낯설지가 않아 졌다. 처음 만나는 사이에 아이스 브레이킹을 할 때도 물론이고 공적인 면접자리에서도 MBTI를 물어본다는 방식이 신기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에게 깊숙이 자리 잡혔다.


그런 세상의 흐름과 달리 하은은 MBTI를 얘기하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완벽히 과학적으로 증명되지도 않은 것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이상했다. 정확한 숫자로 증명하는 데이터도 아닌 것을 맹신하는 사람들이 한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언젠가 친한 친구들에게 이런 얘기를 했을 때 그들은 이런 하은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렇게 말했다.


“너가 T라서 공감을 못하는 거 아냐?”


그날 이후, 하은은 MBTI의 대한 자신의 견해를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스스로 감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물론 조금 이성적인 부분이 강한 사람이라는 자각 정도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은도 슬픈 영화를 보면 눈물을 흘리고, 안타까운 소식을 들으면 감정적으로 흔들리기도 했다. 다만 양가적인 마음을 뚝 잘라서 T와 F로 나누고 사람을 대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었다.


MBTI에 관한 대화가 늘어날수록, 사람들이 하은에게 T라고 농담 반 진담 반 말하는 빈도도 올라갔다. 그럴 때마다 하은은 그냥 적당히 대응하고 넘어갔다. 더 길게 말해봐야 본인에게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성향에도 딱히 불만은 없었다. 스스로를 냉정하고 이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조금은 그런 모습에 도취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 하은은 세상 누구보다 감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버렸다.


“잠깐 시간을 가지자.”


3년 남짓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던 도윤의 입에서 나온 말에 하은은 뇌가 정지되는 느낌을 받았다. 함께 앉아 있던 카페의 공간이 새하얗게 변한 것 같았다.


“왜?”

“왜 계속 만나야 할지 생각해 보고 싶어서.”

“우리가, 아니 내가 너한테 무슨 잘못을 했어? 바람을 피거나 도덕적으로 잘 못 한 게 있어? 최근에 싸운 적도 없고, 평소에 문제가 있던 것도 아닌데 왜?”

“그냥 생각이 좀 필요해.”


도윤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다. 하은은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


며칠간 하은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일상을 아무렇지 않게 보내려 했으나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감정들이 올라와 하은을 괴롭혔다. 멍하니 있으면 우울감이 올라왔다. 아침 출근길 할머니가 나눠주는 전단지를 무의식적으로 받았을 때, 할머니가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한 말을 듣고 눈물이 흘렀다. 업무적으로 받은 응원 메일에 울컥하기도 했다. 하은 자신이 사실 굉장히 감성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도윤이 이별의 말을 꺼낸 것은 권태일 수도 있고, 불만이 쌓였던 것일 수도 있지만 결국은 감정이 줄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하은의 잘못은 없다. 하은이 어떻게 행동했다고 하더라도 도윤은 같았을 것이다. 원래 달랐던 성향이 지금 갑자기 거슬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 줄 만큼의 마음이 도윤에게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생각이 결론으로 다다르자, 하은은 시간을 갖는 것이 큰 의미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기간 동안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을 리가 없고, 이미 답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정해졌으니. 그 순간부터 하은도 도윤에 대해 백 퍼센트 감정적으로 생각해 봤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둘은 관계를 마무리하였다. 도윤은 역시 하은에게 명확히 이별을 고했고 하은은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생각할 시간을 가지는 동안 하은 역시 도윤에 대한 마음이 정리가 되었다. 오히려 그런 시간을 통해 정면으로 도윤을 바라보니, 후련하게 마음을 비울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꼭 연인이 아니더라도 모든 인간관계는 감성적인 부분이 크게 좌지우지하는 것 같다고 하은은 생각했다. 회사를 나가는 사람들의 90%는 인간관계 문제가 원인이었다. 꿈을 좇는 사람들도 힘들어서 보다는 마음이 사라져서 멈추는 경우가 많았다. 현실적인 이유로 꿈을 멈춘다는 것은 결국, 감정이 소모되어 금전적인 부분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는 말과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별 이후, 하은의 안에 있던 감정적인 부분이 강해졌다. 그 마음이 싫지만은 않았다. 하은은 그것을 성숙 해짐이라고 받아들였다. 앞으로도 삶을 차갑고 이성적으로 대하되, 그 안에서 마주치는 작은 일들에 대해서는 감정적으로 접근하기로 다짐했다.


'이젠 더 이상, T라는 소리를 듣지 않겠네.'


비 오는 창가를 보며, 하은은 머릿속의 떠오른 생각에 참지 못하고 슬쩍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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