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因緣)
해리는 핸드폰을 보면 환하게 웃었다.
'기분 좋다.'
해리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생각했다. 이름 때문인지 어릴 적부터 바다와 관련된 별명이 자주 생겼지만, 해리는 싫지 않았다. 바다에서 만났던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기도 했고, 그녀 역시도 바다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해리의 성향도 바다와 같았다. 모든 일을 대함에 있어 칼 같고 냉철한 성향이 강한 해리는 덕분에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도, 거리를 두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쿨하고 멋진 사람. 자신이 그런 이미지로 보이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해리는 늘 어떤 일에도 크게 내색하지 않고 덤덤한 척했다. 하지만 마음속 한 구석에선 조금씩 상처가 쌓이고, 쌓이다 못해 깊어지는 시기가 돌아오곤 했었다. 그리고 그런 시기쯤에는 항상 강릉 바다를 찾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바다를 보는 순간에는 거짓말처럼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이었다. 끝없는 수평선도, 소금기가 섞인 바다내음도, 맑은 날의 윤슬도 좋았지만 바람이 세게 부는 해변가에 서 있을 때면, 해리의 마음은 한층 더 두근거렸다.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멀리서도 강렬 해보이는 높은 파도. 위험해 보이지만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자연. 그 모든 것이 해리에게 묘한 들뜸과 안정감을 동시에 주었다. 테마파크에서 안전하게 즐기는 스릴과 같은 느낌이었다.
꽤 오랜만에 강릉을 찾은 그날도 그렇게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이었다. 해리는 한참 해안선을 바라보다 해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계속 이어지는 같은 풍경의 해변을 걸으니, 머릿속에 여러 사람들이 떠올랐다. 이제는 다시 연락할 수도 없는 옛 연인부터, 자연스럽게 사이가 멀어진 친구들까지, 과거의 인연들이 한 명씩 떠오르다, 이내 다른 사람으로 지워졌다. 생각난 김에 몇몇 사람에게는 바로 연락해볼까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연락이 상대방을 당황스럽게 할까 봐 그만두었다. 그리고 왠지, 먼저 연락하는 것에 묘하게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대신 인스타에 들어가 말없이 그 사람의 근황을 보려 했으나, 대부분 스토리를 올려서 끝끝내 알지 못했다. 그렇게 사람들의 현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추억 속의 모습을 떠오르기 시작했다.
해리는 문득 시절 인연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모든 인연에는 때가 있다는 그 말. 지나가는 인연에 미련을 갖지 말라는 좋은 의미 단어지만 해리는 그 단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삶을 살면서, 짧거나 길게 지나가는 인연들이 많았다. 원해서 보낸 인연도 있었고,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멀어진 사람도 있었다. 어쩌면 상대방이 원해서 떠나간 인연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떤 사람들은 스쳐감이 더욱 아쉽게 느껴지곤 했었다. 한쪽에서 조금 더 용기를 냈었다면 깊게 이어질 수 있는 사이였을지도 모르는데, 좀 더 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면 다른 사이가 되었을 수도 있던 사람들이었는데, 이렇게 떠내 보내기에는 아쉬운 사람인데. 꼭 이성만이 아니라 동성, 선배, 후배 등 다양한 형태의 관계들이 있었다. 어떻게 지내는지 지금은 무얼 하는지 그에 대한 궁금증, 호기심을 느끼면서도 선뜻 연락하지 못하다가, 몇 달, 몇 년 더 지나버리고 다신 연락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정말 가끔 너무 궁금할 땐 가볍게 연락하면서 괜히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보험 가입도 아니야’라는 농담을 먼저 던지기도 했지만 상대의 어색한 대꾸에 머쓱해져 연락이 흐지부지 되었던 적이 많았다. 그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해리도 스스로 벽을 치고 지난 인연에게 다가가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해왔다. 스쳐 지나가는 어쩔 수 없는 인연이라고 합리화하면서.
그러다 시절 인연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고, 그 합리화를 더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해리가 떠나보낸 사람들도 해리를 시절 인연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지금은, 그 단어를 핑계로 숨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떠오를 사람들이라면, 조금이라도 일찍 먼저 다가가볼걸.
오랜 관계란 결국, 한쪽은 다가가야 이루어진다.
누군가와 처음 만날 때는 호기심이 강하고, 점점 가까워지면서 익숙함과 편안함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렇게 안정적으로 관계가 유지되다가 서로 상처를 주거나, 선을 넘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면 거기서 관계가 정리된다. 아니면 뜨뜻미지근한 사이가 지속되다 소멸되는 관계도 있다. 오랜 인연들은 이런 모든 과정을 뛰어넘고 남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런 사이도 아무런 노력이 없이 유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절 인연이라는 단어로 관계를 쉽게 내려놓는 것보단, 서로 뒤돌지 않고 붙잡는 것아 새로운 평생 인연을 만든 다면, 그 인연으로 인해 삶의 색깔이 다양 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는 인연으로 인해 삶이 더욱 다채로워질 수 있다.
지금 가깝게 지내는 회사 동료, 사회 친구들도 언제 어느 순간 멀어질지 모른다. 과거에 흘러간 인연들도 다 그 시절에는 가까웠던 사람들이다. 그러니 지금 이 사람들도 충분히 시절 인연이 돼버릴 수 있다. 해리는 더 이상 그런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해리는 해변에 앉아 핸드폰을 들고, 메신저를 켰다. 그리고, 제일 오래된 채팅방부터 하나씩 들어가 메시지를 쓰기 시작했다. 하나 둘 채팅방들이 새로 올라오기 시작했고 곧, 새로운 메시지가 수신되기 시작했다.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어와 파도의 끝이 해리의 발끝에 다가왔다.
해리는 그런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핸드폰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