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활 중입니다.
딱히 아픈 곳은 없구요.

요양(療養)

by 새참의 연필

침대에 누워 있던 미도는 허리를 반쯤 일으켰다. 하루 종일 누워있던 몸이 마음 같이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어떻게든 힘을 쥐어짜 몸을 일으켜보았다. 간신히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바라본 바깥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어제와 같은 하루가 지나가고, 아니 이미 다 지나가 버린 듯했다. 한두 시간만 지나버리면 새벽에 더 가까운 시간이 될 정도로 늦은 시간이었다. 일주일 전, 어쩌면 한 달 전과도 별반 다를 바가 없는 하루가 이렇게 또 지나간다. 복잡한 감정이 미도를 감싸던 순간, 핸드폰 화면이 번쩍이며 전화가 걸려왔다.


“요새 뭐 하고 사니?”


전화를 받자마자 인사도 없이 들려온 한 마디. 늘 그립고 애틋한 목소리지만 한동안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김치 담갔어”


수화기 반대편에서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미도는 그런 어색함을 빨리 지우기 위해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


“엄마, 요새 짜파게티에 파김치랑 해서 같이 먹는 게 유행이래. 유튜브 보는데 누가 그렇게 맛있게 먹고 있더라구. 그게 너무 먹고 싶어서 사 먹을까 하다가, 그냥 직접 파김치를 담았어. 엄마한테 좀 해달라고 하려다가, 또 그거 가지러 집까지 가는 것도 그렇고. 생각보다 어렵지도 않더라고. 앞으로도 자주 해 먹을까 봐.”


넉살 부리듯이 밝게 말을 이어갔지만 어색한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수화기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고, 잠시 의미 없이 겉도는 이야기가 이어진 뒤 전화는 바로 끊어졌다.


아마 미도의 어머니가 기대했던 것은 다른 대답이었을 것이다. 다시 회사에서 근무하게 되었다던가, 아니면 적어도 돈벌이가 될만한 무언가를 시작했다거나. 그렇게 직업을 만들고 빨리 새로운 사람과 연애를 하고 결혼 준비를 하고.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좋은 소식을 안겨주는 것. 부모 입장에서 바라는 여러 가지 답변 중에서 미도가 내놓은 대답은 제일 상상도 가지 않고 무의미한 말이었다.


하지만 별 수 없었다. 미도는 이미 유튜브는 봐버렸고, 잘 졸아든 짜파게티 위에 살짝 덜 익은 파김치를 올려먹을 생각 밖에 들지 않는데. 검은 면 위에 푸르뎅뎅하며 빨갛게 버무려진 파를 올려 한 젓가락에 집어 한 입에 넣을 생각 밖에 없는데. 짜장의 단맛과 파김치의 알싸한 맛을 한 입에 즐기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힌 지금, 무엇보다도 미도에게 소중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퇴사를 결심하고 사직서를 쓸 때만 해도 지금 같은 모습은 절대 상상할 수 없었다. 처음 퇴사를 말했을 때, 회사의 모두가 미도를 말렸다. 심지어 그렇게 사이가 나쁘던 김차장까지도.


“다시 생각해 봐. 무슨 마음인지는 알겠는데 지금 무작정 나가면 진짜 힘들 거라니까. 요샌 진짜야”


겉으로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대꾸하고 지나갔지만, 속으로는 그런 말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동안 쌓아온 커리어를 바탕으로 한 든든한 경력기술서가 있었다. 조금 쉬다가 언제든 내가 원할 때, 지금 보다 좋은 회사에서 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당장 이 지겨운 곳을 떠나 자유를 찾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그렇게 퇴사를 하고 여행도 가고, 쉬는 시간을 가진 뒤 천천히 이직을 준비하였지만 예상보다 훨씬 현실의 벽은 높았다. 하루에 수없이 많은 공고들을 검색해 봤지만 높아질 대로 높아진 눈을 맞추기에는 무언가 하나씩 부족했다. 거리가 가까우면 급여가 짜고, 급여가 괜찮다 싶으면 네임 밸류가 너무 떨어지고. 그렇게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미도는 완전히 백수라고 선언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을 아무런 변화 없이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미도의 조바심이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 구직을 다시 시작했던 한두 달은 당장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조바심이 느껴졌고 늘 쫓기는 듯한 기분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거울로 본 자신의 표정이 굉장히 둥글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회사를 다닐 때의 미도는 너무나도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말 같지도 않은 주제로 팀장과 싸우고 난 뒤면 자리에 앉아서 화를 삭이던 중, ‘내가 이 사람을 술자리에서 실수인 척 때려 버리면 감옥에 몇 년 살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물론 다행히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떠올랐던 날의 충격은 여전히 미도에게 생생했다. 이후에도 그런 비슷한 생각들이 매일매일 미도의 곁에 쌓여갔다. 점점 늘어나는 생각들이 점차 뾰쪽하고 날카로워져서 미도 자신까지 찌르기 시작했고, 이윽고 미도의 몸 반대편으로 튀어나가 주변 사람들까지 찌르곤 했었다. 지금도 사람들을 만나 그 당시를 얘기하다 보면, 그들이 기억하는 미도의 모습은 자신도 놀랄 정도로 위태로웠다. 결국 더 이상 자신을 갉아먹을 수 없다고 생각 한 미도는 무작정 회사를 나왔다.


커리어나 미래에 대한 고민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과거의 자신을 찾아간다는 것이 미도에게는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느꼈다. 그 시기의 모든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은, 아프지 않아도 요양이 필요하다는 것. 나의 마음을 더 많이 돌봐야 한다는 것.


‘다음에 집에 갈 때 이 파김치 좀 가지고 가서 엄마 먹여 봐야겠다. 생각보다 너무 잘 되었단 말야.’


식사를 마친 미도는 설거지를 하며 생각했다. 창 밖을 보니 이미 불빛 하나 없이 깜깜해져 있었다. 하지만 미도의 마음은 어둡지 않았다. 침대에 누운 미도는, 행복한 표정으로 잠에 들었다. 내일 한 번 더 똑같이 짜파게티에 파김치를 올려 먹을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