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매년 동물원에 한 번씩 같이 오자

권태(倦怠)

by 새참의 연필

날씨가 너무나도 좋은 봄날. 명수는 천천히 벚꽃길을 걷고 있었다. 한동안 우중충했던 날씨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햇빛이 온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목적지를 향해 걸을수록 주변에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어느새 인파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인원이 같은 방향으로 함께 걷게 되었다. 천천히 걷던 명수는 노점상이 줄지어 있는 곳 앞에 멈추어 섰다. 김밥을 파는 할머니, 작은 동물 장난감을 파는 아저씨 사이에 한 할아버지가 작은 기계에서 쉴 새 없이 솜사탕을 뽑아내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이 주변을 맴돌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빠르게 솜사탕을 막대에 말아서 하나씩 아이들에게 건네주었다.


“오빠.”


솜사탕이 돌아가는 모습에 몰두하던 명수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연주가 서 있었다.


편한 복장이었지만 평소와 다르지 않게 조금 꾸민듯한 모습. 늘 입던 바지가 아닌 긴치마를 입은 모습에 속으로 예쁘게 차려입었네,라고 생각했지만 겉으로 별 말 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반가운 티 좀 내 오빠."

"엄청 반갑지."


자연스럽게 손을 잡은 명수와 연주가 도착한 곳은, 동물원이었다.


명수와 연주가 처음 사귀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 4월 봄날, 둘은 동물원에 놀러 갔다. 동물원을 즐기기에는 맞지 않는 나이라고 생각했지만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즐겁게 보냈던 시간이었다. 전혀 새로울 것 없던 동물들을 바라보는 것이 어찌나 귀엽고 재밌던지. 폐장 시간까지 그렇게 힘들 줄 모르고 모든 구역들을 돌아보고 나오면서 명수가 말했다.


“좀 아쉽긴 하다. 벚꽃도 다 져버렸어."

"그러네요. 여기 다 벚꽃나무라서 꽃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리고 기린은 왜 오늘따라 다 들어간 거야? 하필이면."

“에이, 다음에 또 오면 되죠.”

“그러면 우리 앞으로, 매년 봄마다 동물원 오는 걸로 할까? 기념일처럼.”

“좋아요.”


몇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말도 편해지고 서로에 대한 마음도 편해졌지만 여전히 따뜻하게 사랑하고 있는 중이라고 명수는 생각해 왔다. 그렇게 서로 챙겨주며, 싸우기도 하고, 여느 연인처럼 시간을 보내다 새로운 봄을 맞이한 오늘, 동물원에 다시 오게 되었다. 비록 매년 오자는 약속은 지키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이렇게 올 수 있어서 명수는 기분이 들떴다. 그런 명수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주는 평소와 별 차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명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두 사람은 코끼리 열차를 타고 입장하여, 김밥도 먹고 벚꽃도 보고 이전에 운영하지 않아 보지 못했던 동물들도 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날씨 탓인지 지난번에 보지 못했던 벚꽃 탓인지 기분이 좋아질 정도의 핑크빛들에 둘러싸여 행복함을 느꼈다. 늦게까지 동물들을 보고 마지막으로 나가려는 길에, 나무늘보 전시관이 보였다. 지난번에 왔을 때도 폐관이어서 보지 못했었던 나무늘보가 오늘은 늦게까지 열려 있었다.


“아, 나무늘보 좀 보고 싶은데.” 명수가 말했다.

“보고 가자.”

“근데 지금 거의 문 닫을 때라 그냥 다음에 와서 볼까.”

“오빠, 그냥 지금 왔을 때 볼 수 있을 때 봐.”

“어차피 우리 내년에 또 올 건데 그때 볼래.”

“아니 그냥 보고 가자니까. 굳이 보고 싶은데 왜 그냥 가. 오늘 보고 가.”


잠깐의 실랑이 끝에 결국 명수와 연주는 나무늘보관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적어서, 나무늘보를 진득하게 볼 수 있었다. 나무늘보는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사람들의 머리 위에 우리가 있었다. 허공에 걸린 줄 하나를 거꾸로 기어서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이 신기했다. 명수는 넋을 놓고 나무늘보를 올려다보았다. 연주는 그런 명수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거봐, 내 말 듣고 오길 잘했지?"


연주의 말에 명수는 멋쩍게 웃으며 손을 다시 잡았다.


그렇게 마지막 관람까지 마치고 나와 돌아가는 길에선 코끼리 열차를 타지 않고 천천히 역으로 걸어갔다. 해가 살짝 지면서 노을이 어렴풋이 보이는 도로에는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모두 천천히 벚꽃을 감상하며 여유롭게 걷고 있었다. 명수와 연주고 사람들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 순간, 맞은편에서 다가오던 한 커플이 연주에게 말을 걸었다.


“사진 좀 찍어 줄 수 있으세요?”


20대로 보이는 남자가 연주에게 1회용 카메라를 내밀었다. 연주는 무심결에 카메라를 받아 들었다. 명수는 아무 남자가 연주에게 건넨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요새 저게 유행이라고 하던데’ 일회용 카메라를 보며 명수는 생각했다.

“사진은 이분이 잘 찍으세요.” 연주는 받은 카메라를 그대로 명수에게 넘겼다.


딴생각하느라 별 신경 쓰지 않다가 얼떨결에 카메라를 받아 든 명수는 순간 당황 했지만 곧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눈으로 가져갔다. 뷰파인더를 통해 바라본 두 사람은 너무나도 예뻐 보였다. 작은 사각형 안에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벚꽃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연인의 모습은 화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들의 밝은 모습에 처음 보는 사람까지 설렘이란 것이 형태로 느껴질 정도였다. 셔터를 누른 뒤 사진기를 건네 주니 커플은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하고 명수와 연주를 지나갔다. 명수는 뒤돌아서 걸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돌아보았다. 나란히 걷는 뒷모습만 봐도 참 서로 사랑하는 연인처럼 보였다. 풋풋함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서로 마주 보며 걸어가는 모습에 사랑이 새어 나왔다. 꽤 오랜 시간 그들을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그리고 무심코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연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간, 명수가 느낀 감정은 무색무취였다.


기쁨이나 슬픔, 즐거움, 괴로움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주변이 이렇게 밝은데 그때의 연주는 무채색으로 보였다. 분명 손을 잡고 있었는데 손에서 아무런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손은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그냥 사물 같은 느낌이었다. 이 모든 것이 명수에게 어떤 위화감을 주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날 둘은 사진 한 장도 같이 찍지 않았다. 서로를 찍어주지도 않았다. 그냥 기계처럼 동물들을 보고, 김밥을 먹고, 정해진 코스를 돌고 내려왔을 뿐이다. 재밌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동물원이 재밌던 거지, 두 사람이 함께여서 재밌던 것은 아니었다. 방금 지나간 그 20대 커플과 비교하면 연인의 감정으로 하루를 보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서로에게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 걸까. 한때는 저들만큼 우리도 달콤했었는데.


동물원에 다녀오고 한 달 뒤, 둘은 헤어졌다.


유치하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명수는 동물원에 로망이 있었다. 연인과 동물원에서 아이처럼 시간을 보내는 것.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찾아갔던 곳인데, 사랑하는 사람과 커플이 되었을 때 다시 가보고 싶었다. 그랬기 때문에 연주와 사귀게 되면서 동물원에 가자는 말을 꺼냈고, 매년 다시 오자는 약속도 했었다. 그간 연애를 하면서 올 기회가 분명 있었지만 그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연주라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로망을 더 이루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날의 동물원은 명수에게 마냥 좋기만 한 기억이었다. 하지만 혼자만의 즐거움에 빠져있느라 연주를 살피지 못한 것이 아직도 그에게는 큰 후회로 남아있었다. 내년에 다시 와서 오늘 못했던 것을 또 하자는 명수의 말에 연주가 얼버무리던 순간을, 알아챘어야 한다. 꼭 오늘 다 하고 돌아가자는 그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봤어야 했다. 왜 모든 것이 지나간 뒤 돌이켜 보면 보이는 건지.


이후로도 새로운 봄이 여러 번 찾아왔지만 명수는 항상 혼자 걸었다. 더 이상 벚꽃을 보러 어디론가 떠나지 않았다. 그냥 출퇴근 길 대로변에 피어있는 것들이나 아파트 단지에서 보이는 벚꽃들을 보면서 '봄이구나'라는 인지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벚꽃을 보는 순간에는 늘 그날이 떠올랐다. 오늘도 그렇다.


우리는 뜨거운 사랑은 아니더라도 은은한 사랑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둘이 서로 익숙해지면서 조금은 소원해져도, 동물원이라는 이 장소만큼은 우리의 관계를 계속해서 이어 나가게 해 주는 매개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만의 약속의 장소가, 우리라는 관계를 영원히 이어 줄 수 있을 장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서로 바라보는 곳이 달라졌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영원하다고 생각했던 약속은 관계의 종말로 이어졌다. 명수는 그 마음을 조금 더 빠르게 알아채지 못한 것을 계속 후회했다. 미리 알았다면 달라졌을까.


모든 과거는 다 후회스럽지만 이건 참 오랫동안 후회 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명수는 벚꽃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명수의 감정에 개의치 않고, 벚꽃은 여전히 예뻤고 날씨는 좋았다. 명수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다시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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