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말고도 많잖아요?

주관(主觀)

by 새참의 연필

“영서씨, 이거”


고개를 들어 올린 영서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하얀 봉투, 그 뒤로 보이는 김과장의 미소. 파티션 너머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 평소 전체 미팅 시간 외에는 사적으로 얘기도 거의 해본 적 없었기에, 그가 서 있는 위치와 웃는 표정이 매우 낯설었다. 억지로 미소 짓는 듯한 눈을 보자마자 영서는 자신의 시선을 둘 곳을 잃어버리고, 허공을 본 채 말했다. 미소 짓는 눈을 마주치고는 영서는 시선을 어디로 둬야 할지 몰라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를 티 내지 않으려 빠르게 대답하며 봉투를 받았다. 김과장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 봉투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청첩장이었다. 영서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경력직으로 들어온 지 이제 2개월. 경력직이라고 해도 사원급인지라 알게 모르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에도 벅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루하루 업무를 쳐내기에도 지치고, 아직 많은 사람들과 친해지지 못해 같은 팀원들 외에 다른 사람과는 얘기 한마디 하는 것도 조심스러운 상황이었는데. 영서에게 청첩장은 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입사 첫날 소개받은 이후로는 오늘 처음 말 거는 건데 왜 그게 청첩장을 주는 대화인지, 원망스럽기도 했다.


“원래 여긴 같은 층까지는 다 돌려.”


조심스럽게 같은 팀 선배에게 물어보자, 아무렇지도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아직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참석까진 좀 그렇지? 주말에는 쉬어야지. 나한테 축의금 전달 해주면 내가 대신 내줄게.”


선심 쓰는 듯한 선배의 말은 따뜻했지만 영서에게는 무겁게 다가왔다. 사실 아직은 축의금 액수가 부담스러운 시기이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챙기지 않으면 뒷말이 나올 것만 같았다. 차라리 같은 팀이기라도 했으면 앞으로 친해질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 것 같은데 앞으로도 그다지 교류가 없을 것 같은 사람의 경조사를 챙긴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이전 직장에서 주변 눈치를 보다가 많은 경조사를 챙겼던 적이 있는데, 지금에 와서 연락도 하지 않고 앞으로 다시 만날 일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아깝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었다. 카드값 걱정에 먹고 싶던 메뉴를 못 시킬 때, 갖고 싶던 옷 사는 것을 다음 달로 미룰 때. 그 돈이 있었더라면, 그때 부조 하지 말고 이때 쓸 걸 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지금도 정말 하고 싶지 않지만 또 막상 무시하기도 쉽지 않았다.


어떤 거절이건 어렵다. 특히나 어떤 집단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더더욱. 객관적으로 내가 손해 보는 것이 명확하더라도 남들이 봤을 때 싸가지 없어 보이거나, 차가워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해 버리면 남들의 요구를 잘 거절하지 못하게 된다. 안 좋은 이미지를 보이고 싶은 사람은 없기 때문에.


영서도 남들에게 좋은 사람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큰 편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범위를 벗어날 정도로 남을 위해준 적이 많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어떻게 해야 할지 청첩장을 받은 순간부터 계속 고민하였다. 회사에서 하루 종일 이어지던 고민은 퇴근 이후에도 남아있었다. 귀가하는 전철 안에서도, 식사를 하다가도, 화장을 지우다가도, 멍하니 인스타를 보면서도 머리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채 사라지지 않았다. 무거운 마음으로 한참을 인스타 스크롤을 내리다가 영서는 어떤 사진에서 손을 멈추었다. 20대 초반의 대학시절에 찍었던 사진이었다. 촌스러운듯한 복장을 한 영서와 친구들이 활기찬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사진을 보며 잠시 옛 생각에 잠기다, 단체 사진 속 한 남자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당시 만나던 남자 친구였다.


대학생 때, 그와 함께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축구 대회의 단기 아르바이트였다. 여자들은 중계석 옆에서 기록을 했고, 남자들은 운동장에서 진행 보조를 하였다. 기록이라고는 하지만 큰 대회가 아니었던 탓에 영서가 할 일은 많지 않았다. 남자 친구 쪽도 비슷해서 둘 다 거의 하루 종일 필드에 앉아만 있다가 근무를 마무리했다. 멍하니 앉아 있다 보니 전혀 관심도 없던 축구가 재밌어졌다.


어느 날 새로운 경기가 시작될 때, 경기 전 감독끼리 인사하는 것이 보였다. 매번 보던 광경인데 그날따라 그쪽을 유심히 쳐다보게 되었다. 젊어 보이는 감독이 유달리 허리를 숙이며 공손하게 인사했고,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다른 감독은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는 모습이 보였다. 많은 경기가 있었지만 위계질서가 확실히 느껴지는 장면은 처음이라 영서는 경기가 진행되는 순간에도 그쪽을 유심히 보았다. 선수들은 몸을 풀고, 경기가 막 시작 하려던 차에 주최 측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과 나이가 좀 있어 보이던 그 감독이 함께 젊은 감독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젊은 감독을 둘러싸고 한참을 이야기하였고, 그는 큰 목소리로 그들에게 대답했다.


“아니요. 그렇게 못합니다. 그건 저희가 바꿔 드릴 사항이 아니에요."


저 멀리서 영서에게 들릴 정도로 크고 단호했다. 나중에 남자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상대편 팀의 유니폼에 문제가 있었다고 했다. 준비한 유니폼 색깔에 문제가 있어 젊은 감독팀의 골키퍼와 헷갈릴 수 있는 상황이라, 골키퍼의 유니폼을 바꿔 줄 없냐는 요청을 한 것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영서는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남자 친구의 말은 달랐다.


“대회면 정말 작은 것 하나로도 심리적 영향을 받을 수 있는데, 갑자기 애들 유니폼을 바꿔 버리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굳이 남의 팀을 위해 우리 애들을 힘들게 할 필요도 없고.”


당시에는 그냥 지나갔던 말이었지만 나중에는 젊은 감독의 선택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남을 배려해 주다가 우리가 손해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남이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고, 내 감정과 내 상황이 우선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영서 자신에게 저런 상황이 닥쳤다면,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나 공손히 인사를 하고 그 사람들이 자신에게 몰려왔을 때 쉽게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기 어려웠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그때 그 젊은 감독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오름과 동시에, 영서의 삶에서 거절하지 못했던 수많은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지금 시점에서는 정말 무의미한 일들도 많고, 아직까지 대단하게 영향을 주는 것도 없는데 그땐 왜 그랬을까. 후회가 들었고 이제는 그런 성향을 바꾸기로 다짐했다. 타인에게 좋은 사람보다 나 자신에게 좋은 사람이 돼야 한다. 거절이라는 것은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이, 내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말하면 되는 것이다. 지나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니다. 타인에 대한 예의는 갖추되, 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만의 배려를 하는 것이 스스로 단단해질 수 있는 길이다. 영서는 그날 밤, 왠지 모르게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다음날, 개운한 마음으로 회사에 도착한 영서는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업무 준비를 시작했다. 캔틴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는데 앞쪽 입구에서 출근하는 김과장의 모습이 보였다. 영서는 커피를 손에 들고 다가갔다.


“과장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과장님, 결혼 정말 축하드려요.”

“네? 아, 네 고마워요.”


의아한 표정의 김과장을 뒤로 두고, 영서는 자리로 돌아왔다. 대단한 얘기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영서는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업무를 시작했다. 잠시 뒤, 팀 선배가 들어와 영서 옆 본인의 자리에 짐을 풀었다. 밝은 표정을 지으며 영서가 말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작가의 이전글우리, 매년 동물원에 한 번씩 같이 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