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쇄(相殺)
“정대리, 다 됐어?”
멀리서 들려오는 박부장의 목소리에 영진의 정신이 돌아왔다. 모니터에 눈을 두고 있지만 정신은 아득히 먼 곳으로 날아가버린 오후 3시. 영진은 멍 때리지 않은 척 급하게 마우스를 흔들고 키보드를 몇 번 누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네, 거의 끝났습니다. 10분 내로 보내 드릴게요.”
일어남과 동시에 홍보팀에서 요청한 부서 소개 자료를 열어 마지막으로 검토하였다. 매달 돌아가면서 부서별로 직접 작성하는 소개글. 이번 달에는 영진이 소속된 팀의 차례였고 막내인 영진이 전담하여 작성하였다. 소개라고 해 봐야, 팀원들과 팀장인 박부장으로부터 취합한 개인 작성 자료에 홍보팀으로부터 받았던 사전 질문에 대한 답변, 그리고 마지막 멘트 정도만 작성하는 것이라 크게 고민하지 않고 작성했었다. 슬쩍 오타가 있는지 훑어본 다음에, 바로 박부장에게 메일로 보냈다. 잠시 뒤, 박부장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자리로 좀 와봐.’
속으로 욕을 하며 영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부장에게로 갔다. 박부장은 영진이 보낸 파일을 모니터에 띄워 놓고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그, 정대리 이거 잘 썼는데, 너무 단순한 것 같지 않아?”
“단순하다는 것이 어떤 말씀이세요?”
“이건 그냥 팀원들이 말한 내용들을 취합한 것뿐이잖아. 사내 공지에 올라갈 부서 소개인데 좀 더 튀고, 재밌고, MZ 스러운 멘트들 있잖아. 그런 걸 넣어줘야 회사에서 우리 팀 이미지가 좋아 보이지 않겠어?”
'또 나왔네, MZ.' 영진은 생각했다. 박부장은 특별하게 꼰대스럽거나 짜증 나는 상사는 아니었지만 가끔 뭐 하나에 꽂혔을 때 주구장창 그것만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어서 영진에게 스트레스를 주곤 했다. 최근에는 이벤트성 업무만 생겼다 하면 전부 영진에게 넘기고, MZ의 창의력을 기대한다는 식으로 부담 주는 일이 많았다.
“수정해 보겠습니다.”
말이 길어져 봐야 답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영진은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로 돌아와 처음 보냈던 소개글 파일을 다시 열어 봤지만, 새로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일이라는 것이 참 신기하게도,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창의성이 필요한 순간이 많다. 특히 시키는 것만 하는 신입사원을 벗어나서 조금씩 직급이 올라갈수록 창의성을 요구받는 때도 늘어난다. 좋은 아이디어라는 것이 자판기처럼 버튼 누를 때마다 나오는 것이 아니니, 꽤나 스트레스를 불러일으킨다. 그러한 스트레스가 누적될수록, 영진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더욱이 본인의 성향이 그런 창의성과는 거리가 먼 편이라 훨씬 심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일부러 일을 구할 때도, 최대한 정해진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 관리성 직무에만 지원을 했고 그 결과 재무팀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본인 스스로 잘 맞는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부족함 없는 성과를 내곤 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이렇게 점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들이 늘어났다. 이것이 점점 영진에게 부담으로 다가와 만족하며 지내던 회사까지 싫어질 정도였다. 일부러 피해 왔던 일을 맞닥뜨리는 것에 대한 심적 부담이 컸다.
그날도 결국 부서 소개 업무는 마무리하지 못하고 퇴근하였다. 힘없이 퇴근하다가 저녁 준비를 위해 마트를 향한 영진은, 이것저것 바구니를 채우면서 돌아다녔다. 천천히 마트를 돌다가 완구 코너를 지나던 영진은 가득 쌓여 있는 레고를 보았다. 그간 수없이 들리면서 지나치기만 했었는데 오늘따라 시야에 들어왔다. 어릴 적 부모님을 졸라 몇 개 사기도 했었지만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없었던 레고. 예나 지금이나 비싼 가격에 쉽게 살 수 없던 장난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릴 적의 영진은 한 번 샀던 레고를 가지고 만들었다 부수었다 한참을 가지고 놀았다. 설명서는 꺼내지도 않고, 눈앞에 있는 블록들을 모양대로 이리저리 조립하면서 상상 속 괴물, 용사, 비행기, 탱크라고 생각했다. 비록 모양은 실제와 전혀 닮지 않았지만 영진에게는 무엇보다도 완벽한 모습이었다.
‘어릴 적이 더 머리가 잘 돌아갔던 걸까.'
그런 생각에 기분이 살짝 우울해진 영진은 무의식적으로 눈앞에 있던 작은 레고 박스를 집었다. 2만 원 정도 하는 작은 크기의 레고라, 지금 하나 구입한다고 해도 부담스러울 것 같지 않았다. 영진은 들고 있던 박스를 그대로 장바구니에 넣은 채 자리를 떠났다.
집에 돌아온 영진은 간단히 저녁을 챙겨 먹고,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까 사 온 레고를 꺼내 들었다. 설명서를 보며 안에 있던 봉지를 뜯으니 레고 조각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충 책상에 흩트린 채로, 하나씩 조립을 시작하였다. 처음엔 추억을 생각하며 샀던 레고인데 조립을 하다 보니 의외로 재미있게 느껴졌다. 예전처럼 손 가는 대로 이렇게 저렇게 만들지 않고 차분히 설명서대로 만들어 나가다 보니, 하나하나 완성되어가는 재미가 은근히 있었다. 그렇게 앉은자리에서 순식간에 전부 완성하고 만들어진 레고를 바라보니, 묘한 쾌감과 함께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것을 느꼈다. 최근에 계속 새로운 아이디어, 창의적인 무언가를 생각하려고 힘들었던 것이, 설명서만 따라서 아무 고민 없이 만들어 나가는 레고라는 행위를 통해 해소된 느낌이었다. 이렇게 정해진 대로 지시받아 완성시킨 것이 얼마만인지.
영진은 그 이후로도 종종 레고들을 사서 조립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게 되었다. 물론 이런 단순한 취미는 다른 것도 찾아보면 또 있겠지만 레고라는 추억이 주는 익숙함과, 쉽지도 어렵지도 않은 난이도가 계속 레고를 찾게 하는 것 같았다. 이후로도 회사는 여전히 새로운 이벤트들로 영진을 힘들게 하였지만, 단순한 레고 덕분에 잘 이겨낼 수 있었다.
내일 당장 회사를 옮기지 않을 거면 회사에 본인을 맞출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적어도 쌓이는 스트레스를 제때 제거해야 지속적으로 일상을 반복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러한 방법을 찾을 때는, 자신이 느끼는 스트레스의 원인과 정반대의 행동을 해보는 것이 꽤나 효과가 있다. 너무 사무실에만 박혀 답답함이 느껴질 때는 몸을 움직이는 활동적인 취미를 가져보고, 사람들에 치인다고 생각할 때는 방 안에서 혼자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본다. 큰 프로젝트에 질렸다면 소소한 일을 해보고, 단순하고 자잘한 일만 한다는 생각이 들면 먼 곳으로 훌쩍 떠나 대자연의 품에 안겨본다. 반대가 끌리는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