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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쌍미음 May 29. 2020

But 아니고 And.

키 번호 1번의 자기소개.

"작지만 야무지더라."

"쪼그맣지만 할 말은 하던데?"

"좀 작긴 하지만 귀엽잖아."



태초부터 작았던 나는 지금을 살고 있는 순간까지 단 한 번도 남들보다 커봤던 적이 없었다.

<우리 반 키 번호 1번 담당>



흔히 듣는 이야기로 어릴 때 급성장을 했다가 서서히 성장폭이 줄었다-라든지

사춘기 시절에 갑자기 10cm가 자라서 교복을 8부 바지로 입고 다녔다-라든지

초등학생 때는 제일 컸던 친구가 어른이 되어 만나보니 나보다 작더라-라든지

'살아온 인생 가운데 언젠가 한 번은 남들보다 컸었던 시절'이 남들에게는 한 순간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나에겐 평생 없었던 순간이.


그런 내가 자라면서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나의 키'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가 부정적인 것이었다.

나의 생활 습관, 심지어 나의 인격까지도 싸잡아서 부정적으로 취급당하기 일쑤였다.


"네가 그러니까 키가 안 큰 거야."

"그렇게 쪼그매서 어디 쓸 데나 있겠니."

"하나뿐인 손녀딸이 밥을 안 먹어서 키가 안 커가지고 그거 하나가 내 평생의 한이다."

 


작은 아이였던 나작은 어른으로 자라났다.

그리고 사회에서 가정에서 제 몫을 다해내는 어른의 모습을 보이자, 예전의 그 어른들이 '나의 키'에 대해 말하는 방식도 조금은 바뀌게 되었다.


"작지만 야무지더라."

"쪼그맣지만 할 말은 하던데?"

"좀 작긴 하지만 귀엽잖아."


이렇듯,

내가 어렸던 시절에는 '작다'와 '비난의 말'이 짝을 이루었다면

어른이 된 후에는 '작다'와 '칭찬의 말'이 짝을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방식도 듣기에 썩 좋지는 않다.

'아니, 칭찬을 해주는 건데, 왜?'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굳이 '작다'라는 신체적 특징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을뿐더러,

'작다'와 '칭찬'이 짝을 이루게 되는 그 연결방식이 거슬린다.

어째서 앞과 뒤의 연결고리는 항상 But으로 붙어있는 것인가.

작지만, 작은데, 작긴 하지만,

'작다'라는 특징을 부정의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면 후에 나올 칭찬 앞에 But을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칭찬에 앞서 신체적 특징을 언급할 필요가 없다.

그래도 굳이 꼭 언급하고 싶다면 But 이 아닌 And로 연결하자.



또래보다 체구가 작은 8세 아들이 주변의 어른들로부터 부정의 말을 듣기 시작한 것 같다.

내가 어린 시절 겪었던 것처럼.

그리고 덩달아 나에게도 불똥이 튄다.

"엄마 닮아서 안 크면 어쩐다니?"




나는 아들에게 종종 이렇게 이야기해주곤 한다.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는 거야.'

'엄마는 그냥 작은 사람이야. 너는 앞으로 점점 더 많이 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어.'

'너는 작지만 똘똘한 게 아니라, 작고 똘똘한 거야.'

동시에 어린 시절의 나에게도 슬며시 위로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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