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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쌍미음 Jun 08. 2020

물문때기 단술

신비한 묘약

“예에- 물문댁임더. 으쯔녁에 스울서 을라들 왔다 아입니꺼.”


물문마을에서 나고 자란 처녀가 시집을 왔다고 해서 ‘물문댁’이다. 모르는 게 없고 못 만드는 게 없어서 마을의 ‘교장할매’로 통한다는 할머니. 나의 외할마시, 사랑하는 물문때기.


차 타기가 무서울 정도로 멀미가 심해서 검정 비닐봉지를 손에 움켜쥐고 턱 밑에 받치기를 두어 번. 지쳐서 잠을 자다 깨기를 반복하다 보면 그제야 가까스로 음리에 도착한다. 멀미를 해댄 통에 핏기라곤 하나도 없는 얼굴을 하고 마당 평상에 그대로 뻗어 누워있으면, 사랑하는 물문때기는 금세 묘약 한 사발과 숟가락을 내주신다.


잘랑거리는 살얼음 소리에 귀가 먼저 번쩍 뜨이고, 그릇을 움켜잡은 두 손의 손금 사이사이로부터 어깻죽지를 타고 목덜미까지 냉기가 전해지면서 지쳐있던 모든 감각이 쨍하게 깨어난다. 곧이어 그릇을 입과 코에 가까이 가져가면 달콤하고 구수한 냄새가 진동을 하고, 나의 온몸은 이 묘약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느라 생기 있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때 틈을 주지 말고 바로 꿀꺽, 꿀꺽, 꿀-꺽,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들이켜면 참을 수 없는 "키야~!"소리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단전 깊은 곳에 남아있던 일말의 멀미 기운까지도 터져 나와서 이내 가뿐하고 생기 넘치는 모습을 되찾게 된다.


이 묘약을 만드는 방법에는 그리 놀라울만한 비법이랄 게 없지만 누가 어떤 마음으로 만드느냐에 따라 그 맛과 효능의 차이는 천차만별이 되기도 한다.


먼저 찜기에 쌀을 올려서 고두밥을 찐다. 밥이 쪄지는 동안에는 엿기름을 면포에 싸서, 물을 받아놓은 대야 안에 넣고 조물조물하여 엿기름을 짜낸다. 그다음 면포는 건져내고 대야에 남은 물과 가라앉은 침전물까지 몽땅 고두밥에 넣는다. 뉴슈가를 적당히 넣고 밥을 삭힌다. 밥알이 얼마간 떠오르기 시작하면 밥알을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비벼서 잘 뭉개지는지 확인한다. 잘 뭉개지면 통째로 불에 올려서 팔팔 끓이다가 설탕을 아끼지 말고 인심껏 충분히 넣는다. 떠오르는 거품을 걷어내며 맛이 잘 어우러질 때까지 조금 더 끓인다. 식힌 후 차갑게 보관한다.





이렇게 만든 묘약은 참으로 신통방통하다. 시원한 것이라면 뭐라도 좋은 여름에는 그저 여름이니까 이만한 것이 없고, 날이 좋은 봄가을에는 평상에 앉아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즐기기에  이만한 것이 없다.


하물며 겨울에는 어떤가. 겨울에 먹는 단술이야말로 별미 중에 별미, 바로 물문때기 단술 중에서도 단연코 최상의 맛이다. 다 끓이고 난 냄비를 통째로 마당 한 옆에 내어놓으면 저녁 식사 후 한껏 떠들고 웃다가 입이 궁금해질 때쯤에 때를 딱 맞춘 살얼음이 아주 알맞게 얼어서 동동 떠있다.


아궁이 가득 장작을 밀어넣어 불을  방 안에 들어앉아 쭉- 들이키는 살얼음 동동 단술은 그야말로 천상의 맛, 신선놀음이다. 금세 한 그릇을 다 비우고 시린 발을 동동거리며 마당으로 나가서 빈그릇을 다시 가득 채워 들어온다. 구들장 위 솜이불 아래로 발가락부터 엉덩이까지 쭉 밀어 넣고 온몸을 지지며 이번에는 한 숟가락씩 떠먹으며 그 맛을 음미해본다.


겨울의 밤공기를 내 입안에 한가득 머금었다 싶으면 이내 사르르 녹아내리는 살얼음과 부드럽게 뭉개지는 밥알의 식감과 달콤하고 구수하고 찐득한 맛에 더해 물문때기의 냄새까지 진하게 느껴진다. 머리가 쨍해지고 가슴 깊은 곳까지 온정이 느껴지는, 내 온몸을 휘감아 압도하는 맛. 이것이 바로 나의 지상낙원을 완성시켜주는 물문때기 단술, 나를 단숨에 행복감 넘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신비한 묘약이다.


시험공부를 하다가도, 회사에서 마음이 상하고 몸이 지쳤을 때도, 임신해서 입덧하는 중에도, 내 삶 중간중간 포인트가 되는 지점에서는 언제나 물문때기 단술이 그리웠다. 물문때기로부터 나의 엄마에게로, 또 나의 엄마로부터 나에게로 그 비결이 전해졌지만, 엄마의 단술은 물문때기의 미치지 못하고, 나의 단술은 엄마의 미치지 못한다.


'시골 엿기름을 쓰지 않아서 그렇다.'라는 핑계를 대며 언젠가 한 번은  시골 엿기름을 사 오기도 했지만, 아직 그 봉지 그대로 냉장고 서랍 안에 놓여있다. 이제는 더 이상 음리 평상이나 구들장에 앉아 물문때기 단술을 맛볼 수가 없기에 '시골 엿기름만 구해온다면 물문때기표 단술을 언제든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일말의 쓸 데 없는 희망을 엿기름 봉지와 함께 냉장고 서랍 안 깊숙이 묻어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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