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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쌍미음 Feb 25. 2021

아들의 분홍색 우산

아들은 학교에도 쓰고 가겠다고 했지만 이젠 내가 차마 못 들려 보내겠다.

첫째 아들이 3세 때 <꼬마버스 타요>에서 가장 좋아한 캐릭터는 구급차 앨리스였다.

작은 앨리스를 늘 손에 들고 다니며 "삐용삐용~"이라며 좋아했다.

4세 때 <로보카 폴리>에서 가장 좋아한 캐릭터 역시 구급차인 엠버였다.

엠버의 분홍색과 리본이 예쁘고 친절하다며 좋아했다.



하루는 그런 아들과 함께 우산을 사러 마트에 갔다.

강아지 캐릭터, 뽀로로, 수많은 로봇 캐릭터 등 선택의 폭은 매우 넓었다.

그중에서 4세 아들이 고른 우산은 바로, 구급차 엠버가 그려진 우산이었다.

전체 바탕이 분홍색이었고, 엠버가 군데군데 그려져 있었고, 우산 밑단 전체에는 프릴이 빙 둘러져있었다.



평소에 여자 색깔, 남자 색깔 구분 없이 옷을 입히며 키워왔고

놀이 역시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여러 가지 놀이를 하면서 키워왔다.

성차별적인 요소는 최대한 배제하며 키우려고 노력해왔다.



그런 내가, 4세 아들이 분홍색 바탕에 프릴 장식이 가득한 엠버 우산을 골랐을 때는 "좋아! 계산하러 가자!"라고 한 번에 대답해주지 못했다.

"아~ 이게 마음에 들었구나!?"라고 말하는 동시에 또래 남자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우산을 몇 개고 더 펼쳐 보여주며 이건 어떠냐고 두어 번 더 물어보았다. 소용없었다.

아들의 답은 확고했다.  "나는 엠버 우산!"

마음에 드는 우산을 한 손에 들고 신나는 기분을 온몸으로 표현해내는 아들, 그리고 그 아들의 손을 잡고 나오는 나는 마음이 복잡했다.



왜 한 번에 "좋아! 사자!"라고 대답해주지 못했을까.

평소에는 성차별적인 요소를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면서 그 순간에는 왜 갈등했을까.

아이에게 '분홍색은 여자 색깔, 파란색은 남자 색깔'이라는 편견을 심어주지 않고 싶었는데 그 순간 흔쾌히 수락하지 못하고 갈등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씁쓸했다.



그 이후 비가 오는 날이면 아이는 신이 나서 프릴 가득한 분홍색 우산을 꺼내 들었고,

어린이집까지 걸어가는 단 3분의 시간 동안 마주치는 많은 어른들에게 꼭 한 소리씩은 들어야만 했다.

심지어 어린이집 남자 친구들 형아들에게도 한 소리씩 들었다.

"야~~ 분홍색은 여자들이 좋아하는 건데~~ 너 왜 우산이 분홍색이냐?~~"

"이거 핑크색인데!? 이거 진짜 네 거 맞아?"



아... 난 이런 상황이 두려웠던 거였구나.

피곤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거였구나.

분홍색 우산을 쓴 아들이 혹시나 놀림을 받게 될까 봐, 주위의 어른들로부터 오지랖을 듣게 될까 봐, 결국 나는 남의 시선이 두려웠던 거였다.



나 스스로 좀 더 다짐을 굳건히 할 겸, 아들에게 말해주었다.

"좋아하는 색깔에는 남자 색깔, 여자 색깔이라는 게 따로 없어. 많은 여자 친구들이 분홍색을 좋아하는 건 맞지만, 모든 여자들이 분홍색을 좋아하는 건 아니야. 여자 친구들 중에서도 파란색이나 검은색, 빨간색을 좋아하는 친구들도 있어. 또 남자 친구들이라고 다 파란색이나 빨간색을 좋아해야 하는 건 아니야. 남자들도 분홍색을 좋아할 수 있어. 너처럼."



이후로 나는 좀 더 당당히 분홍색 우산을 쓴 아들 손을 잡고 동네를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가끔 어린이집 선생님들께서도 우산을 보고 놀라시는 경우도 있었는데, 역시 선생님은 선생님이셨다.

"어!? 우산이.. 참 예쁘다~"라고 말씀해주셨고, 아들은 그 말씀에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4세 때 산 우산을 한 번도 바꾸지 않고 7세 때까지 쭉 썼다. '엠버 사랑 아들'의 분홍색 우산.

본인이 골라서 어린이집 생활 내내 쭉 쓰고 다닌 애착이 생긴, 아들의 '내 우산'.




6세 때, 어린이집에 가는 길






그리고 2020년, 코로나가 전국을 휩쓸어 초1이 된 그 아들이 학교에 가지 못 하게 되고, 입학식도 하지 못 한 채 6월에 처음으로 등교를 하게 되는데, 아.. 비가 온다.

아들은 본인의 우산을 찾았다. '내 우산~'

분홍색 프릴 가득 엠버 우산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나갔다.



아, 이 우산을 산 이후 4년 만에 처음으로 내 마음속에는  갈등이 휘몰아쳤다.

학교에 쓰고 가도 될 것인가. 될 것인가....

다른 친구들의 놀림이 어린이집 때와 비해서 더 심할 텐데, 아이가 상처 받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즉시 그 마음을 어루만져주지도 못 할 텐데, 이대로 교문을 통과하게 해도 될 것인가... 될 것인가......



결국 교문 앞에서 동생의 강아지 캐릭터 우산과 맞바꿔주고 아이를 보냈다.

"이 우산이 좀 더 커. 여기서부터는 네가 가방을 메야하니까 우산을 바꿔 쓰자. 그래야 가방이 젖지 않을 거야."

정말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를 들먹였다.

맞바꾼 두 개의 우산은 사이즈가 완벽히 똑같았다.



아들은 내가 뜻하는 대로 그 방향으로 자랐는데, 나의 다짐은 학교라는 교문 앞에서 무참히 꺾였다.

아니, 내가 꺾었다.

아이가 상처를 입게 될까 봐 라는 핑계를 대보았지만, 그저 핑계였을 뿐이다.

학교라는 새로운 조직 앞에서 난 또다시 남의 시선을 신경 쓰게 된 것이고 이전에는 이겨냈던 그 시선의 무게를 이번에는 극복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바로 새 우산을 주문했다.

투명 바탕에 파란색 별이 그려져 있는, 엠버 우산보다는 조금 더 큰 우산을.



새로운 우산이 집에 도착했을 때, 아들은 새 우산을 펼쳐보고 매우 기뻐했다.

그 이유는 파란색도 아니오, 별 모양도 아닌,

'난 이제 초등학생이니까 옛날보다 더 큰 우산을 갖게 되었다!'라는 이유뿐이었다.

아들이 대견해 보임과 동시에 부러웠고, 나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많은 젊은 부모들이 이전에 비해 색깔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는 것 같지만, 아이들이 접하는 영상물에는 여전히 발전이 없다.


뽀로로에서는 핑크공주 루피가 앞치마를 두른 채 요리를 하고, 패티는 그런 루피를 부러워하며 요리를 배우고자 무척 애를 쓴다.

폴리에 나오는 엠버는 상냥하고 커다란 핑크 리본을 두르고 있다.

미니 특공대에 나오는 여자 캐릭터 루시 역시 분홍색이다.


내가 어렸을 적 보았던 독수리오형제나 후레쉬맨, 파워레인저의 콘셉트와 별반 달라진 점이 없다.

특공대 팀에는 언제나 몇 명의 남자와 단 한 명의 여자가 있으며, 그 여자 캐릭터는 늘 분홍색이다.

여자 어린이들이 분홍색을 피하려야 피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이다.




부디, 앞으로 나오게 될 아이들의 영상물에서는 이러한 편견을 깨부수어주시기를,

아이들이 색깔을 고를 때 더욱 폭넓은 선택지가 마련되기를,

남자아이가 분홍색 우산을 쓰고 다니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가 조성되기를,

- 오늘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를 만들어주시는 감사한 많은 분들께 간곡히 부탁을 드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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