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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쌍미음 Mar 11. 2021

누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는가

환경, 타고난 기질, 주변의 어른들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력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나 자체로서의 나'는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도 내 존재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듣기 일쑤였다. 

무엇이든 부단히 노력을 해야만 그나마 부정적인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내가 어느 정도 자란 이후의 일이었고, 그마저도 몰랐던 어린 시절에는 '존재 부정 폭력'을 별 수 없이 당하고만 있었다.




나의 부모님은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에는 부모교육이라는 것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손안에 작은 화면만 있으면 자녀 양육방법, 아이를 대하는 태도와 화법, 화를 다스리고 감정을 달래주는 방법 등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시절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의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셨지만 그저 방법을 몰랐을 뿐이었다고 생각한다.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어렸던 나 역시, 어른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몰랐기에 많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 덧나고 흉이 져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울증의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나의 아빠는 호인이었으나 자녀 칭찬의 방법에 서투르셨다. 

인색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다정한 것도 아니었다. 

아빠의 칭찬이란 이런 식이었다.


"한 개만 더 맞았으면 100점인데, 아쉽다."

"걔가 없었다면 너 혼자 전교 1등이었을 텐데, 공동 1등이라 아쉽다."

"그래서 너 말고 100점이 몇 명이나 더 있어? 혼자 100점이어야 진짜 잘한 거지!"


은상을 받으면 금상을 받지 못한 것을 아쉽다고 말씀하셨고, 금상을 받으면 몇 명이나 더 금상을 받았느냐고 물으셨다. 

잘 한 딸에게 칭찬을 하고 싶은 마음과 조금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을 섞어서 말씀하신 것 같지만, 나는 왜인지 늘 잘하고도 혼나는 기분이었다.

다음부터는 좋은 성적을 받아와도, 상장을 받아와도, 자랑을 하고 싶지 않아 졌다.

칭찬보다는 또 혼이 나는 기분만 느끼게 될 것 같았다.




그러다 어떤 날에는 내가 받아온 모든 상장을 들고 문구점에 나를 데리고 가셔서 상장을 한 장씩 코팅을 하고, '파일에 철하는 방법'을 알려주시기도 했다. 

파일 표지에 'ㅁㅁ상장 철'이라고 크게 제목을 적어주셨고, 어쩌다 한 번씩은 그 파일을 한 장씩 넘겨보시며 구경하곤 하셨다. 

돌이켜보면 아빠는 나를 내심 자랑스러워하셨던 것 같다. 

단지 자녀를 칭찬하는 방법을 배우신 적이 없고, 표현에 서투르신 것뿐이었다. 

그리고 어렸던 나는 아빠의 칭찬 방법에 상처를 받았다.




마찬가지로, 아빠와 엄마는 나를 사랑하셨으나 다른 어른들의 무례한 태도로부터 나를 지켜내는 방법 역시 모르셨다. 

어디서 알려주는 곳도 없었을뿐더러 '내 자식 보호' 보다는 노인공경과 가부장제 문화 계승이 더욱 중요한 시대였다. 

4형제 중 장남이었던 아빠, 그리고 나의 오빠는 집안에서 가장 귀하디 귀한 장손이었다. 

오빠 다음으로 태어난 나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집안에서 환대를 받지 못했다. 

그 이후 줄줄이 태어난 사촌동생들은 어째서인지 모두가 남자아이였다. 

사촌 7명 중 유일한 여자아이였던 나는 명절이나 아빠의 본가 행사가 있을 때면 언제나 차별대우를 받아왔다.


"계집애가 왜 남자들 노는 데 껴있어? 이리 와서 일손이나 도와!"

"밥을 안 먹어서 키가 안 커서 저렇게 쪼그매. 하나뿐인 손녀딸이. 쯧쯧."

"쪼그만 게, 못 생겨가지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기 위해 별다른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다.

태초부터 작았고 입이 짧았기에 많이 먹는 것은 늘 고역이었다. 

그런데 작다고 비난을 받았다.


여자로 태어났지만 나도 그저 어린이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사촌들이 모여 노는 곳에 끼어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여자애가 일손은 돕지 않고 남자애들과 함께 놀고 있다고 비난을 받았다.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비난을 받았다.

애가 작고 못 생겼다고. 공부 잘해서 뭐하냐고, 시집 가면 그만이라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무엇 하나 있는 그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존재 부정 폭력'을 받아왔다.




어느 날인가부터 명절이나 아빠 본가의 행사가 있을 때면 며칠 전부터 시골에 가기 싫다고 울었다.

정말 가기 싫다고, 집에 혼자 있겠다고, 서럽게 울었다. 하나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가부장제 문화가 굳건한 집안에서 한낱 계집애의 감정이나 마음의 상처 따위란 참으로 하찮기가 짝이 없는 것이었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장남인 아빠, 맏며느리인 엄마는 가부장제 문화에서의 본인의 역할에 충실하느라 부모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셨다. 

딸인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 

'다른 어른들이 네가 귀여워서 장난하는 거다'라는 말로 포장하셨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어른들의 거침 없는 비난에 노출되어야만 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난 후에는 사촌들과 함께 어울려 노는 것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진작에 훨씬 덩치가 커진 남자 동생들과 쪼그만 누나가 대체 무엇을 하며 함께 놀 수 있었을까. 

얼마큼 성장한 이후 사촌들 사이에서 내가 맡을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은 깍두기뿐이었다.




나는 왜, 나만 왜, 이 집안에서 쓸 데 없이 여자로 태어난 것인가.

어른들로부터 받았던 비난과 존재의 부정을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나 스스로에게 쏟아붓고 있었다. 

거침없이.

그렇게 우울증은 나조차도 모르는 사이에 어린 시절부터 내 안에 뿌리를 내려서 나와 함께 점점 자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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